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에 전태일 기념관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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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30일 03: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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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유럽지부

    83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짙어질 무렵 나는 그동안 루르 지역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들에게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유럽지부’를 만들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지금 되겠나?"라면서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당시 아빠는 지금 살아 있는 노동자로서 전태일 동지의 뜻을 받아서 노동자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뜨거운 욕구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너무 힘들었다. 우선 준비위부터 만들자는 생각으로 뛰고 또 뛰었다.

    누가 대표를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데 모두가 나보고 하라고 했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한 것도 너고, 지금까지 열심히 뛴 사람도 너고, 어차피 앞으로도 네가 제일 많이 뛸 것 아니냐. 네가 하는 게 맞다."며 내가 맡아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아빠 생각은 달랐다. 나는 어차피 뛸 것이니 새로운 사람을 대표해서 함께 열심히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현직 한인 광부 중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한마음조합에 가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에발트 광산 광부를 설득해 보기로 하고 너를 데리고 자주 찾아가 설득했지만 그는 번번히 거절했다.

    나는 그때마다 전태일동지 수기, 청계피복노조운동 사례 등등을 들이밀면서 "형이 해야 합니다. 형이 해야 합니다." 하면서 지치지 않고 쳐들어갔다. 돌아올 때는 보쿰대학 근처에서 식품점 하는 민지네 가게에 들러서 민지 아빠랑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토록 찾아다녔던 에발트 광산의 광부 천이형이 내게 전화를 해왔다. 만나자고 말이다.

    "나는 정말 일자무식이네, 그저 먹고살 궁리만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자네가 그렇게 찾아와 책도 주고, 자료도 주어서 읽어보니 이제 이해가 되네. 내가 뭘 잘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고 외치면서 죽어간 전태일동지 기념관 건립운동에 파독 광부도 참여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거라 생각되어 자네의 제안을 받아서 하는데 정말 자네가 함께 열심히 해줘야 하네."

    아빠는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나 좋아서 말이다. 이렇게 해서 광주학살 후 암울했던 80년대 전유럽운동에 활력소가 될 것 같은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유럽지부(이하 유럽지부)가 첫 발을 내디뎠다. 83년 11월 일명 독일의 ‘아오지 탄광’이라 불렸던 에발트 광산 근처에서 아주 소수가 모여 첫 출발을 하였단다.

    출발과 함께 유럽지부는 건립운동을 알리기 위해서 전태일 알기운동과 그리고 연대를 호소하는 구호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와 "‘대학생 친구 하나’ 되어주세요."였다. 그때 아빠는 기껏해야 교회를 중심으로 루르 지역을 뛰던 때라 참 힘들었단다.

    그러나 건립운동을 하면서부터는 교회 밖으로 나가서 전 독일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민지아 빠가 어느날 "다음 달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세미나가 있는데 참석하겠냐’며 초대장을 주었다. 유럽지부를 알리기 위해서 뛰기로 하고 대표와 나는 사무장이라는 칭호를 만들어서 달려갔다.

    그 세미나는 한국학술원이라는 연구단체가 주관했는데 강사는 독일과 미국의 유명한 교수들이더라. 한국학술원이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 것도 윤이상 선생님이 80년 5월 광주학살로 움츠러든 분위기를 다시 세우고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그 세미나에서 아빠는 엄청 많은 유명 인사와 활동가들을 만났단다.

    그 중에서 기억되는 게 비록 월간이지만 민주화 운동권 소식을 전하는 신문 <우리나라>를 발행하는 오 사장님, 그리고 유명하신 윤이상 선생님, 동백림 사건으로 사형 선고까지 받으셨던 정규명 선생님, 학술원 사업을 진행하는 김길순 박사 등등 알게 되었다.

    헌데 <우리나라> 사장님이 유럽지부에 무척 많은 관심이 보여주셨다. 그 신문에 유럽지부가 만들어졌다는 기사와 광고도 무료로 연재해 주셨다. 그래서 그런지 각종 모임이나 행사에 유럽지부 대표가 참석하면 우렁찬 박수가 몇 번씩 쏟아졌단다.

    전태일기념관 건립 유럽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우리는 노동절 행사를 시작했다. 매년 5월 1일에 메이데이행사에 참석을 했다. 그때 한국은 3월 10일인가,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노총 창립기념일을 ‘근로자의 날’로 정했다. 

       
      ▲한국에서 온 활동가들이 경찰노조선전대 앞에서 신기한 듯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노조 운동 진영과 독일 등 전 세계가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했기 때문에 독일 노동자들과 만나는 등 국제연대를 위해서도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기로 한 것이다.

    독일의 메이데이 행사는 한국과는 너무 달라서 이상하기까지 했다. 메이데이 행진을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았으며, 행진을 막을 것 같았던 경찰도 노조깃발을 들고 함께 시위 대열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나라는 순사도 노조 만드네. 참!" 하면서 조합원 형님이 말해 우리는 함께 웃었다.

    84년이 되면서 참 희망적인 국내 소식이 쏟아졌다. 83년 9월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창립돼서 활동하고, 84년 3월에는, 지금도 한국에 가면 너와 함께 찾아가는 영등포역 뒤에 근거지를 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창립돼 활동한다는 소식, 그동안 청계모임으로 활동하던 동지들이 청계피복노조 복구준비위원회 결성했다는 소식들에 우린 힘을 얻었다.

    특히 민청련의 ‘민주화의 길’이라는 창간호 표지에 그려진 두꺼비가 우리를 엄청 긴장하게 했다. 그때 그 창간호를 우리에게 소개해줬던 유학생 친구는 이렇게 설명했단다.

    "저 창간호 두꺼비의 이야기는 ‘두꺼비는 독이 있다. 독재라는 구렁이에게 잡혀서 먹히지만 두꺼비 독에 구렁이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쉽게 설명하면 ‘민주화 투쟁하는 우리를 감옥에 넣고, 죽이고 하지만 우린 너를 죽게 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아빠는 그때 ‘아! 죽어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단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에 축하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도 회원 가입을 하고 싶다고 하자 회원 가입 승인을 알리는 편지가 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내가 맨 끈이 아름답게 남아서 너무 좋다. 물론 그동안 한마음 조합원들과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고, 지원하는 일에 참여해서 인연이 닿은 79년 크스챤아카데미 측에서 연락을 해서 받아주었던 거 같다.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유럽지부가 활동을 시작했지만 겨우 대표와 나 둘이서 뛰는 일이었다. 어느날 민지네 가게에 들렸다가 ‘뤼디거’라는 한독연대(Korea-Komitte) 회원을 만났는데 그는 유럽지부가 만들어진 것을 알고는 너무 좋아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겠다면서 내게 향후 사업 구상을 물었다. 내가 11월에 전태일동지 14주기 추모회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가 도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신학 공부하는 보쿰 대학 학생인데 독일 기독교 기관의 다양한 기구에 아는 사람들이 있고, 정보도 있어서 도울 수 있을거 같다고 했다.

    실은 유럽지부가 창립됐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84년도 추모회를 할거라고 했는데 막막한 상황이었단다. 대표는 자기가 몇 달치 봉급을 내어서라도 하겠다고 하면서 추진했지만 큰 행사를 직접 열어 본 경험이 전무한 우리에게는 너무나 반가운 친구를 만나게 된 셈이어서 희망이 타올랐다.

    며칠 후 연락이 와서 대표와 함께 뤼디거 학생을 만났다.
    “추모회를 언제쯤 할거냐?”
    “11월 13일이 전태일 동지가 산화한 날이니 그날에 가장 가까운 주말에 하면 한다.”
    “사람들은 얼마나 모일 건가?”
    “50~60명 정도가 참석할 것 같다.”

    그는 한참 동안 여기저기 연락을 했다. “부퍼탈에 있는 기독교 교육센터에 자리가 있다. 예약하자.” 마침내 그 학생 덕분에 장소가 확보됐다. 그는 “참가자 지원프로젝트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우린 1984년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부퍼탈(Wuppertal)에 있는 기독교 교육센터(Oekumenische Werkstatt)에서 전태일 동지 14주기 추모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널리 알렸다. 

    전태일 동지를 추모하며

    전태일은 과연 누구인가? 그는 비극과 고난의 땅에서 사는 한국 민중의 아들이며, 피 끓는 노동대중의 넋이다. 1970년 11월 13일 그가 사랑했던 2만여 명의 형제 근로자들이 짐승처럼 살아가던 청계천 어느 가두에서 그는 장렬하게 산화하였다.

    이제 전태일 동지의 14주기를 맞이하여 비록 조국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나, 일찍이 제3세계 수탈의 진원지인 제1세계의 저임금 근로자로 살아온 재독 한인노동자 일동은, 아직도 저 광주의 피의 울음과 상처가 멈추지 않고 민주주의와 민중운동의 조종이 울리고 있는, 우리의 어둡고 숨막히는 조국에서 이제 다시 점화되기 시작한 참된 노동운동의 새로운 불길과 민주 민중운동의 노력과 투쟁에 뜨거운 경의와 깊은 연대의 뜻을 표하면서, 아울러서 조국과 공간을 달리하고 있을지라도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공동의 표상 – 전태일 – 이땅의 민중의 아들과 노동대중의 살아있는 넋을 추모하면서, 그가 마저 걸어간 노동의 새날, 민주와 통일의 새날을 향하여 배전의 새로운 각오와 결의로 힘차게 행군하고자 한다.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유럽지부-

    이제 어떻게 추모회를 할 것인가, 고민하는데 유럽지부 활동과 추모회 소식을 접한 사람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시를 써 보내는 사람, 자기가 할 일 무언지 문의하는 사람 등등 말이다. 다음은 당시 어느 유학생은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나서 보내온 시다.  

       
      ▲유학생이 보내 온 자필 시.

    ‘어느 부활’

    추운 겨울의 메마른 공기가
    견딜 수 없어
    네 몸을 살랐느냐
    천막하나 머리위에 치지 못해
    차라리 영원의 집을 택했느냐
    네 몸이 불타던 날
    우리 얼었던 마음은
    네 일기를 씹으면서
    네 천년의 한을 그리어
    마음 속 깊이
    네 정신을 마신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하늘조차 그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엷은 잿빛 구름에
    긴장을 담아
    푸르름 외면하던 그날
    1970년의 초겨울
    한낮
    네 이름없던 영혼은
    평화시장의 이름으로
    노동자의 이름으로
    인간의 이름으로
    공중에 치솟았다.

    육신에 가해진
    삼분의 고통은
    이십 이년의 삶을
    그 처절한 삶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시장 한 어귀 앞
    스스로 세운 십자가 위에
    ‘인간해방’의 푯말 새겨
    이제 나를 따르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절규하면서 신음하면서
    입안에 들어오는
    뜨거운 화기
    단전에 힘모아
    되 뿜으며 불 뿜으며
    승천하는 용처럼
    솟아오를 때.

    돌아오리.
    꼭 돌아오리.
    불쌍한 내 형제 곁
    내 마음의 고향으로
    사랑과 징벌을 하나씩 차고
    먼저 간 형제들 모아
    돌아오리.
    꼭 돌아오리.

    -전태일 평전 을 읽고 –

    민중신학과 민중교회

    교회는 광주 학살의 상처를 안고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에 대한 토론과 주말 세미나를 ‘수양회’라는 이름으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고난 속에 국내현장 활동가들을 위해 이뤄졌던 비정기적 기도회를 매월 1회 구속자들을 위한 토요기도회가 시작됐다. 토요기도회는 재독 노드라인 베스트팔렌 한인교회연합회 산하 모임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한국 민주화, 인권운동과 연대를 시작했다.

    장성환 담임 목사님은 매주 설교 시간에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문제를 이야기하셨고, 한마음조합에 모임에도 참석하셨단다. 물론 한국에서 오는 자료는 항상 아빠에게 전해주시면서 열심히 하라는 격려도 해주어서 무척 힘이 되었다.

    교회 운영도, 제직도 전 교인들의 집적 선거로 선출했고, 평신도회지로 ‘청년한국’을 발간했고, 매월 1회 주일 설교는 평신도의 신앙간증으로 했단다.

    장성환 목사님의 활동과 인연으로 교회를 방문했던 분들은 지금 생각하니 유명한 분들이었던 거 같다. 김재준 박사, 한완상 박사, 안병무 박사, 문동환 목사 등 같은 분들이 방문해서 강연회와 세미나로 밤새는 일일이 많았던 거 같다.

    교회의 모임이나 예배에서도 ‘금관 예수,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같은 노래가 불러졌으며, 인권문제가 터지면 목사님이 앞장서서 집회나 데모를 했단다.

       
      ▲전태일동지 14주기 추모회 안내서.

    그런데 유럽지부를 준비하면서 추모회 준비위원으로 함께 해주시길 요청 했는데 교회일이 바쁘니 좀 더 후에 그런 일에 참여 하시겠다면서 선을 긋는 거였다.

    보쿰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크푸프트 한인교회에서 목회하시던 이해동 목사님은 준비위원으로 함께 하시는데 말이다. 독일에서 가장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는 루르 지역에 7개 지역 교회를 담임하시기에 이해는 되지만 말이다.

    14주기 추모회 행사 준비

    추모회 행사 장소와 일정이 잡혀지자 홍보하기 위해 뛰면서 유학생들과 협의를 통해서 언론에 기사를
    썼는데 그 중에 유럽지부의 이야기를 말하겠다.

    독일땅에서의 한국노동자운동
    -전태일동지의 뜻을 이어가는 맥락에서 –

    83년 11월 어느날 초라한 모습의 광부, 공장노동자 몇이 모여 전태일기념관 건립추친위원회 유럽지부를 결성하고, 대표 김대천(광부)씨를 추대함으로써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독일 광산촌에서 전태일 동지의 뜻을 이으려는 공식적인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유럽지부는 우선 전태일 동지의 뜻을 알리는 것을 사업으로 정하여 <전태일 평전> 보급, 투쟁가, 추모가가 담긴 카셋트 제작 보급, 이소선 어머니의 육성이 담긴 카세트를 제작 보급, 전태일 동지의 생애와 어머니의 투쟁이 담긴 영화 ‘어머니’를 상영하여 비디오 카세트로 제작 보급하는 등 홍보활동을 추진하면서 동일방직, 원풍모방, 청계피복, 노동자복지협의회 등 국내노동자들의 투쟁상황을 청년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섬유노조 지방단위 조직을 비롯하여 노동 문제에 관심 있는 독일 목사, 사민당계 노조원, 뜻있는 양심단체 등에 알리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노동자들의 대변지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과 이와 더불어 <민주화의 길>, <민중문화>도 배포 중에 있다. 또한 오는 11월 30일부터 2박3일 동안 “제14주기 전태일 동지 산화추모회”를 부퍼탈(Wuppertal)에서 갖는다.

    “전태일동지가 한국노동운동에 끼친 영향”과 “전태일동지와 청계피복노조” 및 “한국노동운동을 위한 해외 한국노동자의 과제”라는 제목으로 주제발표 및 토론이 있고, “어머니” 영화도 상영하며 추모 제사와 농악을 중심으로 마당으로 민중의 한풀이가 준비되고 있다. <우리나라> 신문 구독과 제위께도 이 추모회에 참여하여 전태일동지의 뜻을 함께 기려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몸 팔러 서울에 와 온갖 잡일을 다해 보다가 다시 77년 9월 서독 광부로 팔려온, 마흔이 넘은 검은 얼굴의 김대천씨는 추모회준비로 바쁜 속에 이런 말을 한다. “전태일 하나님은 무척이나 끈질긴 분이고, 사람을 완전히 거듭나게 하는 생명력이 있다. 왜냐하면 마누라의 바가지와 주위친구들의 회유, 비웃음이 심할 때는 나도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 헌데 그때마다 불덩어리가 된 전태일 동지가 막 내게로 달려오며 어려운 일이 아니면 누구나 할수 있다. 커다란 사랑으로 민중의 힘을 엮어 죽음을 초월한 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하여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할 때는 정신이 바짝 든다.”

    그는 이제 인간으로서 아니 노동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전태일 동지의 뜻을 실현하는 일에 남은 여생을 다 바쳐 살겠다고 다짐한다. 

    왜 우리 노동자들은 서양의 개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외세(미국, 일본, 독일)와 반민중세력은 그 개까지도 호사하는데 가장 극악한 노동조건 아래서 가장 긴 시간을 일해야 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려야 하는 이 엄청난 구조적 모순을 보고 어떻게 참으란 말인가?

    "전태일기념관은 청계피복노조가 복구되어 움직이고, 한국 민주노동이 활성화되며 민중의 주체적 힘으로 민족통일을 이룩하고 진정한 자주적 민족사회가 건설되어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때에 전태일 동지의 위대한 투쟁, 한국민중의 위대한 투쟁의 얼을 새겨서 건립하고 싶다."는 것이 우리들의 주장이다.

    끝으로 우리는 전태일 동지가 근로기준법 책을 보며 한자 투성이어서 이해 못하며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하나라도 있다면”하고 안타까와 했던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싶다. 독일에도 많은 한국 유학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사회든지 노동하는 사람과 전문적 학문을 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각 계급간의 지배- 피지배를 생각하는 분열이 아니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보고자 노력하는 공동체적 생각으로 결합된다면 인류사는 한걸음 더 진보적 발전을 해 갈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공부하는 동지들께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학문은 민중적 요구에 의해 연구되고 그 결과가 씌여져야 한다는 사실은 깊이 인식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노동자들과 만남에서 그동안 배운이론의 실천의 장을 마련하고 우리의 투쟁에 승리가 가까이 오게 노력했으면 한다. 노동자 스스로의 피끓는 투쟁은 한국사회 내의 뿌리깊은 모순을 제거시키고 새롭고 올바른 민중사회의 서광을 비출 것이다.
    전태일동지 만세! 한국 민주노동 동지 만세!
      -전태일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유럽지부 공동작성 –

    오늘 아빠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보관해온 <우리나라> 신문 기사를 인용해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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