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색은 지역주의도 하방도 아니다”
    [독자투고] 김종철-장석준 글을 읽고…녹색사회주의를 위해
        2012년 05월 21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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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누구나 녹색을 말한다. 다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녹색은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확실히 뿌리내렸다. 우리에게 녹색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녹색을 주장하는 글은 많았지만 정작 녹색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글은 손에 꼽는다.

    가장 최근에 나온 글로는 김종철-장석준이 함께 쓴 “새 진보좌파정당은 노동-녹색 정당”이 있다. “노동-녹색정당”에서 비록 그들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도 확연하다. 이 글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녹색은 전통적 사회주의의 비판적 극복이다.

    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녹색은 “자율성의 회복”이다. 자본주의는 탐욕과 이윤이 인간을 대신하여 행세하는 시대이다. 따라서 녹색사회주의의 궁극적인 임무는 인간의 행위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끊임없이 소외되는 현상을 극복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제로서 인간의 자기결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허물어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과거 국가사회주의가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회주의는 다양한 억압으로부터 발생하는 여러 가지 저항 형태들을 계급투쟁의 모델 안으로 끼워 맞추려는 경향을 가져왔다.

    비록 사회가 계급으로 분할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동의하지만 그 분할이 모두 계급적대로 치환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맑스주의는 이 분할 형식의 다양함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녹색은 다양한 분할 형식을 전통적 사회주의 정치에 포괄하려는 재구성의 노력이다. 그래서 녹색은 새로운 주체형성이다. 그래서 박-장은 “……비정규직 등 다양한 노동주체들이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노동운동”을 언급하고 있다.

    이 새로운 노동주체가 다름 아닌 비정규직과 돌봄 노동자를 포함하는 사회서비스 노동자이다. 특히 돌봄 노동은 노동문제와 더불어 젠더의 문제까지 얽혀 있다는 점에서 더욱 녹색과 가깝다. 이미 진보신당은 비정규직 운동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고 있다.

    2. 젠더는 녹색의 중심 범주이다.

    흔히들 녹색이라 하면 생태민주주의를 떠올린다. 녹색사회주의는 생태민주주의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더욱이 여기서 말하는 녹색은 생태민주주의를 경유하여 좀 더 나아간다. 즉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여러 가지 “적대”적 모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젠더나 인종문제까지 포괄한다.

    계급문제는 자본주의 때문이며 환경문제도 주로 자본주의 때문이다. 그 중에서 젠더 문제는 더욱 특별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계급적 지배보다 더 오래된 ‘지배의 원형’을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물질적 이해와 결합되어 있는 남성주의적 지배 이데올로기가 “권력에의 욕망”이라면, 페미니즘은 그것에 대한 해제를 제시한다는 측면에서, 특히 한국의 운동사나 정치지형을 고려해 볼 때 가부장적 문화와의 대결을 제기한다는 측면에서 젠더는 녹색의 중심 범주이어야 한다.

    우리 운동의 조직문화는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이다. 이것은 단지 노동조직 내의 성차별과 간헐적으로 터지는 성폭력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조직 내에서의 위계적인 질서로 나타난다. 조직논리에서 이것은 곧잘 임금이나 직업, 성별 등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는 우리사회의 가부장적인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노동조직 내에 오랫동안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NL적 조직성향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동시에 이 조직문화는 계급=당=국가=수령이라는 스탈린주의가 전근대적 가부장주의를 만나 변해버린 북한 정치체제까지도 맞닿아 있다.

    흔히들 좌파진영의 조직문화가 지나치게 일 중심적이며 메마른 인간관계를 지향한다고 우려한다. 물론 좌파진영의 사람들이 메마른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의 저편에는 사람 사이의 끈끈함과 의리, 사랑, 우정과 같은 감정들은 좌파가 가져서는 곤란한(?)덕목이라고 과잉 해석했던 지난 시절 운동이 나은 관념들이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NL진영이 전유해버린 “품성” 에 대한 반작용도 있었을 것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사람중심주의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NL진영의 조직문화는 인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고 덕분에 지금까지 시대착오적인 노선을 가지고도 살아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사회주의 이론보다는 의리와 상식, 그리고 무엇보다 인맥에 의해 생겨나는 위계적 질서, 배타적인 공동체주의는 인간주의와 비민주성을 내부에서 발생시키게 되고 필연적으로 우경화를 초래한다. 또한 인간해방을 사유하기보다는 조직의 확장에 치중하는 선전선동에 치우쳐 있는 주체사상은 실용주의의 길을 걷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노동/당 운동의 조직은 NL의 실용주의와 함께 가부장적 조직문화의 부작용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통합진보당의 문제는 결국 이런 부작용의 표출이다. 젠더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다. 녹색은 억압받는 여성(그리고 지배당하는 남성들까지)의 자율성 회복운동이다.

    박-장이 자신들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녹색과 사회주의는 잘 만나지지가 않는다. 그것은 이론적으로도 사회주의가 아직까지도 스탈린주의의 포로였던 지난 시절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지 못하고 있고, 계급 적대와 더불어 젠더, 인종과 같은 사회의 다양한 분할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규명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계급 적대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그래서 더 체제내화 된 성차에 의한 적대는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는 “상식”에 의해 끊임없이 희석되지만 계급 적대로 환원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급 내에서의 여성, 인종 등의 적대는 이 사회의 계급적 분할을 뒤틀고 전복시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저소득층은 환경적 재앙은 물론이고 사회적 억압에 대한 가장 예민한 피해자가 된다. 노동자도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지역의 돌봄 노동을 하는 여성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이처럼 젠더는 사회적 분할의 또 다른 분할선을 그려낸다.

    이렇게 젠더는 계급 적대와 뒤엉켜 있고 젠더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급과 젠더가 관계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사회의 실재들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다양한 문제들의 중층적인 구조라고 가정하였을 때 여성이 경험하는 사회적 억압이나 배제를 단지 하나의 문제틀로 위치 지울 수 없다. 적대가 교차하는 방식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분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녹색은 지역주의도 ‘하방’도 아니다.

    “녹색”은 사회주의가 생태와 페미니즘을 단지 “고려”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이유로 사회주의자가 소위 “하방”하여 지역협동조합을 하나 더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녹색은 사회주의 운동 내부로부터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녹색은 단순히 지역화를 의미하지 않으며 지역정치를 중앙정치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기존의 일부 협동조합 활동가들이 그랬듯이 기존의 당/노동운동과 대립하면서 만들어가는 소시민들의 공동체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녹색은 탈정치화 된 협동조합과 노동조합을 정치화시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비판적 지지는 그 조직 내부의 다양한 정치적 요구들을 억압한다는 사실만으로 비민주적이다. 이를 몇 년간 유지시켜 온 것은 이미 그들이 자신의 행위가 조합주의적 이해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런 조직문화는 결국 다른 조직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내부를 향해 움츠러드는 자폐적 조직이 될 수밖에 없다.

    지역도 지역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파편화되고 있는 비정규직, 돌봄 노동자들, 넘쳐나는 산업예비군을 조직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협동조합이 있지만 지금의 협동조합의 일부는 중산층 중심의 웰빙 운동으로 전락하거나 기업화되어 간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협동조합운동의 일부가 권력화 되어 가는 이유도 바로 배타적 조합주의와 관련 있다.

    노동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은 이같이 조합주의로 인한 탈정치화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노동운동, 당운동, 협동조합이 조합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각 조직 간의 연대를 위한 정치조직, 이를테면 연대회의 같은 방안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배제된 자, 자본주의와 그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들이 노동운동, 협동조합, 진보정당운동 속에서 생겨나야 할 것이다. 이것이 노동중심성을 잃지 않고 동시에 노동운동지상주의, 협동조합지상주의를 이겨내는 방법이다.

    4. 다양한 정치조직을 건설하자.

    난 개인적으로 흔히들 말하는 신사회운동을 지지하지만 이에 대한 서구적 해석을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도입하려는 시도는 반대한다. 신사회운동은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를 포괄하지만 또 그만큼 노동문제에 집중해야 하는 우리 현실과 멀어질 수도 있다.

    우리의 실상은 훨씬 더 심각하다. 자본주의 체제가 버린 “배제된 자”에 대한 거의 없는 것과 같은 복지, 복지국가는 상상도 못할 억압, 넘쳐나는 국가주의. 이 피폐하고 절박한 나라에 노동중심성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의 노동중심성이 “조직된 정규직 노동”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노동중심성과 녹색 둘 중 어느 한 가지도 잃을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당과 노동을 망라하는 다양한 정치조직의 건설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각종 연구소부터 활동가들의 모임, 의견그룹, 지역 정치커뮤니티 같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싱크탱크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좌파적 시각을 제공하고 그것을 정치적 의제로 만들어가는 역량을 조직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그것이 연구소의 형태가 됐든, 기획사 형태가 됐든 상관없지만 중요한 것은 (적녹보흑의 연대뿐만 아니라) 연구자들과 활동가들 간의 연대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연구자들, 연구자들의 성과들은 활동가들의 행위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며 활동가들 사이에 만연한 반지성주의를 돌파해 나갈 대중적 언어를 개발하지도, 충실한 이론적 역할을 해 내지도 못하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좌파이론을 전공하는 연구자가 생존문제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문제를 당이나 노동조직, 혹은 협동조합을 통해서 공동으로 풀어가야 할 과제로 삼아야 한다.

    둘째는 상시적 교육기관이다. 그 동안 진보신당 내에서 이렇다 할 당원 교육이 없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요즈음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녹색-노동” 혹은 “녹색사회주의”가 몇몇 지식인의 선언이 아니어야 한다면 그것은 교육과 토론을 통과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요즘 공부모임이 하나 둘씩 만들어지지만 과연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당에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가 생기고 연구자들과 활동가들을 망라하여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은 의회정치에 개입하기 위하여 더 넓은 외연을 가진 대중노선을 선택해야만 하고 동시에 강력한 조직력으로 좌파적 의제를 제도권정치에 가지고 들어가는 대중정치인을 제어해야만 한다.

    지난 몇 년간의 진보신당의 경험을 “의회정치에 대한 개입”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의회정치로의 개입은 대중정치인을 당 조직이 통제하고 있을 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대중노선과 당 조직의 통제력 강화는 완전히 정반대의 요구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중적인 임무는 결국 녹색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다양한 층위의 정치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요구한다.

    필자소개
    진보신당 경기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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