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딴따라들이여, 민중과 함께 부대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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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2월 11일 10: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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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5월 체코의 프라하 여행 때가 생각이 납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지라 외국에 나가서도 항상 그 곳 음악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현지의 음악 공간들을 많이 찾아가게 직접 접해보게 됩니다.

    프라하에서도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느 허름하고 꽤 오래된 듯한 라이브 클럽을 찾게 되었습니다. 당일의 라인업은 프랑스에서 온 노이즈 펑크 밴드들이었습니다. 1층의 바(Bar)를 지나 지하로 내려가니 공연 공간이 있었습니다. 별로 넓지 않았고 깔끔하다고도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프라하에서 홍대 인디를 생각하다

    평일 저녁 공연이라 그런지 관객은 10명 남짓. 제가 들어갔을 때 막 한 팀의 공연이 끝나고 다음 밴드인 프랑스 밴드가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두 명의 여성 보컬과 드럼, 기타, 키보드로 구성된(베이시스트가 없는) 5인조 밴드였습니다.

    준비가 끝나고 무대로 올라가 그들이 보여준 퍼포먼스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단순 반복 리듬을 부술듯이 두드려대는 드럼과 코드와 리프 따위와는 상관없는 피드백 사운드와 노이즈 메이킹으로 일관하는 기타, 마찬가지 키보드를 아래위로 훑어대던 연주까지, 일반적으로 가질 수 있는 상식적인 음악의 형식을 한참 벗어난 사운드와 연주였습니다.

    거기에 두 명의 여성 보컬들은 공연 직전 손으로 쓴 듯한 메모를 들고 멜로디라고는 느끼기 힘든 고음의 샤우팅만으로 메모에 적혀있는 가사(?)를 그저 읽어나가기만 했습니다. 진정한 노이즈였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인디’였습니다. 마치 "모든 상업적인 것들은 꺼져!"라고 외치는 듯했습니다.

    처음 그들의 연주를 들었을 때 의아해 하던 나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의 사운드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고 그들의 느낌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음악이라 할 수 없는 연주를 만들어내는 그들 모두는 적은 관객 수와 그다지 좋지 않은 연주 환경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시종일관 유쾌하고 즐거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난 그들에게 투어 중이냐고 물어봤고, 그들은 매우 당연하게 "우리 뒤에 연주할 밴드 멤버 세명과 함께 밴을 타고 1달간 클럽 투어 중"이라고 답했습니다.

       
      ▲ 4인조 밴드 ‘더 문’. 맨 왼쪽이 필자.

    그들의 충격적인 연주를 보고난 후 난 자연스레 홍대 인근에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나의 친구들, 후배들을 떠올렸습니다. 앞서 본 프랑스의 노이즈 밴드보다 훨씬 더 대중친화적(?)인 음악을 연주하면서도 항상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인디밴드’라는 본인이 원치 않는 혹은 너무나 애매한 딱지를 달고 자신의 음악에 대해 자부심과 뮤지션으로서의 자존감을 가지지 못한 채 마음속 응어리를 갖고 있는 수많은 동료 뮤지션들이 생각났습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면서도 그토록 즐거워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의구심과 부러움과 씁쓸함이 뒤섞인 채 난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예술, 자유 그리고 제도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난 프라하에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의문들을 풀어보려 많은 고민을 하던 차에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씨가 어느 인터뷰에서 "프랑스의 재즈 뮤지션들은 국가에서 돈을 받으며 음악을 한다."라고 말한 것을 들었고, 우연한 기회에 읽게 된 어느 책에서 프랑스의 문화예술인 실업급여제도인 앵떼르미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난 프랑스로부터 온 그 노이즈 펑크밴드 멤버들에 대한 내 의구심과 부러움의 실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사회 전체의 문화예술에 대한 높은 인식 수준과 그것을 바탕으로 문화예술 기반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지원이 있기에 프랑스의 그 젊은이들은 즐겁고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겁니다.

    문화예술의 공공성을 인정받고 그 공공성을 지켜내기 위해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사회, 그야말로 한국의 문화예술 현실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진, 꿈만 같은 세상이 유럽 대륙 어느 곳에 실재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뜨지 못하면 자신의 음악에 자부심을 갖기 힘들고, 피눈물 나게 노력해서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고 음악계에서 음악성을 인정받는다 해도 음악인으로서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우리의 삶. 그래서, 결국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만족감은커녕 후회와 불안만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뮤지션들.

    난 당연한 듯이 여겨지는 이런 의식들이 싫었고, 보다 더 당당한 뮤지션의 삶이 보장되는 세상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작년 두 번의 유데이 페스티벌에 함께 한 이유이고, 작년의 참여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더 구체적인 고민의 결과로 제안하게 된 것이 가칭 ‘뮤지션 유니온’입니다.

       
      ▲사진=청년유니온

    싸우지 않으면 자유는 없다

    모두들 짐작만 할 뿐인 뮤지션들의 삶의 구체적 모습을 숫자로 드러내고 함께 공유하기 위해 청년유니온과 함께 실태조사를 하고 2월 10일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누구도 대신 얘기해주고 제안하지 않는 뮤지션들의 바램과 희망들을 뮤지션 스스로의 힘으로 얘기하고 토론하기 위해 뮤지션들의 유니온을 제안하고 구체적 삶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저 생존을 유지하는 삶이 아닌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하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뮤지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뮤지션들과 함께 만들어갈 유니온은 지금 우리를 둘러싼 세상 모두에게 말을 걸고 설득하고 때론 싸워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의 바램을 가지고 뮤지션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얘기들이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프랑스의 문화예술인 실업급여 제도는 사실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민중의 유구한 투쟁 역사 속에 문화예술인들은 항상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본인들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순과 불의에 맞서고, 그 모순과 불의의 피해자인 사회적 약자들과 늘 연대하며 권력 내지 자본과의 투쟁에서 예술가적 상상력을 마음껏 동원하여 민중과 함께 해왔습니다. 그로 인해 프랑스의 문화예술인들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로부터 노동자로,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자 연대의 대상으로 인정받아 문화예술의 공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앞으로 우리의 길도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와 유리되고 격리된 파편화된 모습으로서의 예술가가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일원으로서 연대하고 모든 억압과 부정에 반대하며 투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민중들이 뮤지션들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문제에 함께 연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분명 지면을 딛고 있는 두 발을 허공에 띄우고 있는 듯한 삶의 모습을 이젠 버려야 합니다.

    달라서 아름다울 수 있는 음악을

    또한, 뮤지션 스스로의 자존감과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현재 자본주의의 심화에 의한 예술가들의 소외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우리 나라엔 뿌리깊은 ‘예술인-소위 딴따라-경시풍조’의 역사가 존재합니다.

    거기에 사회 모든 분야에 뿌리깊이 자리잡은 경쟁구조는 다양성의 잣대로 판단해야 할 음악마저 획일적인 기준으로 줄을 세우고 경쟁 구도를 만드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소위 사회 전반의 음악적 가치판단 기준은 오로지 쉽게 소비될 수 있는 상품성이 최우선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이러한 역사와 구조는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당사자들인 뮤지션들의 의식에도 깊이 영향을 끼쳐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뮤지션이라는 의식을 우리들 내부에서 찾아 보기 무척이나 어려워졌습니다.

    이제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잣대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자본이 요구하는 상품성이라는 가치 기준을 벗어나 ‘달라서 아름다울 수 있는’ 우리의 음악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의 가치가 아닌 예술가들만이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린 우리가 선택한 삶을 사랑하고 더이상 우리가 만들어낸 음악으로 인해 소외당하지 않는 날이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많이 들어온 말은 ‘뮤지션은 혹은 예술가는 자유로와야 하고 자유롭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충분히 공감하고 저 자신의 인생이 그러하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자유’란 말이 때론 너무나 공허하고 너무나 비현실적인 의미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그저 괴퍅한 성격을 갖고 기행을 일삼는 삶의 모습을 가지는 것이 예술가의 자유로움인지, 마치 수도승처럼 자신의 창작을 위해 세상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과 등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유로움인지, 아니면 자신의 사회적 명성과 현실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자유로움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음악인 여러분, 준비됐나요?

    하지만, 한 가지 내게 분명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영혼과 정신의 자유로움’입니다. 본인이 꿈꾸고 상상하는 그 무엇도 작품이 될 수 있게 하는 ‘자유로움’, 그것이 예술가를, 뮤지션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궁극적 자유는 개인적 규정과 상상만으로 얻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뮤지션이 만들어내는 음악이 사회 속에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고 뮤지션으로서, 창작자로서의 삶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때만이 우리의 자유는 얻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만들어갈 뮤지션 유니온을 통해 우리 함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꿈을 꾸었으면 좋겠습니다. 음악인 여러분, 준비됐나요?

    * 이 글의 필자는 4인조 밴드 ‘더 문’의 보컬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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