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그딴 게 있기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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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2월 02일 10: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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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너가 주강이구나!”

작년 7월 지율 스님과 내성천에 갔을 때, 쌍용자동차 이창근 실장님 글을 통해 이야기로만 듣던 주강이를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비오는 내성천, 고운 모래와 아침 비가 만나던 그 세계 안에서 주강이는 아빠 무등을 타고 있었다. 여섯 살 아이는 작은 손에 우산을 꼬옥 쥐고 비로부터 아버지를 감싸며, 아버지의 다리로 걷고 있었다.

   
  ▲주강이 무등을 태운 아빠.(사진=강혜민)

이창근 실장님의 인터뷰를 읽으며 그의 얼굴과 특유의 말투와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고, 이내 곧 그의 아들 주강이가 떠올랐다. 주강이의 아버지. 주강이를 무등 태우고 걷던 번듯한 뒷모습이 강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내성천에서 반가운 이를 한 분 더 만났다. 나는 그를 다소 어색하게 ‘신동지님’이라고 불렀다. 2009년 쌍용차 77일간의 파업을 다룬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 주연배우이기도 한 그와는 내성천 여행 2주 전에 김포 용화사에서 2박3일간 함께 템플스테이를 했었다.

사실 2박3일 동안 그렇게 살갑게 지낸 것도 아니건만, 2주 만에 다시 만나니 어쩜 그리 반갑던지. 지난 2박3일의 시간은 그렇게 2주 만에 꽃을 피운 듯했다. 아침에 차가운 내성천 강물을 따라 걸으며 잠시 안부를 나눴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물었던가.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잘 지내셨어요?” 혹은 “어떻게 지내셨어요?"라고 물었으리라. 평범한 나의 안부인사에 그는 자신의 안부를 전해왔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안부는 갑작스러웠다. 심장은 바닥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그가 전해준 이야기에 조금은 잊고 지냈던 지난 2박3일 템플스테이의 기운이 미세하게 살아났다. 그의 ‘안부’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안부와 정말 많이 달랐다.

안부를 물을 수 없는 이들

그는 이 곳 내성천에 오기 전 날, 그와 같이 해고된 쌍용차 동지를 만났다고 한다. 그 동지는 그 전에 손목을 그어 자살 시도를 했었고, 그가 도착했을 땐 이미 술에 ‘쩔어’ 있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숨죽여 들으며, 내 심장은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덧붙여 그와 함께 해고되었던 쌍용차 동지들 중에 자살 시도한 이들이 주변에 참 많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간간히 내쉬던 숨이 턱 막혔다.

그 와중에 나는 머릿속을 재빠르게 굴리며 어떤 말들을 건네야 할지 가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의 말이라는 게 어쩌면 이리 거추장스럽고 가식적일 수가 있나. 내가 아는 언어들 모두 샅샅이 뒤져봐도 적절한 말이 없었다. 숨은 깊어지고 마음속에서는 울음이 터졌다. 당신의 그 ‘안부’를 들으니 내 마음도 무너질 듯 아프다고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끝끝내 난 내 마음과 가장 닮은 언어를 찾지 못했다.

그의 삶 주변에는 너무 흔하게 절망이 입을 벌린 채 이리저리 널려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다행스러운 게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정혜신 박사님과의 상담치료에 대해 여쭤보았다. 어떠했는지, 8주 치료 후 조금은 나아진 게 있지는 않은지.

그는 아주 조금은 나아졌으나 사회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고 하였다. 가끔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말도 하였다. 그때서야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셨다니 다행이네요”라고 정말 진심으로 간신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조금 더 ‘희망적인’ 답변을 그에게 원했던 것 같다. 가령 예를 들자면 “네, 많이 좋아졌죠”와 같은. 그러나 그러한 답을 기대했던 나는 얼마나 조악한가. 나는 그가 ‘괜찮아졌다’라고 증언함으로써 이 시대의 아픔이 ‘그래, 이렇게 치유되고 있어!’ 증명 받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2011년 8월 기준으로) 열다섯명의 죽음으로 이 현실이 전혀 ‘괜찮지 않음’을 넘치게 증명했는데도, 난 아직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순진한 희망은 현실의 절박함을 은폐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그의 마음에, 그의 현실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현실의 절박함을 은폐하는 순진한 희망

이 이야기는 여름이 최고조로 달아올랐던 작년 7월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스스로 소화되지 않아 미루고 미뤄두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만나 기회가 생길 때마다 급한 마음에 이때의 이야기를 종종 하고는 했지만, 말하고 나면 개운하다기보다 늘 갑갑하고 무거웠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말보다 슬픔이 앞섰다. 말을 내뱉고 나면, 그 남은 말의 찌꺼기가 남아도는 것 같아 입안도, 마음도 텁텁했다.

해를 넘긴 지금, 희미한 기억을 붙잡고 이 글을 쓴다. 앞서 ‘열다섯명의 죽음’이라고 썼던 것은 이제 ‘스무명의 죽음’이 되었다. 오래 묵혀두고 ‘언젠가는 써야지’ 하며 쓰지 않았던 글이었다. 글을 쓰려니 막연했다. 사실 조금 귀찮기도 했다.

‘귀찮기도 했다’라고 쓰고 나니 죄책감과 부채감이 몸 안 가득 차오른다. 귀찮다는 이유로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나는 대다수의 침묵과 외면, 무관심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쩌면 내가 귀찮다고 방관하고 있었던 그 시간 동안 나 또한 저 숫자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평택의 장례식장에 가보고 싶었다.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리고 스물. 차곡 차곡 숫자가 더해질 때마다 그 소식들은 심장을 억누르며 검고 시퍼런 절망이 되어 내 등 뒤에서 덮쳐왔다. 그러나 나는 몇 시간 뒤, 이내 곧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주 잠깐 휘청거렸으나, 비틀거리며 일상으로 아무렇지 않게 돌아왔다. 단 한 번도 가닿지 못한 평택과의 거리만큼 어차피 난 그렇게 ‘남’이었다. 그런데 난 정말 ‘남’일까. 남이고 싶은 건 아닐까. 불편한 질문이 뱃속에서 징그럽게 꿈틀거린다.

   
  ▲용화사 모습.(사진=강혜민)

1.

2011년 7월 1일, 김포 용화사에서 ‘그들’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전날인 6월 30일은 나의 아버지가 33년 다녔던 회사를 예순의 나이로 정년퇴직하신 날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또래들이 일찍이 퇴직하던 때, 공무원이라는 ‘철밥통’ 덕에 요즘 시대에선 보기 드물게 정년을 채울 수 있었다.

아빠는 종종 그것을 자랑스러워하셨고, 아주 가끔은 그 생활이 참 많이 힘들고 눈치 보임을 내비치셨다. 아버지는 퇴직하기 몇 주 전부터 술을 마시지 않고 들어오는 날보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더 많았다. 각종 환송회 겸 잦은 술자리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날들이 끔찍이 싫었고, 그 지긋지긋함에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하던 6월 30일, 그 날도 아버지는 역시나 새벽 늦게 들어오셨다. 술에 취한 몸은 무게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엄마는 아빠의 술주정에 질렸다는 듯 방안으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리고 아빠는 여느 때처럼 식탁에 앉아 술을 찾으며 담배를 태웠다. 적막한 집 안에서 그는 어두운 식탁에 또 혼자 앉아있었다.

아버지의 정년 퇴직

청승맞아 보였고, 구질구질해 보였고, 너무 늙어보였다. 많이 마셨으니 그만 마시라는 나의 만류에 아빠는 “이제부터 아침에 회사 안 나가니 더 마셔도 괜찮다.”고 답했다. 순간, 그 한마디가 내 심장을 꽈악 조이며 숨 막히게 했다.

그는 술과 담배를 번갈아 입에 대며 또 ‘꿍얼꿍얼’ 자신의 이야기를 뱉어내셨다. 그 이야기는 몇 해 동안 숱하게 들어서 지루하고 뻔했다. 그리고 피곤했다. 그런데 이 날의 이야기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새로운 레파토리였다. 퇴직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아빠가 33년 동안 일하고 정년퇴직 하는데 어쩌면 가족 그 누구하나 전화 한 통 안 하니. 아빠는 당연히 너희가 꽃 한송이, 가족끼리 저녁식사라도 한 번 준비할 줄 알았는데, 엄마도, 오빠도, 너도 어떻게 전화 한 통 안 하니.”

‘아차’ 싶은 생각에 머리가 멍해졌다. 아빠는 내 앞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주름 때문에 쳐진 눈에서 고름처럼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눈물을 그는 휴지로 콕콕 찍어내었다. 그 모습에 내 목 안에서도 주먹만한 울음덩어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우는 건 청승맞았다. 딱딱하고 경직된 가족관계 사이에서 우는 건 지지리 궁상이었다. 고개 돌려 시선을 피했다. 들릴까봐 조심스러우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 조금은 들리게 “미안해…” 개미만한 소리로 흘렸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들어가 자라고 다시 아빠를 다그쳤다.

다음날 도저히 ‘퇴직한’ 아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쫓기며, 나는 그 날 아침 일찍 김포 용화사로 인사도 없이 나섰다. 방 안 침대에 누워있는 아빠에게서는 독한 소주 냄새가 났다. 

2.

2011년 7월 1일, 김포 용화사.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의 아내, 아이들을 처음 만났다. 설레는 마음과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을 만났는데,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조금 쭈뼛쭈뼛했던 것도 같다. 이러한 어색함 때문에 나는 어른들과 있기보다는 아이들과 있는 게 편할 것 같아 정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티격태격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아이에게 “여기 어때?”하고 물어보았다. 초등학교 고학년 여자아이는 “카메라가 너무 많아서 싫다”고 하였다. “왜 싫어?” “티비에 나오잖아. 그러면 아이들이 놀려.” 아이의 뾰루퉁한 한마디가 나를 쿡 찔렀다. 당시 쌍용차 가족들에 대한 다큐를 찍는다고 하여, 용화사 이 곳 저 곳에는 여러 대의 카메라가 있었다.

   
  ▲용화사 대웅전에서 위령제를 지내다.(사진=강혜민)

그렇다고 2박 3일 동안 어떠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예불 드리고 밥 먹고, 설거지하고, 차 마시고, 둘째 날에는 강화도 절에 놀러가고, 산책하고……. 다소 느긋한 일상이었다. ‘어떠한 것’을 기대했던 내게는 조금 심심한 일상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박3일 동안 어쩐지 계속 긴장되었다. 나는 이런 내 모습에 갑갑함과 정체모를 좌절감, 열등감을 느꼈다.

빨리 늙고 싶은 젊음

나는 그들과 시선 맞추기가 힘들었다.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지닌 사람들 앞에서 내 스물여섯해 삶의 시간이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행한 시인 김해자 선생님은 내가 마음 졸이며 망설이고 있던 말들을 쌍용차 가족분들께 어렵지 않게 건네는 듯 보였다.

그 대화를 옆에서 귀동냥하며 나는 그 분이 지니고 계신 ‘세월의 주름’이 부러웠다. 선생님은 너무 편안하게 아픔에 공감하고 같이 울고 웃고 껴안고 손잡으며 그 시간의 길을 산책하고 계셨다. 담배 연기처럼 아스라이 사라지듯 시간을 흘려보내며, 시간 속에 함께 들어갔다 나오며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고, 때로는 함께 초록 수풀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순간 세월을 건너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나이를 지나면 세상의 고통에 조금은 편안하고 너그러이 다가갈 수 있을까. 아니, 이건 세월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저들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지 못하는 이가 된 듯했다. 소외감이 휑하게 마음을 쓸었다. 그렇게 언저리에서 멀뚱멀뚱 서있었다.

나는 늘 아픔에 대해 물어보는 게 힘겹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걱정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내가 억지로 고개 돌려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쓰린 곳을 더 눈물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된다. 아픈 이들을 더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저 상처난 살갗에 따뜻하게 손을 비벼 온기만을 더하고 싶은데, 그 언어를 고르기가 아직 내겐 힘들고 벅차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한다.

“어떻게 지내세요?” 이 안부인사 하나 꺼내기 전에 머릿속은 이미 복잡하다. ‘어떻게’라니, ‘어떻게’라니. 나는 아마 돌아올 대답이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상상 속에서 어림짐작만을 하고 있던 그에 대한 실체를 확인하는 게 겁나고 무서운걸까.

"내가 그래서 아파트로 이사 안 가는 거야"

이튿날 저녁, 용화사 대웅전에서 쌍용차 가족분들과 <당신과 나의 전쟁> 영화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침묵 속에서 마른 침을 삼키며 그 어떤 때보다 떨리고 긴장되었다. 일찍이 두 번이나 보았던 영화임에도 영화는 낯설게 다가왔다.

시선은 스크린을 향해 있으면서도 중간 중간 곁에 앉은 가족분들의 얼굴을 조심스레 슬몃 슬몃 보게 되었다. 그리던 중, ‘최동지’라는 분이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가셨다. 곧이어 “으아악―”하는 괴성이 들려왔고,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황급히 소리가 나는 바깥을 돌아보았다. 심장이 밑바닥까지 쿵 떨어지고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마음과 정신이 중력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찔했다. 피부 한 조각이 통째로 성큼 베어나가는 것 같았다.

지난밤 그가 했던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템플스테이 첫째날 저녁, 지관스님과 쌍용차 가족분들과 함께 둘러앉아 차를 함께 나누던 시간 “사는 게 너무 힘드니 이렇게 살아있는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단 한 번만이라도 실컷 자봤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아내 말에 ‘최동지’는 “내가 그래서 아파트로 이사 안 가는 거야. 거기 가면 당신 뛰어내려 자살할까봐.”하고 답하였다.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심장이 땅바닥에 쿵쿵 떨어져 쳐박히는 것 같았다. 그는 거울을 보면 자신의 얼굴 한 쪽은 웃고 있고, 다른 한 쪽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그래서 거울 보는 게 두렵다고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이야기를 가진 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볼 수 있을까. “어떻게 지내셨어요?” 혹은 “많은 힘드시죠?” 이런 ‘일상’적 인사가 그들에게는 너무 아프고 고될 것 같아서, 그 한마디 꺼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생각만해도 목에서 울음덩어리가 막혀서,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차마 자연스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간은 약이 아니었다

다녀오고 나니 너무 미련한 내 모습에 ‘나 대체 거기 왜 갔지?’ 하는 물음만이 솟구쳐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또 만나고 싶었다. 서툰 만남이지만 아주 조금씩 친해지고 싶었다. 내 스스로가 그러한 물음이 힘들다면 물어보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만남의 방법이지 않을까. 지난 그 날들처럼 그들과 조금씩 생활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삶으로 하나씩 알아 가면 되지 않을까.

시간은 아무것도 치유해주지 못한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약’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그 누구나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지는 않는다. 당시 사회는 그들을 ‘죽은 자’라고 불렀고 죽은 이를 땅에 묻듯, 사회는 그들을 그렇게 낙인찍고 사회적으로 파묻어버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은 이의 살은 썩고 부패한다. 죽은 자에게서는 새 살이 돋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다. 죽은 자, 그것은 사회가 일방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그들은 죽어있지 않다. 그들은 지금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앞에서 58일째(2012년 2월 2일 기준) 텐트를 치고, 그 누구보다 현재의 고통에 저항하며 강하게 살아나가고 있다. 고통에의 저항, 이만큼 생명의 약동이 진하게 울리는 곳이 있을까.

   
  ▲위령제 모습.(사진=강혜민)

오늘의 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20과 21의 시간, 그 사이-시간에 지금 우리가 서있다고 하겠다. 지나간 스무명의 죽음과 언제 또 드러날지 알 수 없는 스물한번째의 죽음, 그 아슬한 시간 사이에 지금 우리가 서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죽음 뒤에 또 죽음이 서있다. 그리고 올해는 작년 7월 내성천에서 만났던 여섯 살 주강이가 일곱 살이 된 시간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자란다. 쌍용차 파업 당시, 엄마 뱃속에 있던 아이가 이제는 걸어 다닌다. 그렇게 삶 뒤에 또 삶이 있다.

죽음 뒤의 죽음, 삶 뒤의 삶

폭설이 내리던 지난 2011년 12월 23일, 첫 번째 희망텐트가 있었다. 그 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니 피부 속 혈관이 얼어붙어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2차 희망텐트까지 지나왔다. 1차가 끝남과 동시에 2차를, 2차가 끝남과 동시에 3차를 준비해야 하는 그들의 동력이 경탄스러우면서도 못내 쓰리고 아프다.

그 날을 맞이하기까지 경찰과 사측, 용역들이 몇 번이고 텐트를 부수고 강제 철거해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질기게 꺾인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절박한 마음으로 지켜낸 하루, 하루의 모둠이 그들의 시간이다.

검은 하늘을 향해 치켜든 폭죽이 쌍용차 공장 담벼락을 넘어 축제처럼 빛나던 2차 희망텐트의 날, 그 곳에서는 소리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1차 희망텐트 때 70여명이었던 조합원들이 2차 때는 1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관계의 고리들을 끊었던 서러운 그들이 다시 그 곳으로 천천히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1차 희망텐트가 있기 2주 전, 사람들과 <와락>에 갔다가 희망텐트에 잠시 들렀다. 그 때, 조합원 한 분이 “이렇게 이곳에 서있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하였다. 문득 영화 <당신과 나의 전쟁>에서 신동기님이 77일의 파업 후, 집에서 공장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쪽을 다시는 바라보지 않는다고 한 모습이 생각났다. 그런데 저 분은 오늘 당차게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이곳에 서있으니 마음이 편하다”고. 2년 전 영화에서 그렇게 말했던 그도 지금 동지들과 함께 공장 앞에 서있다. 이들의 심장에는 얼마나 깊은 굳은살이 박혀 있는걸까.

그러나 이내 곧 ‘이렇게 절룩거리면서도 몇 번이고 굳게 일어나는 곳이 비단 이 곳만은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번더 쓰리다. 재능, 유성, 한진, 전북고속, 제주 강정, 콜트콜텍, 강남 포이동, 서울교원대 해고 청소노동자, 장애인과 성소수자들의 계속되는 싸움, 청소년 활동가들, 또, 또, 어디가 있더라. 그래, 용산참사 3주년이 있었다. 그리고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씨가 아직 감옥에 있다. 얼마 전에는 국가보안법으로 박정근씨가 구속됐다. 차라리 이렇게 호명이라도 된다면 나은 거다.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곳이 얼마나 많을까. 아, 정말이지 너무 많다.

평범한 가족들

그러나 용화사에서 2박3일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내가 이들에 대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이 얼마나 다정다감하며 귀엽고 잘 웃는 아빠인지, 얼마나 곰살 맞은 남편인지에 대해서다.

파업 후 가족들과 이렇게 오랜 시간 함께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용화사 오기 전 날, 큰마음 먹고 디카를 샀다고 웃으며 말하던 모습, 그리고 2박3일 내내 카메라로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내의 모습을 수없이 찍으며 행복해하던 모습.

그 모습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나는 이들이 그 모진 상처를 품고 사는 이들임을 잊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다가 이야기 속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상처들로 인해 문득문득 다시 깨달았고, 그럴 때면 난 웃다가도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당혹스러움에 잠시 얼었다.

지난 7월 쌍용차 가족들과 함께했던 2박3일의 템플스테이와 내성천.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만났던 것은 그냥 평범한 한 가족이었다. 가족과의 다정한 시간을 지키고자 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다정한 가족이 한 기업에 의해, 언론에 의해, 자본과 국가에 의해 어떻게 처절하게 부수어질 수 있는가를 보았다. 언론 속 복면 쓰고 거칠게 투쟁하는 이의 모습은 ‘누구의 시각’에서 그려낸 모습일까. 나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러한 물음이 든다.

가족과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엉뚱하게도 난 그 날 아침에 두고 온 아버지의 앙상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팠다. 울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도망쳤던 내 모습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우리 아버지도 평생 그렇게 일만 하지 말고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졌더라면 나는 아빠랑 조금 친했을까. 아빠는 지금 조금 덜 외로웠을까.

가장이 아니라 가족이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말처럼, 아버지가 가장이 아닌 가족이었으면 좋겠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60세 나의 아버지는 이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내야할까. 33년 동안 너무 열심히 일하여, 노동 이외의 일과시간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 이제 일과가 텅 비어버려서 하루 반나절을 TV 앞에 앉아있는 퇴직한 공무원. 이 사람은 이제 낯선 일상을 어떻게 하루하루 채워 넣어야 할까.

이상하게도 나는 (쌍용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의 모습과 퇴직한 아빠의 모습이 종종 겹쳐 보인다.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정년퇴직한 아빠는 해고노동자와 다른 듯하지만 비슷하다. 나의 아버지는 33년 동안 너무 열심히 일하였다는 게 문제다. 다른 삶을 가져보지 못했다.

퇴직하신 지 반년이 넘어가는 아빠는 퇴직 후 절반의 시간을 엄마와의 싸움으로 보낸 것 같다. 그 안에서 부모와 친하지 못한 딸은 심드렁했다. 아빠는 늘 우리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했고, 밤에는 술에 취해 들어오거나 야근했다. 아빠에게 ‘감사합니다’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날은 월급날, 아빠가 주는 용돈을 받을 때였다. 그 용돈이 좋으면서도 많이 미안했다.

해고노동자, 퇴직한 아빠, 백수 혹은 비정규직과 알바 자리를 빙빙 도는 나. 이 세 사람의 연결점은 어디일까. 가족을 돌보기 위해 밖에서 충실했던 아빠는 가족 안에서는 깊게 친하지 못했다.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온 날, 외면하는 가족들을 대신해 그를 위로해준 건 그동안 가족보다 더 친숙해진 술과 담배였다.

아빠는 늙었고 더 이상 노동력을 제공하기 힘들다. 올해 60세, 정년퇴직한 게 아니라 사회로부터 퇴직‘당한’ 것 같다. 그동안 국가에게 아빠를 빼앗겼던 것 같다는 어리숙한 마음이 슬픔으로 번진다. 33년 동안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우리 가족이 이제야 돌려받은 건 앙상한 60세의 노인이 된 아버지이다.

33년만에 돌려받은 아버지

해고노동자들은 말한다. 해고될만한 죄가 있다면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다고. 맞다, 그게 죄였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 안 되는지도 모른다. 기계가 아닌 인간인 우리는 가족을 돌보고 연인을 사랑하며 벗들을 만나는 충분한 삶의 시간도 누려야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그러한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했다. 일하는 시간 외에 담배 필 시간과 노동에 지친 몸을 축축이 적실 술 마실 시간만이 제공되었다.

2박3일 동안 쌍용차 가족들과 함께하며 한편으로 그들이 부럽고 슬펐던 것은 내게는 저들이 아픈만큼 자신의 가족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 마냥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내 속에서 ‘그래도 저들은 해고돼서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네’라는 다소 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침에 두고 온 아버지 때문이었다.

2박3일의 템플스테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서는 숨이 막혔다. 집에 돌아가기가 퍽이나 싫었다. ‘퇴직한’ 아빠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 괴롭고 괴로웠다. 참담했다. 이제부터 아빠는 회사에 나가지 않는구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에서 아빠와 하루를 함께 보낸다는 것을 상상하니 까마득했다. 현기증이 났다. 

3.

거리를 걷다가 나는 종종 ‘저 많은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며 사는 걸까’ 궁금해진다. 저 사람들의 급여는 얼마일까. 내가 이제껏 받아본 가장 높은 급여는 최근 학원 일하면서 받은 것으로 시급으로 치자면 7천원 가량이었다. 그 외에는 대개 최저임금 수준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고되고 아픈 이들 뿐인 우리네 삶에 과연 희망이란 게 있을까. 유행처럼 번지는 ‘희망’이라는 말을 마주하며, 혹시 희망이라는 허울 좋은 유령에 또 한 번 오늘을 착취당하는 건 아닐까 냉소하게 된다. 스스로 희망을 말하지만 희망이라는 말은 조금 촌스러운 것 같다고 종종 생각했다. 이 글을 쓰며 어느덧 나도 모르게 끝을 ‘희망’적으로 맺어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다. 희망, 그런게 있을까.

지금까지 삶이 낯설어졌다

가까이 있는 한 벗은 내게 “(네가 나가는 곳이 많아질수록) 어두워지는 것 같다”라는 말을 했다. 무리하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해고 노동자들을 만나고, 철거현장에 가고, 장애인 분들을 만나고, 4대강 공사현장을 보며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겁게 살아온 내 평온한 일상이 거칠게 뒤엉킨 슬픔과 분노로 인해 조금씩 흔들렸다. 내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 의문스러워졌고 낯설어졌다. 내가 누리는 일상의 ‘풍요’에 부채감이 들었다. 나의 오늘은, 나의 풍요로움은 누구에게 빚진 것인가? 이 물음이 내 삶에 들어온 그 날부터 세계는 전과 다르게 읽혔다.

나는 우리의 삶이 보다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불가능할지라도 그 불가능을 꿈꾸며 쓸데없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쓸모 있는’ 것만을 찾는 사회가 너무 사납게 느껴진다. 쓸모없고 형편없이 살면 왜 안 되는가?

꿈꿀 수 있도록 우리에게 편히 잘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오늘의 삶은 이를 용납지 않는다. 꿈꾸는 자 잡혀가고, 밤에 잠잘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치는 이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베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줌의 희망을 움켜잡고 무너진 다리에 다시 한 번 힘주어 일어난다.

꿈속에서 우리는 현재를 뛰어넘는 상상을 한다. 오늘은 경찰 차벽 밑에 무릎 꿇었지만 동트는 새벽, 그 너머 붉게 번지며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듯, 우리는 차벽 너머의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 이 너머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렇게 조각조각 나눠놓은 이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보아야 한다. 오늘의 내 초라한 삶은 내가 잘 못 살아서 그런게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하였을 때, 비루한 내 삶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엄기호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대가 얼마나 잔인한지에 대한 ‘증언’이 된다.

"힘내세요"라는 말은 못하겠다

눈이 소복이 쌓인 평택의 공장 앞에서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맞이하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 그 시간 안에서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눈꽃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두 발 딛고 서있는 언 땅이 녹고 새 봄, 새 날이 찾아오면 이 땅에도 봄이 찾아오리라고.

지금 이 곳에 분명 희망의 씨앗이 움트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죽음의 공장, 절망의 공장’이라고 외치면서도 그 속에서 고집스레 희망을 찾는 콧등 시큰하게 사랑스러운 그들을 끝까지 응원하고 지지하고 싶다. 그렇게 절망과 죽음 사이, 봄의 아지랑이처럼 희망이 희미하면서도 진하게 피어오른다.

그런데 차마 ‘힘내세요!’라는 말은 못하겠다. 이만큼 힘냈는데 도대체 얼마나 힘내라는 건지. 이미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우리에게 힘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지금 가진 힘을 우리 모두 부디 잃지 않길,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4.

이 글을 일곱 번째 고치던 날, 쌍용차 스무번째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열아홉이라 썼던 죽음의 숫자를 지운다. 이 글을 쓰고 고치는 내내 가장 오지 말라고 염원하였던 스무번째의 죽음이 절망이 되어 닥쳐왔다. 숨이 막힌다. 쌍용차 동지들의 목 메인 목소리가 솟구친다. 간신히 일으켜 세웠던 무릎이 다시 처참하게 꺾여 얼음바닥에 처박힌다. ‘열아홉’번째의 죽음 뒤에 서서 썼던 이 글이 이젠 내게 비현실적으로 읽힌다.

나는 이 죽음들을 아직 애도할 수 없다. 이 시체더미들을 앞에 두고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공장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코끝에 시큰한 피냄새가 묻어난다.

스무번째 죽음만은 막아보고자 혹한의 겨울에 텐트를 친 이 사람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무엇하고 있는가. 같은 사업장 내에서 일했던 이들에게서 스무번째 연쇄살인이 일어났다. 77일 동안 그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5.

2월 11일, 3차 희망텐트가 있다. 영하로 떨어지는 밤, 그 곳에서 그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세 번째 희망텐트를 준비하고 있을까. 감히 그려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 서럽고 애타는 마음을 그려본다. 그 마음에 기대어 따뜻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나는 그 곳에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버티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 중 하나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이 글의 끝에 서서, 이 글을 읽는 당신께도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 밖에서 불어오는 날카로운 바람에 추워 옷깃은 여미되, 그 안에 온기를 간직하여, 따뜻하게 품은 온기는 곁에 있는 이들을 안아주는데 쓸 수 있기를. 그런 풍요로운 시간을 우리 각자에게 선물로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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