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진보하지 말고 전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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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2월 01일 10: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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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경제적 형태를 갖춘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를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한 인간을 다른 이가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하다. 사회 전체, 국가 또는 공존하는 모든 사회를 다 합치더라도 이 지구의 소유자일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지구의 점유자이고, 지구에게서 이익을 얻는 이들이며, 뒤를 이을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상태로 물려줘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책 표지.

누가 한 이야기일까? 누구라도 이 문장을 보면, 20세기 말 이후에 등장한 환경보호론자나 생태위기론자의 말이겠거니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칼 맑스가 『자본』 3권에 남긴 문구다.

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내게 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문장들을 소개해준 것은 『기후 정의』(이매진)라는 신간 서적이다. 이 책은 이안 앵거스라는 캐나다 사회주의자의 편저서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가 우리말로 번역해서 낸 것이다.

‘기후 정의’라… 사실 이미 기후 변화 문제에 관심 있는 소수 독자층을 제외하면 그렇게 매력 있게 다가올 제목은 아니다. MBC 다큐멘터리 <지구의 눈물>의 내용을 좀 더 현학적인 필치로 다룬 책이라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부제는 좀 더 자극적이다.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에 맞선 반자본주의의 대안”.

책 첫 머리를 장식한 위의 맑스의 인용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저자 명단 안에 피델 카스트로나 에보 모랄레스(현 볼리비아 대통령)가 올라가 있는 것도 그렇다. 실제 책 내용도 제목보다는 부제가 던져주는 인상에 더 가깝다. 이 책은, 한 마디로, 기후 변화 문제를 실마리로 한 우리 시대 생태 사회주의의 교과서다. 내가 이 책을 꼭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시대 생태 사회주의의 교과서

이 책은 ‘선집’이다. 무려 45편의 글들을 모아놓았다. 그 중에는 불과 1장짜리 짧은 연설문도 있고, 좀 긴 논문 성격의 글도 있다. 저자들의 출신지도 다양하다. 우리가 번역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북미나 유럽 쪽 필자들이 있는가 하면, 낯선 남반구(남미, 남아공 등) 필자들의 글도 상당수 실려 있다. 영어 제목 “The Global Fight for Climate Justice”의 ‘Global’이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개인 저자가 아닌 단체 명의의 글들이 많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자 저항’이니 ‘사회주의 동맹’이니 하는 낯선 외국 좌파 단체의 이름도 볼 수 있고, ‘비아 캄페시나’(국제 농민운동 단체)나 ‘기후변화 원주민 지구회의’ 같은 국제 조직들도 마주하게 된다.

대개 이런 종류의 선집은 자료집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곤 한다. 다채로워서 좋기는 한데 책 전체를 꿰뚫는 문제의식이나 선명한 결론이 아쉬운 경우가 많다. 더구나 단체 명의의 성명서 비슷한 글들이 다수 실려 있다면, 꽤 지루한 독서가 될 위험도 높다. 그런 성명문이라는 게 대체로 판에 박힌 정치적 입장의 확인이나 상투적 주장의 나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기후 정의』를 처음 마주하며 우려한 것도 이런 위험이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이런 우려는 말끔히 씻겼다. 때로 지루한 글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저마다 특색 있는 글들이 마치 한 저자의 책처럼 체계적으로 배열돼 있었다.

처음에는 기후 변화의 심각성과 원인을 밝히는 글들이 실려 있고, 그 다음에는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 등 자본주의적 해결책의 오류와 한계를 따지는 글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책 뒷부분으로 가면, 한 편 한 편 읽어갈수록 ‘반자본주의적’ 대안의 골격이 점점 더 분명히 눈에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은 기후 변화 문제에 전혀 문외한인 독자라도 전혀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다. 일단 과감히 이 책을 손에 들고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해, 그것이 인간 사회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게 된다. 또한 낯설게만 느껴지던 ‘생태 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이 점점 생생하게 다가오게 된다.

편저자 이안 앵거스는 참으로 요령 있는 편집자인 것 같다. 아마도 생태 사회주의자로서의 그의 오랜 이력도 이런 솜씨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영국 노동당의 캐나다판인 신민주당(NDP)에서 당 내 좌파로 활동했던 불굴의 사회주의자이고, 오랫동안 온라인 저널 <기후와 자본주의(Climate and Capitalism)>를 내면서 기후 정의 운동의 최전선에 서온 인물이다.

그가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저자들을 보면, 이 책의 정치적 지향이 어떠한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한 카스트로, 모랄레스 등 남반구 좌파들이 있는가 하면,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 국제서기국(USFI)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급진좌파정당인 민주사회주의당(DSP)도 있다.

서문을 쓴 데릭 월은 최근 원내 진출에 성공한 영국 녹색당 안에서 생태 사회주의 블록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녹색 정치의 선구자인 독일 녹색당이 정치적 실용주의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녹색 운동의 급진성의 새로운 담지자로 부상하는 흐름들이 주로 망라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여러 가지 특성들로 인해 『기후 정의』는 단순히 기후 변화 문제만을 다루는 전문 서적이 아니라 생태 사회주의 전반의 교양 입문서로 읽힌다. 내가 보기에는 우리말로 나온 책 중에서 생태 사회주의의 최신 흐름들을 살피는 데 가장 좋은 개설서가 아닌가 싶다. 가령, 이 책에 실린 테리 타운센드의 글(‘자본주의의 반생태적 러닝머신’) 한 편만으로도 초심자가 생태 사회주의의 핵심 내용을 접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탄소 자본주의를 넘어 ‘태양 코뮌주의’를 향해

한국 사회에서 기후 문제 대안이라고 하면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다. 국내 환경운동 일각에서도 이를 적극 지지하고 있고, 이명박 정부 안에도 그런 흐름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필자들에게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는 대안이기는커녕 질병의 한 양상일 뿐이다. 이것은 생태 문제에 대한 자본주의적 접근이 생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키기만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패트릭 본드(남아공)의 말을 들어보자.

“다국적 기업들은 실제로 공기와 대기 중 오염을 상품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권리를 원하며, 그 계약을 법적인 용어로 성문화해서 가격을 책정하고 이미 배출한 오염물질에 대한 배출권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유럽 탄소시장 시스템은 그들에게 배출권과 나아가 계속 오염할 권리를 할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돈이 된다. 그들은 그 배출권을 팔 수 있다. 그래서 ‘오염자 부담 원칙’이 아니라 ‘오염자 수익 원칙’이 되는 것이다.” (291쪽)

대기의 이산화탄소량 증대로 인한 기후 변화 가속화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 문명의 산물인데, 자본주의는 다시 이 생태 격변을 자본주의 이윤 추구의 지속과 시장 확대의 소재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후 변화 양상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은 물론 인류가 이것과는 다른 방식의 대안들을 시도하는 것을 봉쇄하는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는 이런 이중의 맥락에서 생태 위기의 주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이 책에 글을 실은 불평꾼들만의 시각이 아니다. 미국 카터 정부와 클린턴 정부에서 일했고 현재는 예일대학교 산림환경학부 학장으로 있는 제임스 구스타브 스페스는 누가 봐도 ‘극좌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연구와 엄청난 고민 끝에 (도달한) 내 결론은 대부분의 환경 황폐화가 현재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체제의 실패의 결과라는 것이다.”(350쪽에서 재인용)

그럼 해법은 무엇인가? 『기후 정의』의 논자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해가 뜨는 곳이다. 이들은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에너지의 1만7000배에 해당하는 태양 에너지가 매일 지구에 도달”(187쪽)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태양 에너지의 기술적 잠재력이 “현재의 지구 전체 에너지 소비의 7~10배”(399쪽)에 달한다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 태양 에너지 체제로 전환한다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획기적이고 즉각적인 감축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다소 긴 분량의 글(‘기후 위기 – 21세기 사회주의는 생태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에서 다니엘 타누로(벨기에)는 이러한 지향에 ‘태양 코뮌주의(solar communism)’라는 이름을 붙인다. 좀 난데없는 조어(造語)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태양’과 ‘코뮌주의(공산주의)’만큼 서로 잘 어울리는 말들도 달리 없다. ‘태양’이라는, 지구 위 만물의 원천 앞에서 우리는 ‘코뮌’(공동체)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기 때문이다.

‘태양 코뮌주의’는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다. 『기후 정의』도 지적하는 것처럼, 덴마크 등은 이미 20% 이상의 에너지를 태양광과 풍력으로 충당하고 있다(363쪽). 문제는 기술적 실현 가능성에 있지 않다. 전환의 비용이 진짜 쟁점이다. 현 체제가 기피하는 것은 바로 이 비용의 지불이다.

이 책이 지목하는 부담 주체는 이제껏 탄소 자본주의를 통해 생태 위기를 누적시키면서 기득권을 누려온 집단들이다. 일국적인 수준에서도 그렇고(자본 소유 계급), 전 지구적인 수준에서도 그렇다(북반구). 그래서 지구적 차원의 대안으로 주창하는 것이 ‘생태 부채’ 개념이다.

이미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지구정상회의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해외 부채가 아닌 생태 부채를 지불”(22쪽)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북반구 국가들이 자원 수탈, 환경 파괴, 온실 가스 등 폐기물 투기로 남반구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으며, 그것이 금전적으로 보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콰도르의 한 기관은 이 액수를 연간 최소 1조6000억 달러로 추산했다. 이것은 최빈국 부채 총액의 세 배에 달하는 수치다(185쪽).

『기후 정의』의 저자들은, 이렇게, 태양 사회로의 전환과 부의 거대한 재분배(더 정확히 말하면, 사회 세력 관계의 역전)를 하나의 과제로 통합하여 바라본다. 인간과 자연 사이 관계의 변화는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변화의 전제이며, 역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변화 역시 인간과 자연 사이 관계의 변화의 전제다. 이것이 곧 생태 사회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며 동료 인간들에게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다.

사회주의 역시 바뀌어야 한다

한데 여기에서 오해하면 안 될 것이 있다. 단순히 기존의 ‘사회주의’에 ‘생태주의’를 덧붙이면 ‘생태 사회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와 생태주의가 서로 융합하려면 둘 모두 크게 변화해야 한다. 생태 사회주의는 곧 ‘사회(주의)화된’ 생태주의이며 ‘생태(주의)화된’ 사회주의다.

사회주의의 입장에서는 무엇이 크게 바뀌어야 하는가? 자본주의 생산력에 대한 역사유물론의 근본 관점이 변화해야 한다. 자본주의 생산력을 새로운 사회의 계승 대상으로 바라보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연장선 위에서 사고했던 전통을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이 책의 여러 글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핵심 주제다. 자본주의 생산력 발전은 어떤 측면에서 새로운 사회의 저력이 되기보다는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이런 방식의 생산력 발전의 단순한 계승자일 수만은 없다. 때로는 그것을 막고 중단시키며 되돌려야만 한다.

앙드레 고르가 그의 대표작 『프롤레타리아 안녕』(이현웅 역, 생각의나무, 2011)에서 제기한 바 있는 이 문제를 다니엘 타누로는 이렇게 제시한다. 혁명이 지연되면서 “비자본주의적 사회의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하기 시작했다”(433쪽)고. 그에 따르면, 기후 위기는 이러한 부패의 가장 생생하고 포괄적인 예증이다.

대전환이 계속 지연된다면, 어쩌면 진보의 가능성은 고사하고 인류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지 모른다. 이안 앵거스는 맑스,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 수수께끼처럼 끼워 넣은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이라는 문구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의 암시라고 해석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제시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는 선택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선택지에서 사회주의는 야만, 즉 문명의 붕괴를 막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착잡한 전망을 가장 선명하게 제시한 인물은 발터 벤야민(20세기 초의 ‘야만’, 즉 나치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좌파 사상가)이다. 그는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마르크스는 혁명이 세계 역사의 기관차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상황은 아주 다른 것 같다. 필시 혁명은 기차 타기가 아니라 비상 브레이크를 잡는 인류가 아닐까.”(354쪽에서 재인용)

이런 맥락에서 이제 좌파에게 더 어울리는 표어는 ‘진보’가 아니라 ‘전환’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고 돌아 서는 것이다. 이렇게 ‘멈춰 서고 돌아 서는 것’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과거의 사회주의와 너무도 다른 얼굴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가령 태양 에너지 체제는 필연적으로 분권화된 경제, 사회 체제를 요구한다. 이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태양 사회로의 전환을 선뜻 내켜 하지 않는 근본 이유다. 권력 집중과 자본 독점 없는 자본주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집중 및 독점과 호응하는 태양 에너지 체제도 생각하기 힘들다.

이러한 사정은 기존의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모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바뀐’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태양 에너지와 조응할 수 없다. 그것은 ‘다원화되고 분권화된’ 사회주의여야만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단순히 이어받거나 그것과 경쟁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문명적 차원에서 그것과 단절하는 사회주의다.

『기후 정의』에서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 반성의 토로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쿠바에서 들려온 목소리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겠다.

“사회주의 진영의 국가들에서 시행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 모델을 복제했는데, 사회주의를 생산력 발전의 양적 결과로 인식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순전히 양적인 경쟁을 벌였고, 자본주의 발전 모델이 전체 인류를 인식 못하는 소비사회의 구조물이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 발전을 달성하려 했다. 이 행성은 존속할 수 없을지 모른다.

모든 가정이 승용차를 한 대씩 가진 모델, 북미식 목가적 모델, 할리우드 등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절대 불가능하며, 미국 2억 5000만 주민의 실상일 수도 없고, 세계 다른 곳에 있는 엄청난 배후의 빈곤층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도 없다. 환경과 양립 가능하고 더 집합적으로 기능하는 다른 발전 모델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 (쿠바 의회의 경제사업위원회 의장 오스왈도 마르티네즈의 대담, 353쪽에서 재인용)

70억 인류 모두가 미국 중산층처럼 살 수는 없다. 더구나 그 미국 중산층도 지금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모두가 함께 꿈꾸고 실현해야 할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도 좋고 지구에게도 좋은, 그래서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좋을 그런 삶은?

『기후 정의』가 기후 문제를 기회 삼아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이 물음을 접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평소 기후 문제에 대한 관심과는 별개로, 필독의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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