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보 송경동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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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2월 06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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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린스의 노래 “때로는 4월에도 눈이 온다네”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트레이시는 언제나 사랑 때문에 울었어. 고통 때문에 운 게 아니었어… 트레이시처럼 우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야.” 난 이 노래를 들으면 송경동 시인이 생각난다. 그는 소문난 울보다. 내 앞에서도 두 번을 울었다. 그런데 두 번 모두 자기 연민이나 삶에 대한 회환 때문에 울지 않았다. 한 번은 시를 읽고 난 후 울었고 다른 한 번은 오래 전에 죽은 동료 생각 때문에 울었다. 그는 지금 감옥에 있다. 아마 그는 감방에서도 울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때문에 울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오는 수많은 편지들을 읽으면서 울고 있을 것이고 답장을 쓰며 울고 있을 것이고 희망버스 이후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희망 텐트와 희망 뚜벅이 운동 소식에 울고 있을 것이고 얼마 전 사망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소식에 울고 있을 것이다. 트레이시처럼 그 또한 사랑 때문에 울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그런 울보 시인도 없을 것이고 울보 수감자도 없을 것이다.

    감옥서 울고 법정에선 울지 않을 사람

    그러나 송경동 시인은 법정에서는 울지 않을 것이다. 법정에서 그는 여전히 동료들과 함께 싸움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1차 공판 때 자신과 희망버스 운동이 무죄임을 당당히 밝혔다. 그는 한진 중공업의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의 존엄, 심지어는 생명에 대한 일말의 배려도 없이 사측이 일방적으로 단행한 폭력적 조치였다고 역설하였다. 희망버스 운동은 귀를 닫아버린 사측의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해 시민사회의 참여와 정치권의 관심을 촉구할 수밖에 없었던 정당한 문제제기였다고 역설하였다. 나는 송경동 시인을 비롯한 참여자들이 재판정에 서 있고, 그들이 그곳에서도 지난해 거리에서 했던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버스 운동의 연장이라고 본다. 애초부터 희망버스 운동은 우리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 민중과 권력 사이의 본질적인 불평등을 문제 삼고 이러한 불평등 구조 하에서 “함께 희망을 꿈꾼다는 것”을 기획하고 구현하려는 집합적 노력이었다.

    나는 희망버스에 참여하면서 목격하였다. 소위 폴리스 라인은 부산시의 공공장소로부터 시위대를 분리하기 위해 그어진 것이 아니었다. 폴리스 라인은 한진 중공업이라는 사유지와 시위대를 분리하기 위해 그어진 것이었다. 경찰은 마치 희망버스 참여자들이 한진 중공업 크레인 위의 김진숙 지도위원과 농성 노동자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대단한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촛불집회 때 청와대를 지키는 것처럼 한진 중공업을 수호했다. 그런데 가당찮게도 지금 법정에서 검찰은 ‘공공’의 이름으로 희망버스 기획자들을 처벌하려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법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은 희망버스 참여자들이 지난해 여름 이후 내내 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면서 그러했던 것처럼 무엇이 ‘공공의 이익’인지 사법권력과 대치하면서 공방하고 입증하는 싸움이다.

    거리의 투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회

    불평등에 대한 문제제기, 정의와 공공의 이익을 둘러싼 싸움이 거리에서 곧바로 법정으로 직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라는 자본의 무자비한 칼날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는 제도와 정책이 전무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민주주의적 권리와 아무 상관없는 무능력한 이들의 제몫 챙기기로 치부해버리는 비인간적인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송경동 시인과 같은 거리의 투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부와 정당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있어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한 상황에서, 소위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폴리스 라인이 실은 자본의 사유지를 지키기 위해 그어지는 상황에서 법정은 두 번째 부산 거리, 두 번째 신영도 대교, 두 번째 한진 중공업 앞 대로일 뿐이다. 요컨대 송경동, 정진우, 박래군은 법정에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법권력이 그은 잘못된 치안의 분할선을 고쳐 긋는 자들이다.

    그들을 지지하는 나는 주장한다. 송경동과 정진우와 박래군의 싸움은 무죄일 뿐더러 이 사회에서 필요하고 옳은 것이었다.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재벌을 위해 온갖 특혜 정책을 베풀고 있는 이 정권에서 희생당한 노동자 친구들을 위해 시민들과 함께 모여 호소하고 노래하고 행진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소란’이란 말인가? 2차 공판을 앞두고 나는 검찰과 재판부에 말한다. 이제 그들을 당신들이 지키려 한다는 그 공공의 질서로부터 놓아줘라. 우리가 보기에 거기는 법정이 아니라 당신네 친구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당신들이 제멋대로 선을 그어놓은 또 다른 거리일 뿐이다. 우리는 그 거리의 질서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들을 친구들의 품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라.

    나는 울보 송경동을 떠올리며 그에게 말한다. 나는 당신이 그립다. 당신이 친구들 앞에서 징징대며 시를 읽고 노래를 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 당신은 계속 싸워야 하고 우리는 당신의 싸움을 지지해야 한다. 우리는 지난해 부산으로 떠나는 길을 당신에게 맡겼었다. 그러니 당신이 부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도는 이제 우리가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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