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이 민주주의 국가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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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13일 10: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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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노르웨이에서 산 지 인제 어언 12년이나 돼갑니다. 그 12년 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이유로 현지 매체와의 이런저런 접촉을 계속해왔지만, 북조선이나 분단과 관련된 문제로 수도 없이 인터뷰를 해봤어도 남한 내부 사정과 관련돼서 한 번도 인터뷰 제안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북조선에 가본 적도 없는 반면, 서울 시내에서 눈을 감고 다녀도 웬만한 걸 다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유사(?) 토박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죠.

    노르웨이 언론들의 한반도 보도

    그만큼 노르웨이 매체들은 ‘이국’처럼 보이는 북조선을 계속해서 상업적으로 이용해도 남한의 상태와 역할을 다소 "당연시"하는 것입니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별다른 질문을 제기하지 않고 (예컨대 1년에 과로사 당하는 노동자 수나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 등등을 묻지 않고) 잘도 사주는 휴대폰과 자동차 등을 잘 찍어내고, 노르웨이 국영 석유기금에 황금의 투자 기회들을 제공해주는 남한은 "당연히" 그저 (특권적인 구미권) 외부자들에게 편리하게끔 예전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노르웨이를 포함한 대부분의 구미권 언론들은 거기에 별다른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습니다.

    휴대폰과 자동차 부품들을 만드는 공장들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마도 평균적 노르웨이인이 기절하고 말겠지만, 본인들의 정신건강을 보호하려는 무의식 때문인지, 세계체제 핵심부 언론인들은 거기까지 궁금증을 가지려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같은 사람이 잘 연구한 적도 없는 북조선에 대해서만 자꾸 취조 아닌 취조를 당해야 합니다.

    그 취조 과정에서는 저로서는 한 가지 어려운 점이 늘 있습니다. 북조선의 체제 성격을 도대체 어떻게 규정해야 할 것인가요? 전근대적 요소(통치권 세습, 충효 이데올로기 강조 등등)들은 분명히 보이지만, 이미 1980년에 총국내생산의 90%를 근대적 공업/서비스 부문이 차지한 중공업 중심의 국가인지라 그런 요소만을 강조하면 "오리엔탈리즘"에 빠지는 혐의를 피하기 힘들죠.

    노르웨이 기자들은 "스탈린주의의 유교적 변형은 아니냐"고 묻곤 하지만, 군사화의 정도나 "유일사상" 강조는 예컨대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미-일-한 침략적 블록으로부터의 위협이 실제로 엄연히 존재하고, 또 (억압적 기구의 역할은 물론 없는 건 아니지만) 정권의 선군정책의 명분이 되는 제국주의적 공격에 대한 방어적 태세는 실제로 대다수에게 내면화돼 있기도 합니다.

    남북의 체제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

    결론적으로는, "스탈린주의적 공업화 방식과 행정적 기술과 함께 전근대적인 통치 이데올로기 등을 동시 이용하는 반제적 성격의, 군사주의적 요소가 강한 대중 (합의) 독재" 정도면 어느 정도 객관적이다 싶은 정의가 될듯한데, 너무 길죠? 그런데, 조선반도의 근현대사가 복잡한 만큼, 그것보다 더 짧게 정의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조선보다 어쩌면 남한 체제의 성격을 규정하기가 더 힘들 것 같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국가라고요? "가카"가 손수 라면 값 등등을 "잡아주는" 쇼를 벌이고, 이와 동시에 소비자 물가 앙등의 위험을 무릅쓰고 환율을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필요성대로 조정해주는 나라가 (국가의 개입이 최소화된다는) "신자유주의 국가"라면 저는 화성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쪽으로 보면 비정규직 양산이나 저임금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의 경향적 저하, 중간 규모 근로소득자와 중소 자영업자 계층(중산층)의 경향적인 축소 등으로 봐서는, "신자유주의 국가"는 거짓말은 아니거든요. 단, 이와 함께 국가가 주요 재벌들의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챙겨주는 "재벌국가형 중상주의" 같은 측면도 적지 않게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와 재벌국가형 중상주의의 결합"일 터인데, 신자유주의로도 (노동자 이해관계를 배제하는) 중상주의로도 고통을 받는 민중을 도대체 어떻게 해서 통제를 한단 말씀이죠? 그러니까 여기에다가 한 가지를 꼭 첨가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와 독특한 기업국가형 중상주의를 겸비하는 규율국가"라고 해서, 이 "규율 국가"에다가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이 부분은 아니면 노르웨이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휴대폰과 자동차의 부품들을, 산업화된 나라 중에서 가장 노동시간이 길고 가장 산재 위험이 많고 가장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공장에서 만드는 노동자들이, 노르웨이 나들이를 좋아하는 그 "사장님"들을 그냥 린치해버리지 않고 아직도 계속 참고 견디는 것은 설명되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불가피하게 쌓여가는 불만의 폭발을, 이 체제는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잘 예방합니다.

    내면의 규율화

    이 예방 작업, 즉 규율화 작업의 상당 부분은, 꽤나 일찍, 유아기와 소년기의 각종의 사회적 압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미 초등학교 1학년 나이에 "급우의 무시를 받지 않으려고" 자발적으로(?) 영어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라면, 벌써 그 내면은 사회적 압력에 부응해서 "규율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실제 그러한 "내면의 규율화"가 없으면 남한이라는 자본주의형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는 그저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대통령까지도 "쥐박이"라고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자유의 낙토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병역거부를 하는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계속 감옥행해서 세계의 수감중인 병역거부자들의 95%(!)를 차지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여러분들께서 남한에서 용감하게도 미국 상전들의 언어를 (의무교육 교정 이외에) 달달 외우기를 거부한 "영어 거부자"를 한 명이라도 보셨나요?

    돈이 없어서 "내지어"(?)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돈이 있어도 식민모국 언어에 대한 거부의사를 자유로이 실천한 경우를 보셨습니까? 대학입학을 거부한 몇 명의 용감한 젊은이들을 제가 요즘 인터넷상으로 만날 수 있었지만, 과연 그런, 매우 상식적인 운동들은 남한에서 보편화될 수 있을까요?

    고문실과 양심수 구속의, 유신정권식의 전체주의는 이미 상당 부분 가긴 갔지만, 남한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압력들은 실로 "소프트한" 전체주의 수준입니다.

    그러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돈 들여 주인님들의 언어를 배울 만한 집안 사정이 되지 못한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관리자 욕설을 들어가면서 주차장 관리요원과 편의점 알바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미리 겁을 먹는 아이들은, 과연 더 커서 반란을 일으켜 착취공장들을 쳐부쉴 위험은 클까요? 우리는 아주 아주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노예화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삼성과 현대의 대주주들이 별 근심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돈벌이할 수 있는 기반이죠.

    전체주의적 요소가 강한 규율 국가

    "중상주의와 신자유주의를 겸비하는, 전체주의적 요소가 강한 규율국가" 남한….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대다수의 인구가 일찌감치 순응주의자로 클 수밖에 없는 이런 사회에서는, 관리자들은 늘 70년대식 "고전적인 전체주의"를 재도입할 "유혹" (?)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하는" 몇 명의 반대자들을 본보기 삼아 감옥에 쳐넣어도 사회에서 무슨 폭발이라도 일어날 일은 없거든요.

    예컨대 최근의 사회당 당원 박정근 동지의 구속 사건을 보시지요. "조선로동당 반대" 입장에 확고히 서는 사회주의 정당 당원이 북조선 어투를 패러디 재료(?)로 삼아 몇 개의 트위트를 날리더니 금새 "찬양고무자"가 되어서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안당국이 사회당이 북조선을 철저하게 비판한다는 걸 모르는 것은 전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 알면서 또 다른 "까부는 아이"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저 국가보안법을 악용을 해서 정권의 비판자를 물리적으로 탄압한 것이죠. 그렇게 해도 대다수가 그저 침묵만 하고 자기 일에만 신경쓰는, 경제동물화된 사회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인님"들에게 부담도 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70년대식 전체주의로의 회귀" 현상 중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최근의 송경동, 정진우 등 "희망버스" 조직자의 구속입니다. 알 사람은 다 알지만, 그들이 조직한 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사상 아마도 가장 평화적이었습니다.

    상당 부분 아이를 대동하고 부산에 오는 "희망버스" 승객들은, 화염병이나 돌에 호소하지 않는 건 물론 몸싸움까지도 피하려는 경우가 대다수이었죠. 비폭력적이었던 만큼 이 운동은 잘 대중화돼 결국 성공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송경동시인과 정진우 동지가 감옥에 가게 된 이유죠. 그들은 너무나 성공적으로 평화 지향적이었다고 해서요.

    남한이 민주국가라고?

    이게 전체주의가 아니고 민주국가라고요? 남한을 보고 "북조선보다 그래도 우월한 민주적 체제"라고 주장하시는 진중권 류의 리버럴 분들께서, 이 장면을 보고 약간이라도 반성해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나라가 민주국가라면, 오웰의 말대로 "노예상태는 바로 자유"죠.

    "진짜" 전체주의, 양심수 다수를 양산하는, 그런 전체주의로의 회귀를 방지하려면,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있지 않는" 일이죠. 트위터로든 블로그 포스트로든 매체 기고문이든 시위로든 모든 가능한 표현 방식들을 다 동원해서 송경동 시인과 정진우 동지를 비롯한 여러 양심수들을 석방하라고 고집스럽게 요구하는 일부터 하는 게 가장 쉽고 일반적인 방법이겠습니다.

    그 다음에, 금년에 총선, 대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심수 석방에 대한 입장을 특정 정당 지지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지 않는 정당이라면, 이 정당은 비(非)민중적인 것은 물론 아예 진정한 의미의 자유주의 정당도 아니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제일 근본적인 대책은 노동자들의 조직화, 그리고 노조들의 전투화, 급진화입니다. 노동운동이 그 고립을 극복하고 급진화돼야 노동운동가들의 구속은 정권으로서 훨씬 더 부담될 것입니다. 결국 급진화된 노동운동과 급진적인 민중 정당만이 이 체제 전체를 한 번 근본적으로 흔들 수라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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