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의 이야기(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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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2월 24일 0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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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시간 단축투쟁과 GOG
    솔직히 노동운동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나는 이해 못하는 일들이 일었났다. 지난해부터 독일노동운동이 주 35시간요구를 걸고 투쟁하는데 주 35시간 요구를 내건 것에 대한 내가 속한 GOG는 요구가 달랐다. GOG의 주장은 월요일부터 ~ 금요일까지 매일 7시간 주 35시간 요구를 요구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금속연맹의 주 35시간 요구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동시간 유연성에 긴하면 주 35시간은 경영주가 자기 입맛에 맞게 맘대로 하게 되는 노동시간 유연성이 인정되게 된다는거 였다.
    예로- 주 35시간이 아니라 30시간제를 기업주가 제안해서 하는데 주말이 없고, 자기들 생산프로그램으로 노동자들을 노동시간에 적용하게 한다는 거 였다. 말 그대로 노동시간 유연성이었는데 주 30시간으로 노동자들의 만남과 소통을 통제하는 거로 운영되는거를 벨기에 어느 공장을 예로 들었다.

    예전에는 주말은 항상 휴일이어서 모임과 세미나 등 행사를 하기도하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취미활동도 할 수 있었는데 노동시간이 10시간이나 줄었는데도 주 7일간속에서 노동시간을 유연하게 만들어 놓으니 생활리듬이 깨지고 상호 소통도 깨져서 노동자들은 시간은 있는데 ‘함께’가 아닌 혼자로 생활하게 되어 개인주의화 심화된다는 것이었다.
    좌파들은 동일하게 주35시간 월요일부터 ~ 금요일까지 매일 7시간 노동시간단축주장을 했단다.
    Opel 자동차공장의 전체 직장노동자평의원도 이런 주장을 금속연맹에 제안하게 되었단다.

     

     

     

     

     

    솔직히 아빠는 한국처럼 공장점거도 좀하고 현장지킴이도 만들고 뭐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일을 하나도 일어나지 않더라. 독일금속연맹은 남북지역 자동차 부품공장들을 중심으로 파업을 했다.
    너도 이제는 알지? 독일에서는 파업하면 파업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노조에서 줘야 하는거 말이다. 그러다 보니 노조도 파업을 소수 작업장을 파업해서 다수의 작업장이 가동되지 않게 하는거 였는데 남부지역 남풉업체가 이번투쟁에 선봉에 선거 였던거 였지. 어찌됐든 복흠에 우리공장도 남부지역 파업으로 자금만치 5주정도 직장폐쇄가 되었던거 였다.
    헌데 문제가 생긴 거 였다. 파업사업장은 ‘금속연맹’에서 임금을 주는데 직장폐쇠는 누가 임금을 주냐, 였다.
    헌데 이문제가 재미있게도 독일복지정책과 어울리니 문제가 달라졌다는 거 다. 만일 업주가 임금을 주지 않으면 사회복지 제도에 의해서 정부가 복지 금으로 줘야 하는 문제가 생기다 보니 노사가 아니라 정사가 된거였다.
    하여간 우리는 5주간 회사에 의해서 직장이 폐쇄했어도 기본임금을 받았고, 노동시간 단축투쟁을 계속되어 갔다.
    물론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아빠도 잘 모른다. 하여간 임금을 받았단다.

    [주말모임 사진]

    서백림노동교실 조직되었다.
    어학코스를 마친 세균 형이(현 서울대 교수) 서베를린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서 조합원 몇이 함께 이사짐을 싣고 세베를린으로 갔다.
    베를린에 사는 한마음조합원을 형에게 인사 시키면서 베를린지역 노동자모임을 만들라고 했다.
    한국에서 이미 활동한 경험을 살려서 세균형은 노동자들과 모임을 시작하고 어느날 서백림노동교실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고 연락이 왔다. 노동교실은 비록 소수이지만 매년 11월이면 지금도 전태일동지 추모 모임을 지속하며, 너희들도 아는 80년 광주오월항쟁을 계승하고자 하는 ‘재유럽오월민중제’ 참가 단체로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지부는 노동교실이 만들어져 천군마마가 생긴 것이었다. 대표와 나는 한 달에 한번씩 분단을 넘나들며 세베를린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곳에서 너희들은 조카처럼 생각하고 대해 주던 영숙 고모를 만났는데, 고모는 재독한국여성모임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하는 일꾼이었다. 특히 문화운동에 열심 이었는데 그때 이미 풍물패가 있더라. 그래서 베를린지역에서 14주기 추모회 때 뒷풀이 문화프로그램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는데 하겠다고 해서 우린 또 천군마마가 생겼다.

    그때까지 난 재독한국여성모임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저 파독한인간호사 강제추방 때 반대투쟁을 해서 강제추방을 막고 체류권을 쟁취한 단체라고 정도만 알고 있었단다. 헌데 재독한인이주노동자운동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활동과 투쟁을 한 모임 임을 한참후에야 알았단다. 여성모임의 이야기는 나중에 좀 이야기 하기로 하자.

    행사 준비이야기
    추모회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전태일동지 한풀이 마당굿을 하자고 준비하는데 마침 유학와 있던 이혜경선생(현 여성문화예술기획대표)이 있어서 찾아가 우리에 이야기를 하고 각본과 연출을 부탁을 했더니 각본은 공동으로 만들고 연출을 도와주겠다고 해서 조합원들을 중심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아빠 등 세사람은 탈춤장단에 맞춰 투쟁하다가 얻어맞고, 구속되고, 해고되어 굶주림에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상징하는 춤을 추는거 였고, 인선이 아빠와 엄마는 그들이 해방되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는 역으로 출연하고, 너의 친구 선이 엄마는 무당으로 출연을 했는데 정말 잘했단다.
    그리고 몇 조합원들은 구천을 헤매는 노동자들은 잘가라고 상여굿을 연습하는데 전라도가 고향인 조형의 상여 메기는 소리가 하도 처량하여 연습 중에도 눈물이 나더라.

    제상에 놓을 사진이 마땅치 않아서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독일친구가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선전물과 잡지에 실린 판화그림을 가지고가 이야기 했더니 그려 주겠다고 해서 마련했다.
    그래서 영상사진은 열사들 추모사진으로 만들었다.

     

     

     

     

     

    -브레멘에서 온 학생의 붓글씨-
    추모회 행사준비에 정신이 없을 때 브레멘 사는 한 여학생이 전화를 해 왔다. 자기가 행사 하루 전에 와서 도울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은 예뿐아이와 남편과 함께 목요일에 울 집으로 달려와서 나는 행사장에 쓸 만장에 구호(전태일동지 만세, 민주민족통일 만세, 민주노동운동 만세)를 부탁했는데 넘 잘 썼다.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 야학과 현장취업으로 활동한일 있는 학생동지 였단다.
    지금은 저 하늘나라에 가 있단다. 승희라는 멋진 유학생 동지 였는데 말이다.

    행사가 시작되는 1984년 11월 30일(금) 눈비 바람이 불었다. 헌데 날씨는 포근했단다. 승희네는 행사장 안내판을 부치려 일직 출발하고 난 한마음조합원들과 조합 버스를 끌고서 부퍼탈로 달려갔다.

    14주기 추모회

     

     

     

     

    전태일동지 산화 14주기 추모회가 지난 11월 30일- 12월 2일까지 부퍼탈(Wuppertal)시의 개신교 교육센터에서 한국인 및 독일인 동료 150여명이 모인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유럽지부가 마련한 이번 추모회에서 김대천 대표는 그의 개회사를 통해 전태일동지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신지 어언 14년이 지났다고 말하고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동료들이 모여 그의 유언을 되새기며 명복을 빌게 됨은 한 이름없는 노동자의 죽엄이 과연 헛되지 않았다는 것과 그의 외침이 봉화가 되어 지금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번져 편안한 길만을 찾으려는 우리들의 마음속에까지 불을 질렀다고 하며 해외란 특수 상황속에서 고국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외침을 외면한채 무사안인주의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의 현 위치를 경고했다. 그리고 국내노동운동과의 연대에 있어서도 “쓰다 남은 물질로 선심”이라도 쓰려는 태도는 고쳐야 한다고 하며 노동운동에 대한 그룻된 인식을 경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던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건설될 때 까지 우리 해외동포들도 국내노동운동에 연대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했다.

    이번 추모회에서는 강연회와 문화행사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국내 외 노동운동의 실태와 전망을 중심으로 “한국노동운동과 전태일동지”, “청계피복노동조합과 전태일동지” 그리고 “한국노동운동과 해외한국노동자의 과제”라는 주제가 각각 발표 되었고 이어 현장에서 지켜본 증인들의 산 증언과 해외노동운동의 현장증언이 보고되는 등 전에 보기 드물었던 알찬 토론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첫째, 한국 노동운동이 하나로 뭉쳐 오늘에 이루게 된 것은 전태일동지의 투쟁정신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과 노동운동이 배제된 어느 형태의 운동도 “기만적 행위”라는 강력한 비판이 뒤 따랐고 어느 개인이나 소수집단의 이익추구에만 급급한 나머지 온 운동의 전열을 흐리게 하는 무리들에겐 이젠 그 설자리가 없다는 강력한 선고가 전체노동운동의 이름으로 내렸다.
    이번 토론 중 제기된 제반 기성 민주단체나 개인의 비판은 정중히 받아들였으며 앞으로는 노동운동과도 긴밀한 연대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사실이 재삼 강조되었다.

    둘째 번으로는 문화행사였던바 먼저 영화 어머니가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전태일동지의 생애를 영화화 한 것으로 이미 구라파의 각 영화제에 발표되어 높이 평가를 받고 있은 작품이다. 그리고 추모식을 비롯하여 한풀이 마당굿, 농악, 탈춤, 타령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이번 추모회는 일단 성공적으로 끝냈다.
    이번 추모회는 남녀노소는 물론 노동자, 학생, 그리고 각 민주단체에서도 참석해 노동운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과제가 부여 되었다는 것과 기엄을 토해내는 고고한 이론이나 그 어느 형태의 운동도 노동운동과 동떨어진 상태에서는 모두가 내용없는 공상에 불과하다는 의견에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빠른 시일내에 노동운동에 관한 세미나 개최와 악질적 노동법개정에 관한 서명운동전개를 결의하고 추모회를 마쳤다. [유럽지부가 각 언론사에 보낸 기사문]

    추모회는 다른 모임들과 다른 게 문화로서 소통하려는 노력을 했단다. 특히 전태일한풀이 마당굿 공연이었다. 인원 및 시간적 제약 등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준비된 마당굿은 각단체 대표들의 추모와 유럽지부 대표 인사말로 열고, 구천을 헤메는 동지들 편히쉬게 해달라는 빌고, 그리고 무당의 열기 있는 춤과 대비하여 민중들의 고통을 몸동작만으로 표현한 귀신들의 춤으로 표현하고(대표, 사무장, 선희아빠가 출연), 또한 전태일동지가 귀신으로(홍세화 현 진보신당대표) 등장하여 관객들에게 간곡하게 호소하는 장면 등으로 모든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마당굿은 전태일동지의 횃불을 참가자 전원이 어어받고 농악대의 인솔로 <원형궐기무>로 연결되어 뜨거운 열기속에서 전태일동지가 남긴 덩이를 이어받은 것을 전원이 스스로 다짐하는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모두가 횃불을 들고 풍물패를 따라 운동장을 도는데 마치 노동해방이 온 세상같았다.
    뒷풀이 문화마당은 서베를린 재독한국여성모임 진행했는데 아빠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신나게 웃고, 놀아 본적이 없는거 같다. 특히 문화마당을 진행하는 여성동지가 얼마나 재치있게 진행하는지 아직도 선하게 떠오른다.
    아빠는 첨으로 탈춤을 보았고, 풍물과 고전무용, 민요와 타령이 곁들어진 마당이 고향으로 달려가게 허들아.

    [ 인선아빠와 엄마 비는 장면] [ 이혜경 연출과 전태일로 출연한 홍세화 대표]

    [한풀이 마당굿 유투브 -http://www.youtube.com/watch?v=xLE29vOr0Vo]

    한마음조합의 힘
    60여명 참석할 거라고 교육센터에 신청했는데 150여명이 참석하여 정신이 빠졌단다. 날씨가 포근해서 다행이었다. 모두가 앉을자리만 있으면 앉아서 잠을 자거나 날밤 새우는 토론을 여기저기 모여서 하들라. 식사도 60인분만 나와서 한마음조합 가래떡공장에서 찜솥과 가스반화를 가져와 곰국을 끓이고 이집저집에서 반찬을 조합원들이 가져와 국밥으로 해결했단다. 그동안 한마음조합은 늘어났고, 동포사회에 이미지도 좋아져서 이었는지 이번 추모회 준비위원으로 복흠한인회장이 참여하였단다.

    전태일동지는 이렇게 독일에서 파독광부, 간호사 주체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부활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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