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재능 노동자들에게 빚진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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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27일 11: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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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이 1500일을 넘어가고 있다. 1500일이란 숫자를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레닌그라드 포위전이다.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18일까지 레닌그라드의 시민과 군인들은 9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강력한 적에 맞서 싸웠다.

    이때의 참상과 영웅적 투쟁 모두를 글로 옮기는 건 어떻게 해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다만 그들은 시련과 고난을 견디고 승리했다는 것만 지적해 두자. (덧붙여 쇼스타코비치의 제7번이 스탈린주의적 냄새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 투쟁의 한복판에서 작곡되고 초연되었다는 걸 잊지 말자)

    어쨌든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동부 전선에서 파시즘을 물리치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물론 “트로이는 함락당했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당하지 않았다”는 찬사나 영웅 도시라는 칭호가 보답이 되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지만 말이다.

    여전히 향방을 알 수 없지만 1500일을 넘기고 있는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 또한 그 어떤 찬사나 칭호로도 그 두께와 깊이에 값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재능 노동자들과 이들의 투쟁에 빚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인식 지평의 확장

    우선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은 우리 시대의 초점이자 교차점인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의 경계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인식 지평의 변동과 확장을 가져왔다. 신자유주의 (위기의) 시대에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는 편재하지만 사실상 부재한 존재이다. 재능 노동자들처럼 특수고용직은 더욱 그러하다.

    이들이 눈에 띌 때는 목소리를 내고 몸짓을 할 때뿐이다. 1999년 말 수천 명의 재능 ‘선생님들’이 ‘노동’ 조합을 만들고자 했을 때 비로소 이들은 노동자가 되었다. 물론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이지만.

    하지만 노동조합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틀에 불과한 것임에도 노동조합의 설립은 곧바로 노동조합을 수호하는 투쟁으로 재능 노동자들을 몰고 갔다. 이제 와서는 반복해서 말하기도 끔찍한 회사의 노동조합 파괴 공작, 이에 맞서는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에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얻는다는 것은 곧바로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은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자 시대의 역설을 보여준다. 자본 측에서의 비용 절감 시도가 노동의 유연화라는 양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재능 노동자들은 선생님이자 특수고용직이라는 이름으로 경계 저편에 존재했다. 이들이 노동조합으로 일하는 사람의 권리를 추구함으로써 경계를 넘지만 이는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라는 또 다른 경계를 드러낼 뿐이다.

    더욱이 기가 막히는 역설은 노동자로 살기 위한 투쟁이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며, 다시 이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이다. (지젝이 아르투어 펠트만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특별히 우리 시대에만 이런 것 같지는 않다. “대개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하는 대가는 우리의 생명이다.”)

    긴 시간과 상징적 공간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이 우리 인식 지평의 변동과 확장을 가져온 두 번째 지점은 투쟁의 양상과 형태에 관한 것이다. 우선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은 어떻게 말한다 하더라도 끈질김이라는 양상을 보였다. 물론 여러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의 투쟁 대부분이 장기화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시간의 길이가 재능 투쟁의 고유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 이 시대 일하는 사람들의 투쟁이 지닌 특유성을 이해할 수 있다. 투쟁의 장기화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경쟁 이데올로기, 금융자본주의의 압박 속에 처한 다양한 자본들의 경쟁, 개별 자본가들의 탐욕이 어우러져 이른바 양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투쟁의 이런 양상은 일부 산업 부문과 사업장을 제외하곤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투쟁의 장기화를 가져온 원인이 이렇다 하더라도 투쟁의 주체가 장기간 버티지 못했다면 투쟁 자체는 소멸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쟁 주체의 의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찬사로도 부족할 것이다. 이 의지는 주체의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며, 인격은 자기준거적이고 자생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농성이라는 형태로 근거지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농성이라는 근거지는 강력한 적에 맞서 싸우는 공간을 탈취하는, 투쟁의 첫 걸음이다. 이를 통해 보이지 않던, 부재하는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는 비로소 눈에 띄고, 존재(투쟁)하게 된다.

    그렇다고 농성이라는 근거지를 실체적 공간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농성이라는 근거지는 유동적이고 개방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빼앗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얼마나 여러 차례 천막을 철거당했는지 생각해 보라. 하지만 농성은 계속되고 있다!)

    유동적인 이유는 경계 안팎에 있는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들의 투쟁이기 때문이다. 원래 고정된 장소가 없는 사람들의 투쟁이며 잠정적인 고정점만 있을 뿐 투쟁은 그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 개방적인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빼앗길 수 없는, 부재하는 장소이다.

    물론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은 수동적인 상태일 뿐이다. 도리어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근거지는 발전시켜야 하는 곳이다. 작년에 우리가 경험한 ‘희망의 버스’는 이런 발전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발전을 연대라는 말로 바꾸어 불렀을 뿐이다.

    이때 연대는 그 모든 경계를 가로지르는 발전이다. 우리가 그것을 하나로 묶어 99%라고 부르든,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신자유주의/금융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동맹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들의 연대와 이들을 향한 연대는 새로운 정치적 동맹의 중요한 요소이자 촉매이다.

    끝으로 우리가 빚지고 있는 것은 재능 노동자들이 보여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인간으로의 고양을 향해 분투하게 된다. 우리 시대 어떤 긍정적인 준거점이 있다면, (자연을 제외할 때) 독립적 인격이다. 재능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에 근거하고 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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