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이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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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16일 09: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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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elcome to 2012

    우여곡절 끝에 2012년을 맞이했다. 누군가에게는 지구 종말 해프닝으로 기억될 한 해가 되겠으나, 이 곳을 방문하는 이들에게는 정치의 계절로 회자될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의 선정 아래, 그동안 고생들 많으셨다. 이제 벼리던 칼을 품 속에서 꺼내자.

    올해 ‘정치닥’ 시장의 블루칩은, 단연 ‘복지 국가’와 ‘경제 민주화’가 아닐까 싶다. 좌익사범과 안보의 변주곡으로 지금까지의 선거에서 무리 없이 승리를 거둬 온 한나라당은, 지난 6.2 지방 선거에서 빅엿을 먹은 이후로 고심이 깊다.

    낡은 프레임에서의 전투를 고집해봤자, 경상도를 퉁 치고도 25%의 어버이연합 고정 지지율 밖에 안 남기 때문이다. 청년 취업수당과 김종인을 통해 미루어 보건데, 박근혜 비대위는 ‘전장의 교체’라는 엄중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진단을 한 것 같다.

    ‘복지국가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이미지를 주입시키고, 재정 건전성 드립치며 집권여당의 안정감을 운운하다가, 경제민주화는 삼성을 등에 업고 적당히 쉴드 치겠지, 시바. 야권은 이러한 함정카드에 굴하지 말고, 새로운 전장에서 확실한 비교우위를 점해야 할 것이다.

    결론부터 읊자면, 새로운 전장에서의 비교우위를 완성할 가장 강력한 깔대기는, 청년이다.

    힘의 균형과 변수

    상수로만 구성된 기성 정치는 힘의 균형에서 ‘교착’ 상태이다. 이 문장을 ‘팽팽한 균형’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한나라당과 진보진영이 호각 상태라고 주장한다면 지나가는 멍멍이도 비웃을 테니. 이미 포진한 상수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해 봐야 균형은 깨지지 않는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형세를 역전, 혹은 완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변수는, ‘변수’이다. 그리고 선거공학의 측면에서 이 변수는 ‘새로운 세대’를 의미한다.

    이 시점에서 청년들의 계급성과 진보성에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는 핀볼이 추락하기 직전에 ‘핀볼 판을 흔드는 것’의 진보성을 고민하지 않는다. 좌우에 위치한 핀을 아무리 흔들어도 볼을 구할 수 없다면, 우리는 기꺼이 판을 흔들어야 한다.

    역사의 진보를 게임에 빗대는 것은 너무 억지인가? 그렇다면 논의를 이어가자.

    사회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을 통달한 진보진영이 자주 까먹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연과학이다. 인류 역사는 맑스와 베버뿐 아니라, 아이슈타인과 뉴턴을 함께 기억한다. 두 개의 과학은 장구한 역사 동안 인류의 지혜를 축적하며, 공존하고 발전해왔다. 정치와 운동은 진보의 당위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당위로서 발명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과학의 지혜 또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사회과학은 인류를 좌우(계급)로 구분하지만, 자연과학은 인류를 상하(세대, 연령)로 구분한다. 생산수단을 노동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혁명(진보)이라면, 미래에 대한 결정권을 새로운 세대에게 귀속 시키는 것 또한 혁명이다.

    노동자가 이윤과 가치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전자의 명분이 있다면, 청년이 미래의 주인이라는 점에서 후자의 명분이 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계급적 진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서울대 출신 청년의 생물학적 진보성 또한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의 세대교체’는 진보의 필연이다.

    청년을 위한, 청년에 의한

    정치의 세대교체는 컨텐츠와 상징이라는 양날개를 통해 비상할 수 있다. 전자는 ‘청년을 위한’ 세대교체가 될 것이며, 후자는 ‘청년에 의한’ 세대교체가 될 것이다.

    청년을 위한 세대교체는 정책과 비전의 세대교체이다. 청년을 위한 몇 가지 사업을 열거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정책의 기준을 ‘청년’으로 설정하고, 그들의 생애주기를 반영하여,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미래를 설계한다는 측면에서, 진보의 당위와도 부합한다) 앞선 기고에서 밝힌 바 있으나, 기성 정당들은 미래를 설계하고 제시하는 데에 탁월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청년에 의한 세대교체는 감수성, 더 나아가 시대정신의 세대교체이다. 기성 정치인이 청년을 위한 정책을 설계하는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로 소통하고, 팟캐스트에서 언론을 향유하며, 조직이 아닌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정치에 구현할 수 있을까?

    이는 청년세대가 민주화 투쟁의 감수성과 시대정신을 그들의 삶과 정치에 반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청년들의 정치 참여에 진입 장벽이 높은 현 조건에서는, 새로운 감수성을 대표(혹은 대변)할 상징이 필요하다. 한나라당에서는 이준석이 등장했고, 민주당은 슈스케를 준비 중이며, 통합진보당 또한 최근 ‘청년 비례대표’가 언급 되었다.(유감스럽게도 진보신당에게 이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가 될 것 같다)

    문제는 기성 정당에서 ‘청년’을 겨냥한 컨텐츠와 상징의 균형이 맞지 않는 데에 있다. 충실한 컨텐츠가 갖춰지지 않았을 때, 상징은 ‘들러리’로 전락한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제시할 미래(컨텐츠)는 없다. 다만, 우리가 너희들 중 몇을 추려 국회의원(상징)으로 ‘간택’하겠노라. 아멘.

    시혜를 거부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컨텐츠 없는 상징은 ‘시혜’에 불과하며, 이는 정치의 세대교체라는 ‘역사적 진보’에 부합하지 않는 모습이다. 우리에게 제시할 미래가 없다면, 우리를 간택하겠다는 오만함 또한 버려야 한다. 청년들과 미래를 협상하려는 자세 또한 재고하셔야 한다. 청년들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주판을 굴리는 대신, 주판을 집어 던질 것이다. 우리에겐 아이패드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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