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부들, 농사도 짓고 떡도 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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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09일 12: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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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 와서 7년만에 처음 휴가를 갔다. 휴가지는 네덜란드 북해. 그 동안은 휴가가 6주나 되었으나 그냥 집에서 보냈단다. 장기 체류가 불투명해 그저 열심히 일만 했던 것이다.

    7년만의 휴가

       
      ▲81년 8월, 7년만의 첫 휴가. 아이들과 함께. 

    헌데 네가 커서 유치원 다니는 걸 보고 휴가를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한마음조합에서 추진한 여름 휴가캠프에 참여한 것이다. 물론 엄마와 아빠가 너희들은 데리고 휴가를 갈 수 있는 경제적 조건도 만들어진 것이다.

    74년 파독 광부로 와서 결혼하고, 가정도 이루고, 너와 훈이를 갖게 되니 아빠는 가난했던 시절 꿈꾸었던 소원이 다 이루어져 버린 셈이 됐다.

    네덜란드 북해를 향하여 약 300km 정도 달린 후, 큰 배를 차를 싣고 바다를 건너서 제1회 한마음조합 여름캠프 장소인 네덜란드 브레스켄스에 도착했다. 모두들 함성이었다. 커다란 배를 타고 북해를 지나는 기분은 너무 신났다. 아빠는 솔직히 그때가 휴가도, 큰 배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다. 아마 조합원들 다 똑 같았을 거다. 또 20여 명이 함께 휴가를 즐기는 일도 처음이어서 너무 좋았다.

    허나 날씨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안 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것들이 있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었으며, 날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휴가를 즐기면서 동시에 우리 조합의 주요한 과제와 여러 사소한 문제를 함께 열린 공간에서 토론할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 저무 잘 됐다고들 생각했다.

    모두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준비하고, 나누면서 한마음조합의 미래를 설계하는 꿈을 꾸었단다. 교회도 같은 데 다니지, 주말 농사도, 떡도 함께 생산하고 팔지, 이러다 보니 우리 조합원들은 공동체 생활을 느꼈던 거 같다.

    우리는 그렇게 늘 함께 실천하는 체험을 통해서 특별한 사이가 돼버렸으니 처음 가는 여름 휴가가 신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참 그리고 네 동생 훈이가 돌이 지났는데도 혼자 걷지를 못했는데 휴가지에서 드디어 걷기 시작해서 우리를 너무 즐겁게 만들기도 했다. 

       
      ▲함께 휴가를 떠난 한마음조합 회원과 가족들.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총 맞아 죽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재독 동포사회 민주화운동의 중심에 서있었던 유학생들이 귀국을 했다. 하지만 광주민중항쟁 후 동포사회는 침묵의 늪으로 빠진 듯했다. 유신독재 시절보다 더 참혹한 학살을 지켜본 동포들은 몸을 옴추렸고, 소수 활동가들만이 베를린, 프랑크푸르, 루르 지역에서 열심이 뛰었다. 

    또한 70년대까지는 체류권 투쟁을 했지만, 이제 장기 체류가 가능해지자 조금은 안정적인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한마음조합의 조합원들도 장기 체류자가 대부분이어서 장기적 실천사업을 고민하면서 공개적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한마음조합 활동과 떡기계 구입

    주일 예배를 보고 나오는데 강상구 집사님(후에 이 분은 미국으로 가서 목사님이 되었다고 하더라)이 "최형!" 하고 불러서 가봤다. 그는 "한마음조합이 떡 장사를 하면 어떨까?" 하고 내게 물었다. 떡 장사를 하려고 한국에서 가래떡 기계를 사왔는데 혼자 할 수 없고, 자기 사정도 변해서 한마음조합에서 구입한다면 반값에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나는 조합원들고 이 제안을 놓고 상의를 했다. 한데 문제는 그 반값이 돈이었다. 기계 값이 3,000마르크였는데 당시 노동자들의 두 달 봉급이었단다. 이제 막 정착해 가는 중인 조합원들한테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헌데 에발트광산에서 일하는 윤형이 우리들의 고민을 듣고는 그 돈 전액을 이자 없이 빌려줄 테니 한 번 해보라면서 돈을 내놓았다.

    그 윤형은 다름 아닌 79년도 파독광부 체류권 투쟁을 중심에서 했던 분인데 조합원은 아니었단다. 헌데 그 돈은 지하 1200m 광산에서 탄을 캐다가 사고로 척추를 다쳐서 1년 넘게 치료를 받으면서 고생한 후 밀린 봉급으로 6,000마르크를 받았는데 그 중에서 반을 우리에게 빌려준 것이었다.

    떡기계 공장은 오버달하우젠(Oberdahlhausen) 독일인의 집 지하실에 있었다. 마침 가을이어서 바로 가래떡을 만들어서 주말이면 광산기숙사, 지역교회, 한인들의 행사장 등을 떡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팔았다. 그때는 가래떡이 흔하지 않기도 했지만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판매 활동으로 소문이 나서 장사가 잘 되었단다. 물론 조합원들이 공동 노동을 해서 가래떡을 생산하는 과정이 즐겁고 신도 났다.

       
      ▲큰솥 찜통에 쌀을 쪄서 기계로 떡을 빼는데 무척 더웠다.

    밭농사

    어느 날 우리가 김장거리 심을 밭을 구하는데 교우 한 분이, 발트롭에 아는 독일 농장주가 무상으로 밭을 임대해 준다고 하니 가보자고 해서 조합원 몇 명과 함께 갔다. 거리가 좀 멀긴 했지만 농장 주인이 너무 친절했다.

    독일인 농장주는 무상으로 임대를 해주면서 또 트랙럭터가 있으니 밭도 갈아주겠다며, "뭘 심겠냐"고 묻더라. 우리가 "독일에는 없는 한국 무우, 대파, 쪽파, 열무 등등 한국에서 씨앗을 가져와 심겠다"고 했더니 그런 작물들에 대해 궁금해 하는 거 같았다.

    땅이 있는데 우리가 농사 짓겠다니까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곳 농협은 시장을 콘트롤하고, 땅은 국가에서 필요한 만큼 임대해 주는 것 같았다. 김장농사를 위해 여러 통로를 통해서 씨앗을 구해서 주말에 밭으로가 열무, 대파 등을 심었다.

    주말만 되면 조합원들은 뿌린 씨앗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굼해서 밭으로 가서 김도 매고, 솎아주기도 하니 마치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이 생각났단다. 언제부터인가 주말이면 ‘할머니’들이 오셨는데 농사 짓는 우리를 보고 혀를 차며 웃으셨단다. 밭 농사의 전문가들인 할머니들 눈에는 우리가 농사 짓는 게 소꿉놀이 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다.

    웬 할머니들이냐고? 독일 정착이 보장되자 파독 광부들은 아이들을 낳기 시작했는데, 거의가 맞벌이여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지자 이집 저집에서 고향에 있는 어머님들을 모셔왔다. 아빠도 할머니가 한 약속을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고 큰집에 연락했더니 약속대로 할머니가 독일로 오셨다. 종자를 키워 주시겠다고 말이다.

    이렇게 오신 할머니들의 독일 생활은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이었단다. 아빠와 엄마는 교대근무라서 함께 할 시간도 별로 없었고, 텔레비전을 켜도 알아 들을 수 없으니 재미도 없고, 애기를 업고 밖으로 나가려 해도 길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니 혼자 다닐 수가 없었단다.

    이방인들을 접해 보지 못한 네 할머니는 코 큰 사람들 보는 게 무척 겁난다고 하셨단다. 그러나 네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신이 나셨다. 너를 대동하고 나갈 수 있었으니까. 이런 할머니들이 같은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농사짓고, 같은 처지에 있는 할머니들도 만날 수 있고 하니 얼마나 좋았겠니. 할머니들은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그 덕분에 한마음조합 농사도 아주 잘 됐다.

    그해 첫 농사 결과 대파는 잘됐는데 무는 토양이 맞지 않아서인지 벌레 먹고 형편이 없었다. 그래도 할머니들과 우리가 지은 첫 농사라 좀 나은 것들은 추려서 배추를 염가로 팔기도 하면서 김장 장사를 했단다. 재정사업에 도움이 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온 가족들이 모여서 함께 일하면서 신나는 공동체가 굳건해진 한 해였단다. 

       
      ▲밭일을 하면서 같이 먹던 고향맛, 꿀맛의 점심.  

    그동안 한마음조합은 토요강좌를 진행하고, 학습도 진행했는데 교재가 <노동의 역사> 등으로 노동운동과 연관된 책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물론 아주아주 조용하게 열심히 했단다.

    81년 12월 31일. 우리 집 거실에서 한마음조합 전체회의와 송년잔치를 가지면서 82년 사업을 논의했는데 공개적 사업으로 경로잔치를 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내부적으로는 ‘한마음’이라는 조합지를 발행하자고도 했다. 조합이 그동안 가래떡과 김장 판매 사업으로 동포사회에 떡 조합이라는 애칭까지 얻을 정도 인정을 받았으니 더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경로사업을 하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한마음 조합지는 조합원들이 공부하거나 경험하거나 꿈꾸는 이야기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이렇게 82년을 맞이하였단다.

    할머니 독일생활

    내가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거는 독일에서 태어난 너희들이 할머니 시대를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할머니가 독일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난 주말이었는데, 아침을 차려드려도 드시지 않으셨다. 

    "엄니 왜? 아침을 드시지 않어요?"
    "오살놈아! 며느리가 있는데 아들 놈이 차래 주는 밥 먹냐?"
    "아참 어머니, 며느리 밤 근무하고 자요."
    "그려도 그러지, 남편 밥도 안챙겨주고 자냐?"

    할머니는 큰집에서 큰며느리로 큰소리치며 살았는데, 너희 큰엄마와 비교하니 네 엄마가 영 맘에 안드셨던 거였다. 그러나 함께 살고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는 네 엄마를 이해하셨단다.

    파아란 하늘의 5월 어느 날 아침에 할머니를 모시고 고사리가 많은 언덕에 올라갔다. 부안 큰집은 제사가 많은데 제사상에 항상 올라가는 게 고사리 나물이어서인지 할머니는 고사리를 무척 좋아하셨다. 언덕에 가득한 고사리를 보고는 엄청 좋아하시길래 내가 말했다.

    "엄니 이거 내가 키워논 거여!"
    "그래야, 그럼 울타리를 쳐야지 누가 도둑질해 가면 어쩔라고 이렇게 헝어니 놔두냐."
    독일에 고사리가 무척 많은 걸 몰랐던 할머니가 아빠의 거짓말에 속아서 하신 말이다. 나중에 알고는 "저 오살헐 놈이 애미같고 장난쳤구만"이라고 하시더라.

    하루는 일 갔다가 와서 점심 먹고 막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켰는데 북한의 김주석이 인터뷰하는 게 나오자 할머니가 무척 반가웠는지 "아이고 한국 사람이 나왔다. 듬직허니 장군 같다. 근디 누구냐?" 했다.
    "엄니, 북한의 김일성 주석입니다." 했더니 깜짝 놀라시며 "야! 빨리 텔레비전 꺼라!" 하시더라. 부안에서 살면서 상상도 못해본 그 ‘괴물’ 같은 김일성이 듬직허니 장군 같아서 충격이었을까?

    너를 대동하고 다른 집 할머니들을 자주 만나시고, 주말에 농장에서도 함께 농사도 지으시고 하면서 근처 동네에 오신 할머니들과 다 사귀고 나서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셨는지 신나신 거 같았다.
    "야! 다들 딸네 집에 와서 사위랑 살더라!" 할머니는 아들네 집에 사는 게 당당했던 거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할머니는 큰집이 잊혀지지 않아서 매일매일 근심을 안고 사셨다. 그때는 우리 집 뒤가 밭이였는데, 보리가 커오면 "느그 성도 보리 심었능가 모르것다."는 얘기를 하는 등등 보이는 것마다 부안을 연결시켜서 생각했다.

    어느 날은 "아이고, 우리 혜련이는 핵교 잘다닐랑가 모르것다." 하시는데 큰집으로 다시 가시고 싶은
    맘을 억지로 참고 계신 거 같아서 "엄니, 큰집으로 가실래요?" 했더니 금방 "아이고, 오살놈아 보내줄래
    "해서 "예" 했더니 그리 좋아하실 수가 없더라.

    아빠와 엄마는 할머니가 독일에서 오래 사시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할머니가 들으시기에 조금은 서운한 이야기를 한 거 같다. 우리는 "어머니가 훈이를 오래 보듬어주시면 안됩니다. 업어주는 것도 안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우리가 이렇게 얘기하자 할머니는 성을 내셨단다. "내 새끼를 내가 오래 보듬는 거도 안된다. 업는 것도 안 된다. 느그들이 나를 뭘로 보는 것이여."라며 분을 참지 못하셨다. "어머니가 독일에서 오래 우리랑 살수 없는데 가시면 우리가 근무하면서 키워야 하니 어려워서 그럽니다."

    할머니는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이해는 하셨지만 "내 새끼를 즈그들이" 하는 맘은 풀지 않은시는 거 같았다. 고향에 최씨 집안에서 많은 며느리들을 거느리면서 큰소리 치고 사셨는데 큰놈도 아니고 작은놈한테 그런 이야기를 듣다니, 참 말이 아니였던 거다.

    아빠의 어릴 적 추억 속에 할머니는 너희 큰아빠만 챙기셨단다. 고기국이나 생선국을 끓이면 제일 큰 가운데 토막은 항상 큰아빠 국사발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머지 나누었는데 그것도 아들들한테만 주어졌다.
    딸들은 국물만 주었다. 밥도 아들들은 밥상에 딸들은 쟁반에 주는 거다.

    할머니는 자식들한테 늘 "오살헐 놈, 육시럴 놈, 사지를 찣어 간을 내 오독오독 씹어 먹을 놈" 같은 욕을 하셨는데, 그 내용을 알고 하신 게 아니더라.

    독일에 오셨을 때 하루는 "엄니 지금 생각허면 꺼떡하면 ‘오살헐 놈, 육시럴 놈, 사지를 찢어 간을 내 오독오독 씹어 먹을 놈!’ 했는데 그게 무슨뜻인지 알어?"하고 물었더니 "몰라. 그냥 느그들이 말 안 듣고 속상허게 허면 허는 소리지. 근디 그게 뭐다냐?" 허시더라.

    "엄니 잘 들으시오. 자식들은 다섯 번 죽여서, 여섯 갈래로 찢어서, 간을 내서 오독오독 씹겠다는 건데 엄니가 우리를 그럴 수 있어?" "아니 내가 어찌 그러것냐. 말도 안된다. 내 새끼들을 에미가 그런다냐. 조심혀야것다." 하셨지만 가끔 "야! 정규야"가 아니라 좋아도 "오살 놈", 나빠도 "오살 놈" 하시더라.

    할머니는 가실 때도 여전히 큰집만 생각하셨단다. 너희들이 클 때는 모두 어릴 때부터 항상 옷들을 돌려가면서 입었단다. 지금도 애기들의 옷은 비싸지만 그때는 정말 비쌌단다. 그래서 서로 유모차부터 옷가지까지 돌려가며 사용하였단다. 그런데 어느 날 겨울옷 중에서 털 잠바가 왔는데 할머니는 "큰집에 혜련이가 입으면 참 이쁘겠다."하시며 욕심을 내서 드렸다.

    그것만 아니었다. 네 엄마 동창이 이사 간다고 이사짐 나르는 걸 도와달라고 해서 엄마랑 가서 열심히 짐을 옮겼다. 그때 네 엄마 동창이 "미스타 최! 이거 가져가세요. 우리 양반은 이게 보약이 아니라 독약이 되거든요."하면서 ‘생삼을 꿀에 재 놓은’ 를 내밀면서 " 엄니가 만들어서 주었는데 한 5년 되었어요." 서 받아왔다. 

    네 할머니는 그걸 보시고 "야,느그 큰 성 면 좋겠다" 하시면서 그것도 가지고 가셨단다. 참 재미있지 않냐? 다른 분들은 담아와서 챙겨주던데 때에 너희 할머니는 챙기는 게 아니라 그렇게 가져가시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단다. 왜, 큰놈만 있으면 되니까!

    아빠는 할머니가 왜 그리도 큰 아들, 그리고 큰 손주들만 챙기셨는지 무척 궁굼했단다. 91년도 귀국했을 때 네 할머니한테 물었단다.

    "엄니, 어찌서 큰아들 허고, 큰집만 그리 챙겼대요?"
    "기둥이 튼튼혀야 혀, 큰집이 기둥이여, 느그 큰성이 기둥이랑게 몰라! 오메가 없어지면 큰성이 기둥이다. 그런게 큰성한테 잘혀! 큰성이 잘되어야 느그들도 힘이 생겨, 알것냐!" 허시드라. 한국적 상황에서 네 할머니는 정확하게 생각하신 거였다.

    그 할머니 생각대로 이루어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고향에 갈 명분도 있고, 아빠의 집안의 구심은 할머니의 뜻대로 부안의 큰아빠로 되어서 너무 좋단다.

    경로잔치

    한마음조합은 송년모임에서 경로잔치 봄에 하기로 해서 준비를 시작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연락처를 모아 초청장을 만들어 발송하고, 음식도 준비했다. 82년 4월 24일. 경로잔치 마당을 보쿰교회 별관에서 치렀는데 대성황이었다.

       
     

       
      ▲경로잔치에서 즐겁게 노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우리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신나게 추면서 가슴에 쌓인 회포도 푸셨다. 한마음조합은 경로잔치와 가래떡 장사, 김장 장사 등을 통하여 이 지역의 동포사회와 가까워졌다. 지역 동포들도 한마음조합에 관심이 많아졌다.

    회원들은 80년 광주민중항쟁 후 아주 비정치적 실천 활동을 하면서 공동노동과 학습, 세미나를 통해서 내부도 튼튼히 하고, 대중들과 호흡을 함께하는 여러가지 행사를 통해 신규 조합원들이 늘어나서 보람도 많이 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는 솔직히 힘들었다. 학습 조는 멀리 흩어져서 만나기가 힘들었고, 큰 힘이 되었던 이삼열 박사도 귀국하고, 광주민중학살까지 자행되니 앞이 캄캄했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막 만들어진 한마음조합이 정말 단결하여 모두가 열심히 열심히 했던 거 같다. 광주민중학살을 보고 살아있는 우리가 뭔가는 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동포사회에 대중성도 얻어가자 장성환 목사님도 적극 지도와 후원을 해주셨다.

    헌데 한마음조합은 대중운동으로서 적극 활동하게 되니 정치적인 활동에는 제약이 따랐다. 아빠는 한국의 노동운동과 연대하는 국제연대투쟁을 적극적으로 할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 한마음조합에 몇 번 제안하고 논의를 했지만 현재의 조합으로 가자는 의견이 다수여서 고민에 빠졌다.

    83년 한국에서 온 자료를 보던 중에 81년 12월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가 한국에서 발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빠는 내 맘속에 전태일 동지가 뜨겁게 뜨겁게 부활하는 감동을 받았다. 이 독일 땅에 전태일동지를 어떻게 부활하게 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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