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만한 영화에 내가 실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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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1월 01일 05: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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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 내용 가운데에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영화의 한 장면 

25년 전의 두 사건

지난 해 5월 말 전혀 예상치 못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상대방은 무슨 영화사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며, 자신들이 최동원과 선동렬 선수의 세기의 대결을 소재로 한 야구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8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뉴스로 보도되는 장면을 사용하고자 하니 이를 허락해달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영화라면 박종철이라는 실명이 나오는 게 박종철 열사에게 전혀 누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되어 흔쾌히 허락했다.

그 영화는 2012년 초쯤 개봉 예정이라고 했다. 2012년 1월 14일의 박종철열사 25주기를 준비하는 데도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감도 들었다. 또 이렇게 사전에 허락을 구하는 모습도 좋아 보였다. 영화가 만들어지면 꼭 보겠노라며 잘 만들어서 대박을 터뜨렸으면 한다는 격려의 말도 전했다.

25년이면 사실상 한 세대가 흘러간 세월인데… 전화를 끊고 나서 25년 전 87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당시 나는 대학 4학년 제적생이었고, 학생운동 관계로 경찰에 수배 중이었다. 그 해 1월 화곡동에서 숨어 살던 중 친구 박종철의 고문사에 대한 소식을 <중앙일보> 석간을 통해 접하고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야만 했다. 그리고 6월 민주항쟁, 16년 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으로 이어진 87년은 말 그대로 격동의 한 해였다.

나는 원래 스포츠, 특히 야구를 대단히 좋아하는 편이다. 마침 고등학교도 야구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천안 북일을 나온 관계로 고교시절에는 야구장도 많이 찾았었다. 그랬던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는 단 한 번도 동대문 야구장을 찾지 못했다. 학생운동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최동원, 선동렬 선수를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수배 중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방편(표식)으로 스포츠신문을 자주 사용했으면서도, 그 5월 16일의 세기의 대결에 대한 기억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실망스런 영화, ‘퍼펙트 게임’

지난해 12월에 들어서자 12월 21일에 마침내 ‘퍼펙트게임’이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미 최동원 선수가 고인이 되면서 ‘퍼펙트게임’에 대한 대중적 관심도 높아진 상황이었지만, 나에게는 또다른 이유에서 이 영화가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사회인 야구를 시작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데다 바로 친구 박종철이 등장하는 영화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정치에 빗대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야구동호회 ‘레드빠따쓰’의 육 감독님께 연락을 해서 이 영화를 함께 보자고 제안했고, 크리스마스 연휴에 보려다가 예약에 실패하면서 그 다음 주 초에야 50대의 떠오르는 에이스를 포함해 모두 3명이 영화관을 찾았다.

   
  ▲87년 1월 박종철 추모제.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참으로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언제 박종철이 나오나 긴장하며 집중했건만, 끝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관련된 장면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흐름상 정치부에서 스포츠부로 쫓겨난 김서형 기자(최정원 분)가 다른 사람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내가 그만두면 그만뒀지 스포츠부로는 못가!”라며 호기를 부릴 때 쯤에 이 사건의 진상 규명 투쟁 관련 뉴스보도가 나오고 그에 대한 대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추측컨데 최종 편집과정에서 삭제된 모양이었다.

‘2시간이 넘는 대작(?)임에도 이렇게 빠지다니!’하며 서운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지만,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구나’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진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볼 만한 영화, ‘퍼펙트게임’

그럼에도 ‘퍼펙트게임’은 몇 가지 점에서 참으로 괜찮은 영화였다. 야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영화임에도 당시의 시대상을 최대한 담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일 뿐만 아니라, 15이닝 완투 대결 끝에 무승부로 끝난 문제의 최동원 선수와 선동렬 선수의 대결이 성사된 배경에 위기에 처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음모가 있었다는 설정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스포츠 역시 정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박만수 선수(마동석 분)의 인간 승리와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가족애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15이닝 무승부로 끝나며 연출되는 사직구장의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롯데 팬이 선동렬을 연호하고, 해태 팬이 최동원을 연호하는 상황에서 두 선수가 뜨겁게 악수하는 장면은 스포츠를 통해 우민화를 시도하는 군사정권의 의도를 무슨 이론이나 논리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타고난 정치적 감각으로 뛰어넘는 일반 민중(야구팬도 당연히 민중의 일부이다)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정치부에서 스포츠부로 쫓겨 오자마자 “프로야구는 정권의 우민화 정책인 3S정책의 일환으로 운운”하는 기사를 써서 담당 부장한테 “내 목 날아가는 거 보고 싶어 네가 환장을 했냐!”며 혼나던 김서형 기자가 야구의 참맛을 비로소 느끼고 이 땅 민중의 위대함을 야구장에서 목도하면서 느꼈을 그 환희와 감동도 내가 느낀 그것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영남의 최동원과 박종철 vs 호남의 선동렬과 이한열

나는 영화를 마치고 나오면서 퍼펙트게임의 최동원과 선동렬, 6월 민주항쟁의 두 영웅 박종철과 이한열을 떠올리다가 ‘이거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기가 막힌데?’라며 탄성을 질렀다. 최동원 선수와 박종철은 같은 부산 출신이고, 선동렬 선수와 이한열은 같은 광주 출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부산의 최동원과 광주의 선동렬이 퍼펙트게임이라는 야구영화를 통해 87년 5월 16일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두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다면, 부산 출신의 박종철과 광주 출신의 이한열은 이미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지역과 계층,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국민이 하나되어 군사독재정권에 승리했던 그 위대한 87년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이자 도화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영화 포스터. 

영화관을 나오면서 레드빠따스 육 감독님이 한 말씀하신다.
“이 영화 2012년 한국정치가 어디로 갈 지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드세요? 이제 지역주의에 기반한 세력은 물러가고 동서화합을 이룰 수 있는 세력이 집권할 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겠죠?!^^”

영화, 정치와 스포츠 사이

나는 얼마 전 이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박종철인권장학금 시상을 위해 박종철 열사의 모교인 부산 혜광고에 다녀오다 좌석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KTX 영화상영 칸에 타게 되었는데, 하필 이미 본 퍼펙트게임이었다.

그런데 "시간 관계로 실제 상영관과 다르게 편집됐다"는 안내가 붙어 있는 이 영화는 당시의 시대상을 전혀 읽을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순수’ 스포츠영화로 바뀌어 있었다. ‘같은 영화가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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