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수많은 의미와 이름의 총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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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2월 06일 08: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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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밤 아주 춥습니다.

저는 오늘 밤 김진숙이 아직도 크레인 위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크레인이 바람에 한 바퀴 돌기도 할까요? 울부짖는 바람이 크레인 유리창을 불안하게 때리기도 할까요? 그녀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체온만큼 중요한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 팔로 자기를 꼭 안고 있어야 했을까요? 저는 김진숙이 이 혹한을 크레인 위에서 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또 김진숙이 어떻게 그렇게 크레인에서 오래 견딜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그녀가 노동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혹시 다른 노동자들이 하루하루 노동하듯이 그렇게 크레인 위에서 하루하루를 보냈을까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의 끝없는 노력과 인내, 동료들과의 싱거운 농담, 일을 마친 후 먹게 될 따뜻한 밥과 잠, 노동자들의 하루는 그런 것입니다. 크레인 위에서 그녀의 노동도 그러했을까요? 그녀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노동을 하고 있었던 걸까요?

현실을 만들어내는 노동

오늘날 대부분의 일하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기쁨이 있습니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 뭔가를, 그러니까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기쁨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린 재능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 뭔가 쓸모 있는 것, 현실에 굳건히 그 모습을 드러낼 어떤 것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 일을 하는데 넌 참 꼭 필요한 사람이야.”란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만들어내려 했던 것이 대단한 상품, 위대한 건축물일 필요도 없습니다. 한순간만으로 위대한 무엇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음, 그것이 바로 노동의 속성이니까요.

하지만 김진숙은 우리가 잃어버린 기쁨의 실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우리는 언제든 비현실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맘속 깊은 곳의 불안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서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면서도, 따로 떨어져서도 같이 꾸는 악몽 같은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노동을 다른 곳에 바치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김진숙은 반복되는 정리해고를 통해 노동자가 기계보다 못하게 취급되는 것을 수도 없이 봐왔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김 진숙은 이번엔 자신의 손으로 노동자들의 잃어버린 기쁨을 되찾는 노동을 하기로 맘먹었습니다. 그녀는 크레인 위에서 정리해고가 없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노동, 소외되고 무의미한 노동이 아니라 가치 있는 노동을 하기로 맘먹었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노동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노동인 동시에 비참한 현실과 맞서는 싸움이 되었습니다.

   
  ▲싸우는 시인, 송경동. 

송경동 시의 재료들

김진숙이 노동-싸움을 하고 있을 때 희망 버스가 왔습니다. 기륭전자 농성 현장에서 다리를 다친 송경동이 절뚝거리며 제일 먼저 나타났을 것입니다. 송경동 역시 김진숙처럼 ‘노동’이 한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송경동은 지방의 공사현장부터 시작해서 서울의 지하철 역사 공사현장까지, 끝없이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시는 그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시인을 꿈꿨다고 해서 그가 시 말고 다른 것은 하나도 꿈꾸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가 쓰는 시의 재료는 변함없이 노동, 노동하는 인간, 노동하는 인간의 고통, 노동하는 인간의 기쁨과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더러 써달라고 부탁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겐 참으로 비통한 시의 재료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 그건 노동자들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는 온통 산재시 아니면 부고시라고 말했습니다. 부고시를 쓴 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하루 종일 꺽꺽 운다고도 미쳐 버린다고도 강물에 뛰어든다고도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한 생명체의 죽음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끝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노동자의 죽음이자 노동자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도 가끔은 자기의 묘비명이나 부고를 생각해봅니다. ‘살아있는 동안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렸다’ 같은 것은 누구라도 상상하기 싫을 것입니다. 송경동은 더는 끔찍하고 억울하고 처참하고 슬픈 부고시는 쓰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절룩거리는 다리로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김진숙이 크레인 위에서 그녀의 노동-싸움을 동지들과 수행하고 있는 동안, 송경동은 크레인 아래에서 그의 노동-싸움을 친구들과 시민들과 함께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레인 위와 아래는 같은 현실을 만들기 위한 노동-싸움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법의 본질을 묻게 만들다

이제 송경동은 법이 지키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묻게 만듭니다. 법의 정신은 무엇인가요? 법이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부당하게 억압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이 정해준 생명이 다할 때까지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고 싶다고 너무나 순진하게 그러나 고집스럽게 그가 나섰을 때 그의 마음 속 생각은 혹시 이런 것 아니었을까요?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죽음을 막고 싶다!

저는 이제 법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송경동의 행위가 실정법의 사소한 규정들과 어긋났을지 몰라도 그 행위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기적인 모습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우리 사회가 정의와 공존이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고민해보기 시작한다면, 위험한 지경에 몰려 더는 삶도 힘도 의지도 꿈도 없던 노동자들이 바로 이 사회에서 살아볼 만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기 비하와 자살 충동이 사라진다면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약한 자의 실존을, 침해받은 권리를, 정의와 평화를 지킨다는 법의 정신과 일치시키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의 행위는 오히려 헌법의 행복추구권에 충실한 것 아닐까요?

저는 송경동이 한진중공업 마당에서 홀로 서있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는 한 손으론 목발을 잡고 한손으론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그가 웃을 때 가슴 속에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미소가 너무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는 그가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어떻게 수많은 사람을 따르게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노동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의 눈을 통해 우리 또한 노동자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송경동, 이제 그 이름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합한 것입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서는 안 된다고, 인간이 한 인간을 보고 울며 웃으며 같이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고 느끼고 행동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유죄라면 인간적으로 살고 싶은 인간 전체가 유죄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법정도 인간 전체를 유죄로 판결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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