• "비정규 노동자 김준규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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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3월 06일 02: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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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안동의 작은 교도소에서 4계절을 보내고 있는 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김준규입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의 끝자락을 밀어내는 감미로운 봄바람도 난방조차 되지 않는 0.7평 독방에 갇혀 있는 그에게는 한겨울 삭풍입니다.

    지난 2월 23일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듣고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김준규는 이 장면을 창살 너머로 9시 뉴스를 통해 덤덤하게 보았습니다. 현대차를 상대로 정규직 소송에서 처음으로 이겨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끌어낸 주역이지만 그를 떠올린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기억에서 사라진 대법원 판결의 주역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01년 5월 26일, 김준규는 현대차 아산공장 사내하청업체 태승기업에 들어가 소나타를 만들다 2003년 6월 3일 해고되었습니다. 하청업체 관리자가 월차를 쓰겠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식칼을 휘둘러 아킬레스건을 다치게 만들었던 사건으로, 2003년 3월 9일 노동조합이 만들어졌고, 그는 회계감사를 맡았습니다.

    현대차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비정규직노조에 대한 회사의 탄압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현대차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모두 공장에서 쫓아냈고,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용역경비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하루를 멀다하고 그들의 몸에 쏟아졌습니다. 회사는 김준규를 업무방해, 폭력, 주거침입 등으로 고소 고발했고, 그는 2006년 7월부터 6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현대차에 찍힌 그의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2006년 정몽구 회장이 비자금 사건으로 구속되고 재판을 받을 때 “정몽구를 구속하라”고 외치다 경비대와 직원들에 의해 짓밟혀야 했습니다. 회사는 출입금지가처분신청, 업무방해, 경비폭행 등으로 수차례 그를 고소했습니다.

    그는 별명이 ‘비정규 변호사’라고 불릴 만큼 법을 열심히 공부했고, 무척 꼼꼼했습니다. 현장에 있을 때 모아두었던 자료와 사진, 정규직 간부들에게 받은 회사의 문서, 회사가 직접 업무지시를 했던 내용 등 현대차의 불법 자료를 모두 모았습니다. 그는 현대차를 상대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냈고, 2007년 6월 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처음으로 승소했습니다.

    1,500리를 걸으며 비정규직의 아픔을 알리다

    현대차를 상대로 정규직 소송을 승리한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2007년 8월 27일 현대차 울산공장을 출발해 창원, 광주, 전주, 아산, 화성, 안산, 인천을 거쳐 서울 양재동 현대차본사까지 19일 동안 1,500리 600km에 이르는 길을 걸었습니다.

       
      ▲김준규(맨 오른쪽)가 전국순회를 하는 동안 함께 걷고 있는 ‘동지들’. 

    울산공장 최병승이 노동위원회에 낸 부당해고 구제신청이 잇따라 패소했던 상황에서 김준규의 승소는 현대차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회사는 불법파견을 은폐하기 위해 판결문에 나와 있는 증거들을 하나씩 없애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시 그 증거들을 모아 법원에 제출했고, 이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하급심의 엇갈린 판결을 정리하는 판결을 하였고, 이어 11월 10일 서울고등법원은 재차 그에게 현대차 정규직이라고 판결하여 현재 대법원의 마지막 선고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대차는 김준규를 끔찍이도 싫어했습니다. 회사는 항소심에서 “근로자파견 관계가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계속근로기간 2년이 경과하지 않았다”며 비정규직만 근무하는 태승기업 무빙라인 6개월과 결근 기간을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2001년 5월 23일 입사해 2003년 6월 3일 해고된 김준규는 2년 10일을 일했는데, 그 10일 때문에 정규직으로 간주되는 것이 싫은 현대차가 치사하게도 결근일까지 계산해 2년이 안됐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은 “원고 김준규의 대영기전 근무기간 동안 피고 주장과 같은 결근 등의 사정이 일부 있다고 하여 그 기간을 근로자파견기간에서 제외할 것도 아니다”라며 김준규는 2003년 5월 25일부터 현대차 근로자의 지위에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법원에서 현대차 정규직이라는 판결이 나고 회사가 출근을 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감옥에 간 사연

    2008년 가을 세계 경제위기가 몰아치고, 현대차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거 공장에서 쫓아내고 있을 때입니다. 그는 전국의 공장을 다니며 비정규직 우선해고에 반대하고, 탐욕의 재벌을 알려냈습니다.

    그는 낮은 곳을 향한 연대를 온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마음을 모아 용산참사 철거민들의 투쟁 현장에 함께 했습니다. 2009년 뜨거웠던 여름 쌍용차 공장 앞에서 여름 휴가를 반납하고 ‘함께 살자’고 호소했습니다.

    김준규는 2011년 5월 6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실형 1년 6월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되었습니다. 2009년 12월 철도노조 파업을 이유로 서울 영등포에 있던 민주노총 건물이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있을 때 그는 검문하는 경찰의 정지 요구에 불응하고, 경찰을 치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연행되었습니다.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풀려났지만,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이 유죄로 인정되어 실형 1년 6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지난 8년 동안 현대차 회사에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싸웠던 그는 회사에 찍혀 수많은 고소고발 건으로 처벌을 받았고, 많은 전과와 누범기간 때문에 집행유예를 받기 어려웠습니다.

    현대차가 법을 지켰다면 감옥에 가지 않았을 사람

    2004년 노동부가 불법파견 판정을 내렸을 때 현대차가 김준규를 정규직으로 채용했다면 그는 감옥에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2007년 6월 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년 이상 근무한 김준규는 현대차 근로자라는 첫 판결을 내렸을 때 그를 정규직으로 채용했다면 지금 그는 구속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 번을 양보해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의 판결 이후 노사 교섭을 통해 정규직화를 약속했다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준규는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정규직으로 채용했어야 할 자리에 비정규직을 사용해 불법 파견과 착취를 일삼아 온 현대차 재벌에 맞서 1만명에 달하는 현대차 비정규직, 나아가 850만 비정규직을 위해 싸움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대가로 헤아릴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8년간 불법을 저지른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비자금 조성과 횡령으로 2008년 6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지만 73일 만에 사면됐습니다. 대법원이 현대차 사내하청은 정규직이라고 판결했고, 그의 최종 판결이 눈앞에 있지만, 그는 앞으로도 8개월 가까이 감옥살이를 해야 합니다.

    5월 초면 그는 1년 6월 형기의 2/3 이상을 채워 형집행정지로 풀려날 수 있게 됩니다. 불법을 바로잡고자 했던 한 젊은 노동자가 1년 가까이 영어의 몸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동지들이 있는 공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는 대법원 판결에도 소외되어 있는 2~3차 사내하청 노동자, 한시하청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김준규, 그의 환한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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