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진보세력, 현실보다 이념 집착 민주, 사회-노동쪽 장관 진보에 줘야
    2012년 01월 03일 11: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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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장집 명예교수. 

복지 논의에 자유주의적 가치 빠져있어

– 선생님께서는 민주주의가 포착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를 자유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포착하고, 문제의 해결과 극복의 가능성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

= 개인의 인간적,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문제다. 인간 개인의 존엄성, 개인의 자유, 개개인의 평등한 인권,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은 자유주의의 핵심 요소들이다. 민주주의가 됐다고 해서 이런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해결되거나,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민주주의가 잘 작동만 된다면, 노동문제나 사회경제 문제가 크게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집단적 틀 내지 집합적 틀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국가가 중심이 되는 매우 관료적이고 온정주의적인 방식을 동반한다.

복지국가, 복지체제를 예로 들어보자.민주주의의 방식으로 복지국가를 제도화할 수 있다. 즉 정당들이 결정해서 법으로 만들어, 복지예산을 증대하고, 이를 국가가 중심이 돼서 운영하고, 복지혜택이 복지행정기구들을 통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회계층과 집단들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복지체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체제는 사회경제적 측면의 생활의 필요를 일정하게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개인의 존엄성, 자기존중, 긍지를 손상하지 않고, 얼마나 그것을 함양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이다.

자유주의는 복지가 민주주의적으로 실현될 뿐 아니라, 앞서 말한 자유주의적 가치를 충족시켜야 할 것을 요구한다. 이 점에서 시민권의 의식은 중요하다.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복지의 권리는 개인의 존엄성과 도덕적 자율성을 충족시키는 것을 중심 요소로 한다.

복지는 개인의 존엄성을 위해 윤리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국가와 사회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라는 의식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가치로부터 나온다. 요컨대 지금 논의되고 있는 복지논의에서 이러한 자유주의적 가치, 요소는 빠져있다. 그냥 국가중심적인 복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보다 이념에 집착하는 운동 세력들

– 정치 현실주의자로서 현실 문제를 분석해온 선생님께서는 진보의 미래 전망에 비관적 정조를 가지고 계신 것 같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서 노동을 중심 주제로 삼았으며, 노동 있는 민주주의, 노동 있는 정당 체제를 강조했다.

진보정당 내부에는 민족주의 계열도 있지만 노동을 중심에 둔 쪽도 있다.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대한 평가보다는 민주당과 노동운동의 결합에 주목하는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이와 관련돼 코포라티즘을 강조하시는 것 같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봤을 때 민주당이 사장 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인 노동 세력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을 탈바꿈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 그에 관해 말하기 전에 우선 노동을 대표한다고 자임하는 노동운동 세력이나 진보적 정당들이 내게는, 노동자들의 생활 향상에 진력하는 것을 진보의 가치로 삼기보다 추상화된 진보이념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현실에 기초하기보다, 바깥의 이념을 한국 현실에 들여와서 이를 현실에 부과하려는 경향도 강하다. 결국 노동문제를 이념의 틀에서 접근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인데, 그와는 달리 나는 노동 문제를 민주주의 틀에서 접근한다.

알다시피, 민주주의는 투표자들이 개인으로 평등하게 투표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세력들이 각기 스스로의 의사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결사체를 만들어서 집단으로 투표하는 것을 허용하는 체제이다. 말하자면 노동자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투표할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노동자라는 집단으로 투표한다.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를 위한 좋은 체제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다른 체제에 비해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해 좋은 체제이다. 노동과 같은 소외세력이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고 세력화를 해서 자기 의사를 대표시켜 정치과정에서 주요한 플레이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집단이면서 수적으로도 많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노동운동이 제대로 전개된다면 노동운동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

서유럽의 국가들이 이를 잘 보여주는 경험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민주주의의 제도와 작동원리를 기초로 해서 노동문제를 접근하기 때문에, 이념적 진보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과는 노동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동안 나는 “부분체제”(partial regime)라는 말을 통해 노동문제를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런 뜻이다. 우리가 민주화를 말할 때 그것은 정치체제가 민주화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이 민주화됐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 한국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고 해서 노사관계가 민주주의적이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 말고 다른 생산자 집단의 경우나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분체제라는 말은 하나의 체제는 여러 부분 체제로 구성돼 있으며, 그 가운데 노동이 가장 중요한 부분 체제라는 점을 전제로 깔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코포라티즘이라는 말은 이 부분체제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기업 내지는 자본과 노동이 서로 타협하고 합의해서 공통 지점에 도달하고, 노사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합의를 통해 공동으로 결정하는 틀, 내지 제도를 뜻한다.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현실에서 노동이 추구할 수 있는 이상적인 모형이라고 생각한다.

노동, 가장 중요한 부분체제

진보정당이 노동을 잘 대표하고 정치적 영향력도 갖게 되어 이런 방향으로의 변화를 이끌면 좋겠지만, 내가 보기에 많은 진보세력들은 이런 변화를 긍정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럴 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다. 진보정당이 집권하고 사회주의나 사민주의가 되지 않으면 노동문제를 해결 못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부분체제나 코포라티즘은 보수 우위의 정당체제에서도 노동문제를 진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한 개념들이다.

나는 민주당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 진보적이 되고 싶고 진보세력과 연합해 집권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노동정책이나 사회정책 분야의 장관을 진보정당이나 노동운동의 대표자들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처럼 국회의원 공천 몇 자리 가지고 노동대표 운운하는 정도는 과거 권위주의 때도 했다. 내가 부분체제나 코포라티즘을 말할 때는 대략 이런 뜻이다.

– 80년대 젊은이들이 ‘민주화’의 주력군으로 정치의 중심에 선 이후 다시 젊은 세대들이 ‘한국 정치 변화의 진원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들에 의한 정당체제 개혁의 외부 충격 가능성도 거론하셨다.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국의 정치 현실은 이제 운동의 힘이나 외부의 충격을 통해 정치가 크게 변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씀하신 것과 비교해보면 젊은 세대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계신 것 같다.

민주화 이후 25년의 기간이 흐른 후 성장의 그늘, 성장의 모순의 결과 이와 같은 현상을 야기한 것으로 해석하시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성장의 모순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최근 강조하는 자유주의 이념은 이 문제와 연관이 있나?

= 최근의 젊은 세대 문제는 과거와는 달리 학생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 아니다. 먼저 젊은 세대들의 정치적 태도, 즉 투표 정향이 두드러졌다. 나는 이 점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들이 정치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고, 그런 것이 투표율 증가와 특정의 정치 정향으로 나타난 것은 과거에 비해 발전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내용적으로도 젊은 세대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긍정적으로 본다. 과거 학생운동은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문제 때문에 정치적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젊은 세대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태도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본다.

386세대 실패한 이유

1980년대의 젊은 세대들은 운동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이 세대들의 역할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보수적인 권위주의적 질서를 타파하는 주체는 학생들이었고, 그들이 아니면 민주화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중심이 돼 이런 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는데 이는 그들의 역사적 역할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이들이 운동을 통해 정치에 참여했을 때 사회경제적 이슈는 그들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386이라는 혁명적 세대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왜 사회경제적인 변화가 없었을까.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들은 사회경제 문제를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대부분 안정적인 중산층이고, 사회의 엘리트층이었다. 386세대들이 민주화 운동을 끝내고 사회에 들어왔을 때 사회경제적 이슈는 자신들의 생활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학생들은 진짜로 자신들의 생활 문제가 정치적 관심사의 중심이 됐다는 점에서 앞선 세대와 차이가 있다. 최근에 지방의 한 복지센터에 가서 기초생활 수급자와 차상위자 등 빈곤층과 대화를 할 시간이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이 그때는 자기희생적으로 헌신을 했는데, 왜 정치에 들어가서는 아무런 역할을 못했나?”라는 질문을 했다. 뼈아프지만 정확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했다.

민주화 이후 386세대들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 들어가서 중심 세력이 됐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는 사실상 정책 결정과정의 중심적 지위에 있었으면서도 다른 기성세대와 차이가 없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 사람들은 노동, 빈곤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역할을 했다. 기존 정당들의 성격과 태도 변화에도 386세대들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안철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

내가 안철수 씨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보수나 진보와 무관하게 우리 사회의 핵심적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 때문이다. 현재의 젊은 세대들은 취업과 실업 등 노동시장 문제가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적 환경에서 좌절하고, 고통받고 있다.

안철수 씨는 이런 문제에 공감했고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각성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물론 그가 앞으로 정치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수준에서 제도화되고 심화되면 필연적으로 사회경제적인 문제들을 자극하게 되는 변화가 뒤따라 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386세대가 이러한 문제를 촉발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처한 환경은 앞선 세대들과 다른데, 그들이 중요하게 제기하고 있는 것은 경쟁의 공정성, 즉 성과(merit)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절차적 수준에서의 공정성의 문제로 보인다. 그에 비해 노동문제, 양극화, 생산체제, 성장정책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이걸 해석하고, 그에 대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정치인과 정당이 해야 할 일이다. 젊은 세대들이 그 문제까지 다 할 수는 없다.

사회경제 문제가 부각되면 좌우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중요해진다. 경제적 대안과 비전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정책대안의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도 거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바로 여기서부터는 정당이 해야 할 역할이다.

세대문제, 신자유주의 부정적 효과 과도하게 강조

– 선생님께서는 오늘의 세대 문제가 노동 문제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며, 젊은 세대들이 자기들의 목소리로 그런 문제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의 긍정성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교육 문제가 깔려 있다고 보시는 것 같다. 세대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좋을지, 해법은 무엇인지 말씀해 달라. 세대, 노동, 교육을 세트로 묶어서 봐야 하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을 정리해 달라.

= 진보파들은 세대 문제를 이해할 때 너무 신자유주의의 부정적 효과만 강조하는 것 같다. 나는 그렇게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세대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부정적 결과가 한 요인이지만 동시에 정부의 지식정보 산업 정책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고, 또 경제발전과 소득수준이 향상된 결과의 측면도 있으며, 인구 구성상의 변화도 작용하는 문제이다. 오늘날의 세대 문제는 이렇게 여러 변수가 작용을 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생산 체제의 결과이다.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한 유럽을 보자.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의 핵심이 노동시장 유연화라고 하겠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사회보장 제도를 해체하고, 경쟁을 가열화하는 정책들과 맞물리면서 지금 젊은 세대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취업난, 고용조건의 악화와 같은 부정적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만이 아닌 것은, 사민주의적 사회복지체제가 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강화하는 것과 병행해서 제도화되었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신규 취업이 줄어들고 비정규직 규모가 커지는 등, 기존 노동조합이 보호해줄 수 없는 범위가 커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는 젊은 세대의 고용 기회를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기술발전과 함께 전통 제조업이 없어졌고, 지식정보 산업과 자동화를 통한 노동인력 절감 테크놀로지가가 발전됨으로써 생산성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그리고 중국의 산업화는 세계 노동시장에서 값싼 노동력을 대량 공급할 수 있어, 선진산업국가에서는 전통적인 제조업산업이 때 이르게 폐기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경제는 성장을 해도 고용이 증대되지 않는 현상이 만들어졌다.

또한 사회 발전, 기술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연령 사이클이 중첩됐고, 이에 따라 윗세대가 자리 잡고 있는 곳에 젊은 세대들이 뚫고 갈 기회가 더욱 희박하게 돼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이는 교육과 노동시장이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세대론 접근법의 문제점

직업 교육의 중요성은 커지는데 우리의 경우 직업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식의 일반 교육 체제가 더욱 심화되면서 고졸과 대졸을 일렬로 세워 경쟁을 시키기 때문에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노동시장이 다층화 돼서 다양한 영역으로 인력이 분산될 수 없기에 과도한 경쟁에 젊은 세대들이 내몰리는 상황이다.

미국과 동일한 일반교육 중심 체제를 가지면서도 한국의 노동시장은 미국과 달라 무척 협소하기 때문에 경쟁은 더 가열화 된다. 노동시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됐으며, 노동시장에서 채용은 주로 비정규직 중심으로 이뤄지며 대졸자들은 갈 수 없는 입장이다. 노동 시장의 수요 공급의 미스매치에 따라 청년실업과 중소기업 인력난이 병존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시장 문제, 교육 전반의 문제 같은 핵심 정책을 개혁하는 일은 정당의 역할이고, 리더십의 문제가 아닌가한다. 이러한 문제는 선거경쟁에 나서고, 집권을 추구하는 정당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 가지, 세대 문제를 독립적인 사회 집단으로 인식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는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의 사회계층과 그에 따른 투표행태를 청년과 중년 노년 등, 연령 집단으로 분류하는 문제는 과학적인 것이라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같은 세대 안에서 계층문제가 존재하는 것을 간과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는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놓인 시대적/시간적 차이가 간과된다. 오늘의 젊은 세대의 문제는 21세기의 문제이지, 민주화운동이 있었던 1980~90년대의 문제가 아니다. 그때의 젊은 세대와 지금의 그들은 무척 다른 사회경제적 조건에 있다.

강한 운동, 약한 정당 제도화는 동전 양면

– 선생님께서는 “정치와 운동, 양쪽이 모두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말은 양쪽 모두가 강점과 문제점을 갖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하지만 정당 정치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고 계신 것으로 평가 받는다. 일부에서는 정당을 과잉 강조하고 사회운동을 폄훼한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 민주주의가 일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운동이 중심적인 요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나 제도, 정부가 어떻게 운동을 통해서 작동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제도가 작동하는 문제이고, 그 제도를 작동시키는 규칙과 절차 그리고 그런 것들을 움직이는 행위자들의 문제이다.

운동은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사이에서 혹은 제도가 작동을 안 하거나 현상 유지를 위해 제도가 엘리트 중심으로만 돌아간다든가 하는 경우 변화를 요구하면서 제도권 밖에서 제도 안의 행위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치냐 운동이냐를 양자택일적인 것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에서 운동의 역할은 크다. 진보 정당이든 개혁 정당이든 그동안 제도권 밖에 있었던 소외세력이 중심이 된 운동을 언제나 전사(前史)로 가지고 있다. 정당은 이러한 운동이 제도 안으로 수용된 것이다. 기존의 폐쇄적 엘리트들이 운동을 제도 안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정치의 참여 폭은 그만큼 넓어졌다. 항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변화가 요구되는 때에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운동의 전통이 강하고, 운동의 영향이 큰 나라이다. 이는 기존의 정당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치참여의 폭을 넓히지 못한 결과다. 많은 수의 정치참여 희망자들이 제도권 밖에 남겨져 있다. 이들은 운동의 형태로 제도권 정당의 참여 폭을 넓히라는 공격적으로 요구한다. 한국사회에서 운동이 강하고, 영향력이 큰 것과, 정당의 제도화 수준이 낮은 것은 동일한 현상의 다른 측면들이다.

운동, 지나치게 강조하면 역효과

하지만 민주주의는 평상시 제도가 작동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싶다. 운동이라는 것은 복잡한 정책을 만든다든가, 정치의 기술을 시현하는 리더십을 창출한다든가, 국가라는 방대한 조직을 이끄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운동으로 권력을 운용할 수는 없다.

운동은 사회적 요구를 정치과정, 정책결정 과정에 투입(input)하는 데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정책을 만들어내는 산출(output) 과정에서는 별로 기여할 것이 없다. 운동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운동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운동에 대한 강조는, 그것과 동반하는 어떤 혁명적 정조, 거대한 변화에 대한 급진성을 불러들이는데, 그것이 민주주의의 가치와 얼마나 병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조르주 소렐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계급의식을 위해 총파업해야 된다는 정조를 불러들이기 쉬운데, 민주주의 시대의 분위기와는 잘 맞지 않는다.

정당과 운동의 관계에 대해, 막스 베버의 이론을 빌어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즉,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이념과 가치를 들고 나오는, 그래서 변화를 상징하는 카리스마의 등장이 중요한 요인이다. 일상화된 관료 조직이나 집단, 또는 정당과 같은 제도화된 형태로는 이런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다.

하지만 변화의 동력이 되는 카리스마는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위계적인 정치동원 조직으로서 ‘머신(machine)’이 필요하다. 변화를 실현시키는 장치로서의 머신은 양면성이 있다. 그것이 현상유지에 기여하는 제도화된 형태이기 때문에 부정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이 없으면 변화의 요구를 실현시킬 방법이 없다.

운동,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동학혁명이나 해방 이후 민중봉기, 민주화운동 등 거대한 사회 변화과정에서 운동은 중심동력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실제로 무엇을 이루어냈느냐, 그 많은 희망과 열정, 강렬한 에너지의 분출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뤄낸 것을 별로 없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 

그러한 밑으로부터의 운동은, 그람시가 말한 ‘수동혁명’을 가져오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운동의 주체가 스스로 중심적인 플레이어가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 진보파의 경우 운동적 경향이 강한데, 이들의 약점은 권력의 본질을 이해하고 운영하는 문제에서 나타난다.

진보파는 권력을 가지면 갑자기 무능해진다.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운동을 비판하고 정당을 강조한다면, 내가 정치적인 현실주의를 말한다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시하는 데만 열정을 쏟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조금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변화를 이루어내는데 직접 주체가 되는데 열정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운동을 반드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 안에는 엘리트 중심적 성격도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 대해 지적할 수 있다. (최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에서 “민중운동이 마르크시즘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지만, ‘만다린’(전통 유교사회에서의 관료사대부계층) 문화라 말할 수 있는 지식인 엘리트주의는 민중운동 지도부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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