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 '교양 있는 부르주아'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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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26일 07: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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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철수 바람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이며, 설령 그가 대선에 나오지 않더라도 그의 후광을 입은 후보는 대선에서 매우 유리한 지점을 차지할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 평론가들, 논객들도 저마다 이 현상에 대해 한 마디 한다. 나도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인다.

    안철수에 대한 대중들의 정치적 지지가 무엇 때문인가라는 문제와 상관없이 그가 ‘양심적인 부르주아’라거나 ‘교양 있는 보수’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않는다. 그가 아내에게조차 경어를 쓰고, 자신이 가진 재능과 부를 사회에 환원한 것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제 식상한 이야기가 되었다.

    대중들이 안철수에게 열광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그들의 심성 구조 내에서는 ‘착한 부르주아’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능력 있는 리더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사회 구성원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가진 자의 의무에도 충실한 그런 부르주아에 대한 욕망 말이다.

    특히 이명박 정권과 같이, 국가 정책을 자기 계급, 아니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철저히 연결시키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대중들에게는, ‘양심적이고 착한 리더’에 대한 욕망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소위 개혁세력들, 진보주의자들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반공세력, 조중동과 재벌, 부패한 부르주아들에게 진절머리가 난 이들 진보주의자들은, 늘 "한국 사회에도 제대로 된 보수가 등장했으면 좋겠다"라고 떠든다.

    아마 안철수는 이들 진보주의자들이 떠들던 ‘양심 있는 부르주아’, ‘제대론 된 보수’의 전형일 게다. 그러니 진보주의자들이 안철수와 힘을 합쳐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그들이 원하는 ‘부르주아’를 만났기 때문에…

    2.

    그런데 나는,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된 보수가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소릴 들을 때마다, 그럼 미국에는 제대로 된 보수가 있고, 영국에는 제대로 된 보수가 있는가에 대해 늘 의문점을 달곤 했다. 세금 잘 내고, 법 잘 지키고, 공익을 위하고, 약자에게 관대하고, 민족과 국가를 위하는 그런 보수주의? 그것은 마치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된 자본가가 왜 없지, 하는 의문점과 같게 들린다.

    그런 우아한 부르주아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으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보면 된다. 여주인공 엘리자베스의의 애인이 되는 더비셔의 ‘다아시’가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한 없이 서툴지만, 겸손하고 예의 바르며, 집안 하인들의 존경을 받고, 따뜻하고, ‘무엇보다도’ 엄청난 토지와 부를 지닌 그 ‘다아시’. 『키다리 아저씨』의 ‘키다리 아저씨’도 아마 이런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청소년용 안철수 자서전을 읽고 떠오른 이미지가 딱 이런 캐릭터였다.

    요즘 진보주의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에서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부르주아의 청교도적 직업윤리와 연결시켰다. 신흥부르주아들이 청교도적인 근면, 성실, 절제의 미덕으로 노동함으로써 부를 축적하여 현대 사회의 지배층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윤리, 합리성이야말로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이라고 베버는 주장한다. 이 책은 일종의 ‘제대로 된 부르주아’에 대한 학술적 버전쯤 된다.

    윤리를 체현한 ‘정상적인 부르주아’라는 베버의 논리는 그렇지 못한 ‘속물 부르주아’도 존재함을 전제한다. 청교도적 윤리에 따라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가 정상적인 부르주아라면, 노동을 착취하고, 권력을 남용하며, 온간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단기에 졸부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베버는 이를 두고 ‘천민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윤리적인 서구 자본주의가 ‘정상’이라면 그렇지 못한 자본주의는 비정상이라는 가정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 때 ‘얼치기 진보주의자들’이 재벌과 부동산 투기로 성장한 한국자본주의를 묘사하기 위해 ‘천민자본주의’라는 수사를 붙이기도 했다. 이런 표현은 아마 한국이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으면 인민들의 삶이 유복했을 것인데, 천민자본주의로 성장하면서 그들의 삶이 더 피폐해졌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정상 자본주의와 천민자본주의는 구별되나? 아니 정확히 말해 유럽의 자본가 계급의 형성이 과연 그들의 청교도적 윤리 때문이었는가? 베버나 그의 논리를 끌어들여 ‘천민자본주의’ 운운하는 얼치기 학자들은 ‘그렇다’라고 답할지 모르지만, 이 질문은 정말 멍청하기 그지없는 질문이다. 베버가 모델로 삼고 있는 영국 사례를 보자.

    몇 년 전 영국출신 마르크스주의자 로빈 블랙번은, 노예무역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17세기~18세기의 영국 무역의 약 1/3은 노예무역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초기 이야기다. ‘다아시’가 더비셔에 있는 집에서 교양을 쌓았겠지만,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는 노예무역으로 돈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노예무역은 서구가 비서구 사회에 초래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다. 이게 부르주아의 직업윤리에서 비롯되었다면 그 ‘윤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19세기는 어떤가? 요즘은 중·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조차 산업자본주의가 착취와 억압, 아동노동 수탈로 발전해 왔음을 폭로하고 있다. 톰슨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형성』을 보면, 맨체스터와 랑카스터 노동자들이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서 노동했는가를 처절하게 그려낸다. 당시 노동자계급 평균 수명이 30세를 넘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사료도 제시한다.

    물론 이 사료를 두고 논쟁이 끊이지 않지만,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은 ‘재앙’이었지 ‘축복’은 아니었다. 베버 이야기 옳다면, 그것은 아마 부르주아들이 더 착취하고 더 수탈하기 위해 어느 누구보다 ‘근면’하고 ‘절제’했다는 점일 것이다. 베버는 영국 자본주의의 현실을 분석하지 않고 그저 ‘이념형’적인 것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미국 자본주의는 어떤가? 미국 역사를 조금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카네기, 록펠러 이런 인간들이 어떤 부류였나를 잘 알 것이다. 그들은 노동자들 파업을 제압하기 위해 사립 무장조직인 민병대를 동원하고, 온갖 린치를 가했다. 오늘날 부시와 ‘오바마’가 이라크에서 저질렀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재단도 만들고, 대학도 건설했겠지만. 이런 게 윤리를 체현한 ‘정상 자본주의’의 본래 얼굴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20세기 자본주의가 한 때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 혁명과 서유럽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체제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케인즈와 같은 인종혐오증이 있는 보수주의자가 ‘합리적이고, 심지어 급진적인 구조 개혁’ 조치를 제시한 것은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노동운동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따뜻한 부르주아, 착한 부르주아 때문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로버트 오웬이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양심적인 부르주아나 개혁주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 개혁주의 세력들의 존재는 부르주아 사회의 부차적인 존재였지 결코 주류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들의 개혁조치를 실질적인 개혁으로 만든 것은 바로 사회운동과 조직된 노동의 힘이었다.

    3.

    그렇다면, 우리가 ‘합리적 보수주의’나 ‘정상적 자본주의’가 존재했다는 환상을 갖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왜 우리는 서구 사회에는 ‘제대로 된 보수주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이럴 것이다. 집단으로서 부르주아가 ‘양심’적이거나 ‘교양 있는 보수주의’의 토대를 제공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천박했기 때문에, 엘리트주의자들 가운데 부르주아에게 ‘교양’과 ‘양심’을 호소하는 세력이 있었던 것이라고. 올바른 보수주의가 자본주의 내에서 요청된 된 것은,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상징적’으로라도 치유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 낭만주의, 보수주의에 깔려있는 정신이 바로 이런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문화 이론가였던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초기 저작 『문화와 사회』는, 영국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이 영국 보수주의, 낭만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에드문트 버크에서 매튜 아놀드를 거처, T. S. 엘리엇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보수주의는 바로 산업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한 반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19세기 부르주아의 전형적인 형상은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등장하는 Mr. 채털리이다. 인간적 감정은 완전히 메말라 버렸고, 타인과의 소통은 더 이상 불가능한 ‘불구자’ 채털리씨 말이다. 부르주아의 전형은 Mr. 채털리이거나 찰스 디킨즈의 소설에 등장하는 ‘스쿠르지 영감’이지 더비셔의 ‘다아시’가 아니다.

    20세기 영미 문학비평의 실질적은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신비평’의 문제의식도 동일했다. 영국 문예비평가 리비스가 주도한 이 비평 전통은, 문학비평을 통해 영국의 문화를 개혁하고, 부르주아를 ‘교양’ 있는 존재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이 꿈꾼 이상적인 사회의 상은 섹스피어 시대의 민중극장이다. 여왕과 귀족, 저자거리의 평민들이 같은 극장에서 함께 웃고 즐기며, 존경과 예의, 배려가 있는 그런 낭만적인 공동체 말이다. 이를 주도적으로 실천해야 할 집단은 ‘교양 있는 부르주아’였던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원했던 부르주아는, 사실 현존하는 부르주아가 아니라 부르주아의 헤게모니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로 했던’ 부르주아였다. 이런 부르주아는 대중들을 통합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그런 부르주아를 만들어 낸 것은 전혀 아니다. 더군다나 19세기 전 역사를 거쳐 보수주의 토리당은 반동의 전형이었지 ‘합리적인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4.

    나는 언젠가, <레디앙>에 기고한 글에서, 21세기 자본주의 체제는 이제 ‘교양’과 같은 외피마저 벗어 던졌다고 썼다. 앞에서 보았듯이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부르주아 문화는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한 사회에서 부르주아들은 더 이상 남의 눈치 보지 않는다.

    부르주아들은 강남이든 캘리포니아의 산 호세든 혹은 다른 어떤 공간이든,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가난한 자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한다. 가난과 비참함은 개인의 게으름 탓이거나 운명이 결정지은 것이지 시장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는 것이나, 코카인 들이키고 댄스 클럽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것이나 질적인 구별은 없다. 다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관용과 배려가 최고의 덕목이다.

    부르주아들은 더 이상 노동자계급을 통합해야 할 이유도 없다. 노동자계급은 지리멸렬하고 반체제주의자들은 외계인 취급되는 것이 오늘날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경제위기는 약자들의 ‘분노’와 ‘절망’을 확산시키고 있을 뿐 어디에서도 좌파가 강화되고 있다는 징후를 보이진 않는다.

    노동자계급의 조직된 힘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사민당 정권이 급진화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민당 정권들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적응하여, 노동자와 시민들의 절망감을 더 쌓아주는 역할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에서도 그렇고 스페인에서도 그렇다.

    안철수에 대한 욕망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비동시대적인 것의 동시성’을 보여준다. 한국의 선량한 시민들, 젊은이들은 이명박 정권이 낳은 절망감을 감싸줄 대안으로 ‘안철수’를 선택했다. 따뜻하고 양심적이며, 심지어 능력조차 있는 안철수라는 부르주아 말이다.

    이 욕망이 비동시대적인 것은, 오늘날 부르주아 체제는, 세계 어디에서도, 헤게모니든 도덕적 정당성이든, 구차스러운 것은 모두 걷어차 버렸다는 점이다. 어쩌면 안철수는 이런 ‘노골적인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하나의 면죄부일 수 있다. 어느 누구도 부르주아체제와 ‘양심적인 것’을 연결시키지 않는 시대에 한국의 젊은이들은 양심적인 부르조아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욕망은 정말 초현실적이다.

    19세기 문화주의자들이, 천박한 산업자본주의를 치유하기 위해 바랐던 그 ’교양 있는 부르주아‘가 이제 한국에서도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스꽝스러운 것은, 한국의 선량한 시민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이런 ’교양 있는 부르주아‘라는 환상에 대해 지금은 유럽에서조차 한껏 비아냥거림만 쏟아진다는 사실이다.

    5.

    통합진보당은, 안철수 체제가 되든 문재인 체제가 되든, 자유주의자들과 연정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연정으로 들어가는 순간 노동조합의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투쟁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할 것이다. 원래 전후 사민당의 역할이 이런 것이었다.

    이정희 공동대표 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한나라당에 권력을 안 넘겨주려면 "저희를 지지해 주세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그 요청에 응답해야 하는 곤란에 직면할 것이고, ‘예스’와 ‘노’를 두고 노동운동은 또 균열될 것이다.

    전후 사민당이 노동자들 통제할 때는, 그들에게 완전고용과 노후를 보장한 상태에서였다. 통합진보당이 지금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비정규직의 과잉’과 극단적인 불평등 속에서 그런 것이다. 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런 우려에 덧붙여, 통합진보당과 민주통합당 연합정권이 개혁은 고사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뒤치다꺼리’나 할 운명이라면, 그런 진보주의에 대해 우리가 ‘비판적’으로라도 지지해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면, 통합진보당은, 비참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양심 있는 부르주아’를 위한 ‘알리바이’만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 스스로 자신의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개혁은 결코 급진적일 수 없다. 나는 통합진보당과 같은 ‘선량한 진보주의자’들이, 좋은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현재의 조건 속에서 할 수 있는, 많은 일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연정은 어떤 점에서 보아도, 노동자운동을 약화시킬 것이며, 통합진보당의 개혁 동력을 파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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