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백아가씨에서 아침이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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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16일 08: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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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마음 조합

    한마음조합 활동의 폭은 점점 넓혀져 갔다. 매년 여름휴가를 이용한 북해 캠프는 계속됐는데 비용이 만만치가 않았고, 또 일정도 우리가 선택할 수가 없어서, 생각 끝에 텐트를 사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공동구매로 10% 정도 싸게 7개를 구입했단다.

    그때 독일에서는 물건을 깎아서 산다는 것 자체가 없었는데 우리가 공동구매를 통해 정가보다 10% 싸게 살 수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사지 못한 조합원들은 뒤늦게 같은 방법을 시도했지만, 그들은 결국 깎지 못하고 정가로 살 수밖에 없었다. 

    10% 할인 가격으로 구매하게 된 것은 너희 엄마의 실력 때문이었다. 엄마는 판매원과 한참 얘기를 하다가 "사장을 만나 얘기해야겠다"고 하자 판매 총책임자가 나왔고, 엄마는 그 사람과 흥정 끝에 할인을 받을 수 있었던 거다. 네 외갓집이 영월에서 양품점을 대대로 해온거 너도 알지? 장삿집 딸로서 그때 능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81년 한마음조합 여름캠프 후 조합원들은 너도 나도 텐트를 사서 매년 여름 휴가 때만 되면 네덜란드 북해로 함께 가는 일이 연중행사가 되었다.

    엄마는 네가 커가면서 재봉틀을 사서 예쁜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는데 그 옷을 입은 너는 정말 너무나도 깜찍하고 예뻐서 아빠는 늘 입에 함박웃음을 달고 살았단다. 그리고 우리 지역 신문에 가끔 너와 관련된 기사가 실려서 우리를 놀라게 했단다. 

       
      ▲딸 해린이 지역합창단 입단 면접 시험을 보는 내용이 지역언론에 보도됐다. 

    밤을 새면서 토론하다

    아빠가 지금까지 네덜란드 북해 얘기를 계속 하는지 혹시 아니? 네 동생 훈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엄마! 아빠!" 하면 이상하게 목이 쉰 소리가 나와서 의사를 찾아갔더니 그 의사는 "기관지 문제인데 네덜란드 북해로 휴가를 가보라"고 권유해서 그곳으로 주말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러자 동생 훈이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정상적이고 깨끗한 소리가 됐다. 그때부터 나는 너희 할머니 말씀대로 종자를 지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북해를 다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북해는 아빠의 고향인 부안 서해 바다와 너무 닮아서 마치 고향을 가듯 그곳을 찾았던 것 같다.

    한마음조합은 83년에도 할머니들을 초대하여 경로잔치를 했고, 점차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했는데 그중에서 보쿰대학에서 공부하는 한인 유학생들과 만남도 있었다.

    지금도 인상적인 것은 달하우젠(Dahlhausen) 강가 옆 잔디밭에서 배구와 축구를 함께한 후에 텐트까지 쳐놓고 불고기를 구워먹으면서 토론을 한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런 토론을 날을 꼬박 샌 적도 많았다. 이런 기회에 민주화가 왜 중요한지, 노동운동이 왜 중요한지, 독재가 뭔지에 대해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의 의식은 변해갔다. 

    특히 아빠는 한국에서는 그저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만 고민했는데, 독일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 날밤 새우는 일이 많아졌다. 나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아빠는 그때부터 한국에서 책을 받아서 보급 사업을 시작했다. 참, 이 글을 쓰다보니 ‘일월서각’이라는 출판사의 김 사장님이 떠오르는구나. 그분이 책을 보내주셨다. 참 고마운 사장님이었다.

    우리가 부르던 노래가 바뀌어갔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문화가 바뀌어갔다. 먼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노래가 변했다. 예전 고향에서 불렀던 동백아가씨, 비 내리는 호남선, 가슴 아프게 같은 노래는 어느 때부턴가 아침이슬로 바뀌었다. 유학 온 학생들이 기타를 치면서 그 노래를 부르는 걸 보니 너무 멋지더라.

    헌데 노래를 배워서 부르다보니 가사가 정말 나를 울게 하고 주먹을 쥐게 하더라. 특히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에서 말이다. 또 그들을 통해서 김지하라는 시인을 알게 됐고, 그 시를 같이 읽고 토론하면서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함께 울고 웃었단다. 그리고 각종 모임과 세미나 토론 때마다 ‘민중’이라는 용어가 여기저기서 나오는데, 우리는 도대체가 그게 뭔 뜻인 줄도 잘 모른 채 덩달아 "민중, 민중" 하고 있었다.

    우리는 또한 재정사업을 위해 큰 봉고버스까지 구입하여 떡과 채소뿐만 아니라 식품도 공동구입해서 나눴다. 그 때 아빠는 정말로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직장도 다녀야 하고, 한국에서 보내오는 자료들 복사해서 나눠야 하고, 시간만 되면 버스 끌고 다니면서 장사도 하고, 주말에는 교회와 여러 모임에 다녀야 했다. 내가 그렇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부지런한 너희 엄마와 똑똑한 너 때문이었다.

    너는 동생 훈이를 너무도 잘 보았다. 아마도 네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학교에 들어갈 무렵일 때일 거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전화가 왔다. 엄마보고 한번 만나자는 전화였다. 엄마가 유치원 담당자를 만나고 와서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더라.

    엄마는 너에게 유치원에 동생 훈이가 가게 되면 누나인 혜린이가 잘 봐줘야 한다고 얘기했다. 훈이가 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그런 얘기를 계속 했었다. 훈이가 유치원에 처음 간 날 네 엄마가 하던 말때문었는지 동생 곁을 떠나지 않고 누구도 훈이 옆에 오는 거를 막고 있어서 하는 수 없이 담당자가 엄마를 불렀던 거였단다. 그때부터 너는 항상 훈이를 챙겨서 훈이는 마마보이도 파파보이도 아닌 누나보이가 된 것이다.

    뮨스터시장에서 불고기 장사

    세미나에서 알게 된 형이 어느 날 전화를 걸어서 이번에 뮨스터(Muenster)시 축제에 참가해서 재정사업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불고기백반 장사로 참여했는데, 우리 옆에서 독일 사람들도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탄압을 알리면서 빈대떡을 판다고 했다.

    시 축제에 날씨가 좋아서인지 사람들이 많이 오고갔다. 우리 불고기도 히트를 칠 정도로 잘 팔려나갔다. 헌데 빈대떡을 만들어 팔던 독일사람들이 고개를 가우뚱하면서 우리는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연대위원회(Korea-Komtte) 소속인데 한 회원의 부인이 요리법을 적어줘 그것대로 만들었는데 사람들 반응이 이상하다는 거였다. 

    우리가 먹어보니 음식에 간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빈대떡에 찍어먹을 양념장도 없었으니 얼마나 심심했겠냐. 알고보니 그 사람들은 요리법에 써있는 소금과 양념장을 생략했던 것이다. 우리 설명을 들은 후 그들은 다시 빈대떡을 만들어 이번엔 가게가 성황을 이뤘다. 

    헌데 그때 앞치마를 두르고 빈대떡을 팔다가 이상하다며 우리에게 얘기를 걸어온 사람은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연대위원회 대표이자 오스나브르크대학 총장인 균터 프로이덴 부르크 교수였단다. 다음 날도 장사를 했는데 한국연대위원회는 회원은 한국인과 독일인들이었는데 독일 사람들이 더 많았다.

    아빠는 독일 말도 잘 못해서 그냥 잠간 커피 한 잔하면서 쉬는데 독일 목사님이라는 브라운 슈타인이 한국말로 "함께 쉽시다." 하면서 내 옆에 앉아서 놀랬다. 물론 한국어를 잘하는 분은 아니지만 아빠가 독일어하는 것처럼 몇 단어를 하시는 분인 거 같았다.

    오펠에서 노동운동 그룹을 만나다

    나는 노동운동을 배워서 하고 싶다고 손짓발짓해가면서 얘기를 했는데 이 목사님이 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좋아하셨다. 그러면서 지금 다니는 직장이 어디냐고 묻길래 아담 오펠(Adam Opel) 보쿰 공장에 다닌다고 했더니 크게 웃더라.

    그리고는 다시 한국말로 "제가 잘 아는 사람이 그곳에서 노동운동합니다. 소개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공장 작업장이 어디며 공간이 어디인가를 물어와서 내가 말해 줬다. 이 말이 너도 아는 그 게오게(GOG) 그룹을 만나게 되는 시작이 될 줄은 몰랐다.

    프레스가 자동화로 발전하면서 아빠는 마후라 중간 부분 만드는 곳으로 옮겨졌다. 헌데 어느 날 키가 크고 코가 큰 직장평의회위원이 찾아왔다. 그가 지난 번에 이야기한 균터 였다. 매주 화요일 오후 다섯 시에 시청옆 맥줏집 공간에서 만나니 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너무 반갑다고 꼭 참석해서 함께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아빠는 가슴을 설레이면서 화요일 그장소로 갔단다. 그곳에는 너도 아는 볼프강도 나왔고, 스페인에서 온 온두라도 있고, 터어키에서 온 아멧도 있고, 노동변호사, 대학생 등등 한 10명 정도 였단다.
    나중에야 좀 독일어가 되었을 때 알았지만 게오게(Gruppe oppositioneller Gewerkschafter in der IGM)는 68년 학생 운동하던 정치그룹 중 일부가 노동현장으로 가면서 이들이 현장에 만든 노동운동그룹이었단다.

    재미있게도 리더처럼 보였던 볼프강은 육상선수에 신학전공이었다고 하더라. 독일금속연맹(IGM)에서 보쿰 공장의 게오게(GOG)는 한때 제일 큰 적수였다고 하더라. 내가 함께 할 때만 해도 전체 노동자가 2만여명인데 직장평의원선거에서 5천표를 얻을정도 였으니 말이다. 금속연맹이 게오게 활동가 90여 명을 징계처분한 사실만 봐도 게오게는 그들이 무척 두려워 했던 조직이었다.

    김세균이 오다

    헌데 그 목사님의 추천으로 만난 그 게오게는 나를 노동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엄청 커다란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그 동지애는 지금도 여전하다. 너도 알지?

    매주 화요일 오후 다섯시 모임이 있는데 나같이 교대 근무하는 사람은 아침 근무할 때만 참석이 가능하여 격주로 참석을 했단다. 모임에서는 직장평의원들의 한 주간 현장이야기,  공장경영 이야기를 했고, 독일노총(Deutsche Gewerkschaftsbund)과 금속연맹 이야기를 했다.

    또 같은 자리에 있던 노동변호사가 법률적 자문을 하고나면 스페인, 터어키, 한국 등의 여러 나라의 노동운동 현황 정보를 아는 대로 얘기하고 공유를 했다. 나는 처음에는 독일어 듣기도 말하기도 잘 못해서 긴장한 채로 있다가 집에 오면 머리가 무척 아팠다. 그러나 계속 참석하면 할수록 재미도 있고, 이해도 됐다. 84년 독일금속연맹은 주 35시간 노동시간단축 투쟁을 시작해서 노동 현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김세균형이 유학을 왔다. 재미있게도 보쿰에 외스베(Oekumenischen Studienwerks e.V.)라는 개신교 재단이 있었는데, 그 재단에서는 제3세계 지원정책으로 장학금제도가 있었다. 그 장학금을 받게 된 사람들이 독일에 유학 오면 어학공부는 그 재단에서 했기 때문에 한국 장학생들이 많이 거쳐가는 코스였단다.

    그 당시 한국기독도교회협의회(KNCC)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상징처럼 되었던 때였나보다. 그래서인지 보쿰에는 활동가나 구속자 또는 그 자녀들이 많이 왔었단다. 이런 환경 덕에 우린 참 좋은 분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5월학살이 벌어지자 조용해졌다

    참 그러보니 빠진 이야기가 있구나. 79년 너와 한국에 갔다가 오자마자 오펠 자동차공장에 들어가던 시기에 한국에서는 ‘YH’와 ‘크리스챤아카데미’ 사건이 벌었졌단다. 방문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이 구속되고, 수배되는 거였다. 너도 아는 김세균 형을 비롯 신인령 선생님 등도 구속되었단다. 헌데 내가 어찌할 바 모르던 때에 황민영 형님이 구속자 인적 상황을 써주고, 그들이 한 일도 써줘서 알리는 일을 했단다.

    우선은 교회를 중심으로 알리고, 학생들의 도움으로 독일어로 만들어서 뿌렸단다. 헌데 살인마 전두환이가 나타나 5월학살이 일어나자 모두가 조용해졌고, 우리도 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현장의 바닥을 긁는 작업을 시작한 건 이미 얘기를 했으니까 너도 알 거다.

    헌데 재미있게도 그때 그 구속되었던 김세균형이 83년에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왔었단다. 그러니 아빠가 얼마나 힘이 났겠냐? 한마음조합은 한마음이라는 회지도 발간하면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그중에서도 금토일 주말세미나 중 온가족이 모여서 하는 세미나를 매년 1~2회를 해왔다. 83년 가을 세미나는 ‘한국의 현대사의 과제’란 주제로 김세균형을 강사로 모시고 뮬하임 강가 근처 교육센터에서 했단다.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 유럽지부를 만들기 위해 조용히 몇몇 사람들과 논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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