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이 아니라 정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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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30일 12: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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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따시대

요즘, 정말이지 인터넷이나 신문을 보는 게 겁이 날 지경이었다. 인터넷을 열면, 신문을 펼치면, 끝없이 쏟아지던 학교 폭력(왕따)과 자살 소식들. 전깃줄에 목이 감긴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어야 했다는 학교폭력 피해 남중생의 유서, 피해 남중생이 자살한 다음에도 가해자들끼리 죄책감은커녕 킥킥거리며 문자 메시지로 조롱을 주고받았다는 소식, 학교폭력 피해 여고생의 자살직전 엘리베이터에서의 안절부절못하던 영상, 그리고 그 피해 여고생을 돕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같은 반 학급반장의 연이은 자살까지… 그 어떤 지옥도보다 끔찍한 장면들이 우리 학생들의 교실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물론, 이제는 다들 귀가 따갑게 들어 알고 있겠지만,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부동의 자살률 1위 국가이다. OECD 기준으로 표준화한 우리나라의 자살률(2009년 기준)은 31명(10만 명당)으로 회원국 평균수치인 11.2명의 약 3배에 달하는 기록을 자랑(?)하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10대, 20대, 30대 연령의 사망률 1위는 모조리 자살이기도 하다. 이 같은 객관적 지표가, 저 교실 속 지옥도의 사실성을 뒷받침한다.

어떤 이들은 왕따와 자살은 예전에도 있었고, 최근의 왕따에 대한 주목은 괜한 호들갑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자살로 인한 우리나라 인구의 사망이 1992년 전체 사망원인 중 10위였다가 1998년의 7위를 거쳐 2009년 4위로 상승했으며(참고로 2009년의 자살자 수는 15,413명이며, 이는 같은 해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인 7,147명의 약 2.2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10대의 자살률이 2007년 이후부터 2위에서 1위로 올라섰다는 점만 봐도 최근의 이슈가 ‘괜한’ 것은 아닌 걸 알 수 있다.(아주대 의대 이상문 교수, ‘한국사회의 자살 현황 및 대책 방향’, 2009)

2. 폭력사회, 그리고 마이너스 1의 평화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 사회의 총체적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리고 있는 지옥도는,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의 데칼코마니다. 해서, 박노자 선생의 말처럼 “남한 같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죽음들을 멈추는 것은, 고문실에서 고문 피해자의 갈비뼈가 부러지지 않게 하는 일 만큼이나 힘든 일”(박노자, ‘아이들을 죽이는 사회’, <레디앙>, 2011.12.30)인 것이다.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을 노골적으로 강요하는 사회에서 그 구성원의 인성은 필연적으로 훼손당한다. 능력이나 스펙이 없으면, 아니 가진 게 없으면 불이 타오르는 망루로, 저 높은 크레인 위로 내몰려야 한다고, 그러다 안 되면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사회. 구성원 각자의 적성이나 흥미 혹은 물적, 지적, 신체적 출발선 따위 하나도 중요치 않고 오로지 수능이든 토익이든 시험성적 결과로만 한 사람의 가치를 매기겠다는 어른들.

그 사회와 어른들이 싫어 TV를 켜면 또 실력이나 인기나 외모가 부족하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시각적으로 죽음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일러주는 오락 프로그램들.

이 아수라 속에서 개별인간은 무한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공포는 다시 잔혹한 공격성으로 표출된다. 끝줄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광포한 발로. 하여 그 공격성은 최대한 만만한 자에게 요란스레 집중된다. 진중권이 그랬던가. 왕따는 ‘마이너스 1의 평화를 위한 희생제’라고.

3. 다시, 故 송지선 사건

최근의 학교폭력과 자살사건들을 접하며 나는 엉뚱하게도 작년 5월 투신한 故 송지선 씨가 자꾸만 떠오른다. 그녀의 죽음 역시, 그녀와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수천수만에 이르는 네티즌들의 집단폭력에 가까운 악성댓글들이 한 원인이었다.

그녀에게 쏟아지던 인신공격성 댓글폭력들은 평범한 수준의 정신적 맷집을 지닌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에 대한 인신공격에는 인기그룹 R.ef 출신의 가수 성대현을 포함한 몇몇 방송인들과 위에 소개한 국내 대표논객 진 씨도 참여했다.)

잔혹한 폭력과 따돌림이 일상화된 사회. 그리고 이 같은 폭력에 노출된,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죽이지 못해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 모르긴 몰라도 생전의 송지선 씨가 느꼈을 고통 역시 “전깃줄에 목이 감긴 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고통에 비해 덜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음, 그녀와 동년배의 어떤 여성 글쟁이는 모 매체에 그녀와 자신을 ‘우리’라는 주어로 등치시키며 그녀의 나약함과 모자란 자존감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안는 내용의 에세이를 썼다.

읽는 이로 하여금 그저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아프고 또 아픈 글. 당시 그 글을 읽으며 몇 방울 눈물을 훔쳤던 것 같다. 이런 글을 쓰는 필자가 세상 속에 있어 참으로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가슴을 두드리고, 머리를 주억거리며 한참을 속으로 속삭였던 것 같다.

4. ‘진짜로’ 감싸 줄 수 있나?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조금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 필자가 자신의 글에 쓴 것처럼 실제로도 자살 직전의 송지선을 감싸 안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이것은 그 필자를 비판하려는 게 절대로 아니다. (나는 그녀를 지면 밖에서 만난 적이 없고 알지도 못한다) 다만 내가, 그리고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구타와 할큄을 당한 이들의 푸념과 울분을 생각보다 쉽게 들어주지는 못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학급의 왕따든 세상의 왕따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삶의 끝까지 내몰린 사람들이 두서없이 막무가내로 쏟아내는 넋두리와 한탄과 변명을, 가끔씩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나오는 망상적 투사(projection)와 자기애적 분노를, 그렇게 자기연민에 허덕이는 오글거리고 유치하고 비이성적인 말들을 당신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가.

신체적 폭력이든 성폭력이든 언어폭력이든, 폭력 피해자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공통적으로 ‘수치심’이라고 한다(송동호 연세대 교수 ‧ 정신과 의사, ‘왕따 피해학생은 왜 부모에게 말하지 않나’, <동아일보>, 2012.1.18). 수치심 때문에 폭력 피해자는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다른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 스스로는 또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우회로를 통해 고통을 호소한다. 장난처럼 죽고 싶다는 말을 흘리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故 송지선 씨의 경우는 미니홈피와 트위터를 이용했다.) 한편 개중에는 직접적인 SOS를 요청하는 이들도 있다. 지인에게 밤늦게 전화해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미치겠는지 미치지 않는지 일방적으로 배설하는 형태이다.

물론 이 조악한 시도들은 대부분 좌절된다. 이 시도가 좌절되면, ‘왕따도 당할 만하니까 당하는 거겠지’, ‘나이 먹고 아직도 그렇게 징징대냐’ 등의 말이 돌아오면, 폭력 피해자는 ‘2차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단 사실을 깨달을 때, 마음이 아주 강한 소수의 사람들은 제 발로 좌절과 우울을 딛고 일어서지만, 대부분의 유약한 이들은 우울증에 빠지거나 자살 등의 극단적 선택을 한다.

당연히 그들의 너저분하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들을 하염없이 들어준단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기를 죽일 정도의 분노를 내포한 사연들이 어디 점잖게 터져 나오겠는가. 평소 이성적 사고로 무장된 사람들에겐 더욱 더 들어주기 어려운 소리들일 게 뻔하다. 쿨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 할 일인 시대 아닌가.

5. 쿨하지 못해도, 우리 함께!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쿨하지 못한 괴로움에의 호소를 우리가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다. 물론 마냥 그들의 죽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큰 충격과 좌절에, 누군가에게 한없이 의존하고 싶은 이들의 퇴행적 욕구를 고착시킬 우려도 있다.

그럼에도 이미 헤지고 찢겨져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그들의 자아(ego)를 모진 말로 확인사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당연히 고문실에 맞먹을 이 미친 사회의 폭력적 구조를 부수는 게 근본적 처방이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뤄지기 전까지 갈비뼈가 부러진 사람들에게 응급처방이나마 붕대를 감아주는 것 역시 진보를 바라는 이들의 생활 속 실천과제 아닐까.

상대가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졌을 때는 평소의 냉철한 이성의 메스를 잠시만 넣어두고 그저 들어주는 것. 그러고 나서 정신과를 소개해주든(물론 여기 들어오는 이들은, 그리고 그들의 친구들은 정신과나 각종 상담센터의 시간당 10여만 원에 달하는 상담비를 감당하지 못할 거다), 친구가 조금 정신을 차렸다 싶을 때 냉정하게 사태에 대해 진단해주든, 일단은 잠시, 그저 들어주는 것. 그것이 이 미친 사회에 자의든 타의든 구성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할 일이다.

철학자 강영안의 책 『레비나스의 철학』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닫는다.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에서 오는 힘은 그가 상처받을 수 있고, 저항할 수 없다는 데에 근거한다. 타자의 고통은 도덕적 호소로서, 명령으로서 내게 다가온다. 타자의 얼굴은 동정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가 당하는 고통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 내가 이 책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를 사랑하고 환대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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