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일, 요한 바오로, 노무현 & 나꼼수
    By
        2011년 12월 22일 08:47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지난 며칠 동안 제게 거의 지옥적이었습니다. 지난 주부터 태심한 독감을 앓았는데, 이번 주 월요일 새벽부터 노르웨이의 각종 매체로부터 막 연락이 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북조선의 김정일 위원장이 돌아갔는데, 북조선의 실상과 미래에 대해서 코멘트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노르웨이 기자들의 태도

    북조선 전문가도 아니고, 예컨대 김정은과 장성택 사이의 관계 뉘앙스 등에 대해서 전혀 잘 모르는(그걸 과연 누가 제대로 아는가요?) 저 같은 사람에게 이와 같은 취조(?)를 당하는 것은 고역이었는데, 거기에다가 독감 때문에 목소리가 다 갔기에 말을 이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제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대부분 기자들의 태도이었습니다. 신문 부수를 늘리려고 그러는 것이겠지만,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조선을 더 이국화시켜 "미지의 동양적 전제 왕국"의 이미지로 독자들에게 팔려고 했던 듯한 인상이었습니다. 소위 오리엔탈리즘의 각본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북조선을 객관적으로 본다면 그쪽 실상은 그렇게 ‘이상하게’만 보일까요?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주는 거울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북조선이 이상하다면 남한을 비롯한 전세계 전체가 이상하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기야 저와 같은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바로 그렇게 보일 것입니다.

    기자들은 북조선 길거리에서의 집단 오열 장면을 매우 ‘이국적으로’ 여겼습니다. 이국시하는 동시에, "독재자를 위해 꼭 울어야 하는" 북조선인들을 또 불쌍히 여기려는 분위기도 강했습니다. 그렇다면 6년 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돌아갔을 때에 그를 위해서 울었던 남한을 위시한 전세계 가톨릭 신도들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합니까?

    신화가 아닌 실제의 교황 요한 바오로는 – 김정일 위원장처럼 – 꽤나 모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세계에 대한 넓은 식견, 그리고 북남 교류에 대한 상당한 적극성 등과 기존의 체제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강력한 강박관념을 겸비했다면, 요한 바오로는 상당한 상식과 기가 막힐 만한 보수성을 겸비했습니다.

    숭배의 대상, 거래의 대상

    상식이 있었던 만큼 달라이 라마와의 친교를 맺고 미제의 이라크 침략 등 노골적인 제국주의적 망발들을 비난했지만, 해방신학부터 콘돔 등 피임도구까지 비상하게 사갈시한 나머지 많은 이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들을 남기고 또 많은 이들을 희생시킨 바도 있습니다.

    나중에 암살을 당한 로메로 주교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엘살바도르의 악덕한 극우독재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는 대신 니카라과의 온건 사회주의 정권을 비난했던 1980년대의 요한 바오로의 정치적 행보는, 레이건 등 미국 극우들에게 하늘의 선물이었지만 중남미의 양심적 가톨릭세력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것이죠.

    또 AIDS가 극성을 부리는 아프리카에서의 콘돔 사용을 부정한 것은, 실은 많은 경우에는 간접살인에 해당됩니다. 요한 바오로는 이처럼 모순에 가득찬 인물이었지만, 그의 죽음에 따르는 오열은 세게적이었으며, 그는 이미 교황청에 의해 복자의 위치에 올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 정도면 그 어떤 노르웨이 신문이 감히(?) 이국화시켜 코미디처럼 보도하겠습니까?

    물론 북조선과 같은 차원의 개인숭배는 현재 남한에서는 어려울 것입니다. 국회의원직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자유로이(?) 거래될 수 있는 우리들의 신자유주의적 낙토에서는, 사람도 상품회된 나머지 이용 대상은 돼도 진정한 ‘숭배’의 대상은 되기가 힘듭니다.

    예컨대 현직교수에서 명예교수가 되는 순간 그 제자들의 논문에서의 그의 저서들의 인용빈도가 뚝 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유통기간이 끝나면 상품이 쓰레기통으로 가는 것이죠. 남한에 국시라는 게 있다면 이건 지금으로서 극단적인 냉소, 그리고 "돈이면 안되는 게 없다"는 굳건한 믿음 정도입니다.

    가족과 핏줄 그리고 혈통적 민족주의

    그런데 이와 같은 사회가 산산조각 깨지지 않고 그나마 그럭저럭 나름대로의 결속력을 과시하면서 계속 돌아갈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맹목적인 돈 숭배에 ‘가족’이 예외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르신에 대한 자식들의 잔혹한 유기가 급속히 늘어나는 것으로 봐서는 이 부분도 점차 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피붙이’ 정도면 우리에게 이용물이라기보다는 사모하고 귀엽게 생각하고 불쌍히 봐주어야 하는 ‘우리’의 일부분들입니다.

    돈과 ‘피’, ‘핏줄’은 이 사회의 두 개의 주된 이데올로기죠. ‘핏줄’ 이데올로기가 전사회 차원까지 이르면 바로 혈통적 민족주의가 되는 것인데, 이 이데올로기가 지금처럼 강한 나머지 ‘다문화 사회’는 영원히 공염불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가족들과 ‘혈족’ 사이의 중간단위가 바로 사회적 이익집단이나 보스에 의해서 리드되는 정파 같은 집단인데, 이와 같은 관계에서도 우리는 역시 의사(擬似) 가족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즉, 선배나 보스를 ‘가족의 어른’, ‘형’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만큼 비판적 사고는 그 자리에서 마비되고 맙니다.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최근 북조선에서 벌어지는 장면들과 일면 상통하는 장면들은 평양이 아닌 서울에서도 벌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몇년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비명에 돌아갔을 적에 전국의 분향소들을 메운 인파들을 생각해보시지요. 그 때에 – 나중에 비판자들에 의해서 "놈현 관 장사"로 표현됐던 – 그 추도의 앞장에 섰던 소위 ‘노빠’들에게는,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이라크 침략과 아프간 침략과 같은 초대형 국제범죄를 적극 방조해 종범으로 나섬으로써 한국역사를 영원히 더럽혔다는 점이나, 노무현이야말로 한미FTA 발안, 추진 과정을 소신껏 주도했다는 점을 설득시킬 수 있었습니까? 물론 없었지요.

    ‘노빠’든 그 어떤 다른 빠든 일단 그 ‘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사고할 줄 아주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님, 아버지 격인 ‘짱’은, 그들에게 완전무결한 인격의 소유자죠. 유시민이나 문재인의 노무현 시절 관련 저서를 한 번 정독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줄의 반성이라도 보이나요? 불문가지의 일입니다.

    평양의 군중과 <나꼼수>의 팬들

    ‘짱’의 위대한 영도를 받아 한 일에 대해서는, 그들은 원천적으로 자기 비판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평양의 군중들과 달리, 그들이 어떤 사회적 압력을 의식해서 ‘빠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다 거래되는 자유 대한에서 가신(家臣)의 영광스러운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더 한심하나요? 제게는, ‘가카’를 있는 대로 씹으면서도, 아키히로(明博)의 왕좌를 박원순이나 유시민이 차지한다 해도 이 나라 노동자들이 그대로 죽어날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나꼼수>의 팬들은, 평양의 군중보다 훨씬 더 한심해 보입니다.

    김대중과 노무현 치하에 OECD에서 자살율이 제일 높은 사회가 된 나라에서 사는 그들은, 외부적 강제가 그다지 없으면서도 의식이 있는 계급의 구성원, 즉 진정한 의미의 독립적 개인이 되려는 노력을 전혀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핏줄’에 따르는 소속감부터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격차, 각종의 계급적 모순들, 그리고 영어 열풍까지, 우리가 갖고 있는 대다수의 문제들을 북조선 사회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가난한 만큼 훨씬 더 약해 보이는 그들을 경멸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들의 – 꽤나 볼썽사나운 – 모습을 바로 보는 게 더 도덕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들은 많은 면에서 우리들의 거울일 뿐입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