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오펠 공장노동자평의회, 나를 울리다
    By
        2011년 12월 18일 09:48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아직도 아빠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시를 읽어보고 싶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서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김준태 ‘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중에서

    "우리도 히틀러 경험 있다"

    1980년 5월은 참으로 잔인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노동자는 출근을 해야 했다. 출근해서 일하려고 준비하는데 작업관리 마이스터가 와서 물었다. "어제 뉴스 봤나? 아는 사람이나 친천 없냐" 나는 대답했다. "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집에 가봐라."

    그의 말이 어어졌다. "너무 힘들겠지만 잘 견뎌라. 우리도 아돌프 히틀러를 경험한 역사가 있다. 우선 일주일 휴가 줄 테니 쉬고 나오라"고 말하면서 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나는 "괜찮다"면서 그냥 일을 했다. 막상 닥치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연일 속보와 특집 방송을 통해 전해져오는 5월 광주항쟁 소식은 유럽 사회와 재독 한인동포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광주의 시민들이 도청을 점거하고 정부와 협상이 진행된다는 소식에 희망을 걸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있지 않는가?’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피를 말리는 거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텔레비전에 젊은 청년들이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서 끌려가고, 옷이 벗겨진 채 뛰어가는 청년을 향해 군인들이 곤봉으로 내리치고, 묶여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청년을 전깃줄 같은 거로 목을 조르는 장면들을 보면서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났다. 나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아무리 아무리 권력에 욕심이 나도 제 나라 국민들을 저렇게 학살할 수가 있다니. 마치 전쟁터에서 적군에게 공격하듯 그런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상상도 못해본 나는 도무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못한 채 모여서 기도회나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아빠의 한계였다. 

       
      ▲당시 독일 주간지에 났던 광주 관련 기사 중 사진

    아빠가 그런 상황에서도 정신없이 좌충우돌하면서 뭔가를 하려고 뛰어다닐 때 알고 지내던 친한 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야! 북한의 김 주석은 뭐허고 있다냐? 광주사람들을 저렇게 죽이는데 말이다. 남쪽으로 쳐들어가야 허는거 아니냐!"

    광주가 고향이었던 이 형은 독일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자기 처지를 보고 나한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 형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리고 마치 부탁이나 하듯 외쳤다. 내가 대답했다.

    "형 맘 알것네. 근디 그건 형 말대로 김 주석이 결정헐 거 아닌가?"
    "미안허다. 피가 말라강게 누구한테 이야기 헐 수가 없더라. 그려서 너한테 했다."

    5.18 광주항쟁 상황을 독일 언론들은 신속하게 보도해 주었다. 같은 분단국가여서 였을까? 아빠는 이때까지 보쿰교회라는 활동 공간 외에는 잘 몰랐다. 당연히 내 활동 영역도 거기에 그쳤다. 내가 교회에서 할 수 있는 거는 광주학살 소식을 알리는 일, 추모기도회를 여는 일 그리고 모금 정도였다. 털레비전 뉴스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화면을 보는 우리들의 가슴은 정말 답답했다.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자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귀국을 서둘렀다. 그 중에 나와 같은 학습조로 함께 했던 이삼열 박사도 귀국하겠다고 했다. 그들의 영향으로 의식이 변화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어느 때부턴가 그들에게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들이 귀국한다고하니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기분이 ‘참 그랬다.’

       
      ▲당시 독일 텔레비전 뉴스. 

    한국의 상황은 박정희 때보다 더 험악해져가는 분위기인데도 그들은 갔다. 자기들이 가야 할 곳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들은 환송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멋지게 만나자"고 말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재독 민주단체와 유학생, 교인들이 중심이 된 집회와 농성 투쟁이 프랑크푸르트와 서베를린에서 있었다고 했다. 독일 전역에서 활동하는 민주단체들이 모여서 74년에 설립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 75년 재독한인노동자연맹(노연), 78년 재독한국여성모임(여성모임)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오펠 자동차공장 공장노동자평의회

    자동차공장 일은 광부 일과 비교하면 너무 달랐다. 아빠는 느닷없이 화이트칼라가 된 기분이었다. 광산 일은 매일매일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작업환경인데 자동차공장을 긴장도 필요 없고, 매일 샤워를 해야 하는 일도 없어서 신이 났다. 생각해 봐라! 5리터짜리 마실 차를 갖고 석탄가루 휘날리는 1천미터 지하 광산에 들어가 탄을 캐는 작업과 지상에 있는 커다란 자동차공장에서 작업을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었다.

    어느 날 출근하여서 작업준비를 마치고 있는데 모두 다 일어서서 일하는 게 아니라 어디론가로 가는 거 였다. 나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오늘이 공장노동자평의회(Belegschaftsversammlung)가 열리는 날"이라고 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함께 갔다.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있었다. 80년대 보쿰오펠공장에서는 약 2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했단다. 조금 있으니 공장노동자평의회가 시작되었다.

    1차로 공장노동자평의회 의장이 나와서 그간 평의회 활동에 대해 보고했고, (공장총회는 3개월에 1회 연 4회 열렸다) 그 후에 경영자 대표가 나와서 경영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리고는 각 정파 대표 같은 사람들이 나와서 발표를 하는데 그렇게 잘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아빠는 소리만 들었지 이해는 못하였단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빠의 독일어는 빵점이지 않냐.

       
      ▲지난 2004년 정리해고 반대투쟁에 나선 오펠 자동차 노동자들과 이를 지지하는 보쿰 시민들. 

    또 관중석에는 마이크가 3개 정도 설치되어서 질문을 하거나 자기 의견을 발표할 수 있어 치열한 논쟁을 하는 거 같았다. 난 눈물이 났다. 너도 알지? 아빠 울보인 거 말이다.

    솔직히 아빠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투쟁하면 자연히 노동자들이 꿈꾸는 평등한 세상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노동조합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믿었다. 그때는 말이다. 독일에서 본 상황은 동시대인 80년 한국 상황과 너무 달랐다. 눈물이 났다. 

    그날 아빠는 주먹을 다시 불끈 쥐었다. 언젠가 우리도 독일 노동자들이 만든 것과 같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헌데 지금 보니 전노협을 거쳐 민주노총이 만들어졌어도 여전히 아빠가 꿈꾸었던 그런 거와는 너무 다른 세상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하자.

    그때 오펠자동차공장노조는 유니온숍이 아니라 오픈숍이었단다. 어느 날 평의회 의원(Betriebsrat)이 내가 일하는 작업장에 왔길래 노동조합에 가입하겠다고 했더니 이 의원은 내 얼굴을 몇번이나 바라보더니 노조에 가입하면 가입비를 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가입하지 않아도 당신이 우리에게 연락만 하면 항상 여러분 편에서 일합니다."라고 말했다.

    참 우습지? 노동운동하는 사람이자, 공장노동자평의회 의원이 이렇게 말하니 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독일금속연맹이 어용이라고 생각하는 활동가였다. 이제는 네가 아빠보다 더 전문적 공부를 해서 박사까지 되었고 막강한 미국의 정보통신연맹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더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레디앙>에 실리는 걸 기회로 처음처럼 그때 일을 다시 되새겨본다.

    아빠 눈에 비친 1980년도 독일 금속공장 노동운동 현황을 이런 거 같았다. 임금협상은 산별노조가 했다. 말 그대로 최저임금이었던 거 같다.(법적이 아니라 협상에서 – 지금도 독일은 최저임금제가 없다. 노사가 협상할 문제이며, 법으로 강제하면 정부가 노사협상에 개입한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그러나 이제는 비정규직 등 저임금지대가 확산돼서 노조와 좌파들이 외친다. ‘최저임금제’ 채택하라고 말이다)

    산별협상 합의를 기본으로 각 공장단위가 협상을 하는데 그때는 노조가 아니라 ‘공장노동자평의회(Betriebsraet)’와 협상했다. 헌데 이 노동자평의회는 오펠공장에 일하는 모든 노동자가 선거를 할 수 있는데 정파투표제 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금속연맹도 한 정파였다. 재미있지 않냐? 그때 독일 노동조합운동을 이끌어가던 금속노조도 오펠자동자공장이라는 단위사업장 ‘공장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는 한 정파로 되어지더라. 후에 너도 잘 알고, 아빠의 인생을 치열하게 만들어준 오펠자동자의 자랑스런 노동운동 활동가조직 68년 학생운동 후 현장으로 침투한 노동 조직인 게오게(GOG)도 정파로 등록되어서 독일금속연맹의 최고의 표적이 되어서 치열했다고 하더라.

    이제 아빠가 게오게(GOG) 이야기는 나중에 할 것이다. 재미있게도 평의회의원으로 첨 만났던 그 활동가가 게오게 활동가가 균터(Guenter)였다. 그는 녹색당 당원으로 오펠에서 노동운동하는 활동가 였다.

    아빠의 가부장적 모습

    79년 귀국해서 네 할머니 만나고 독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네 엄마는 임신했다고 했다. 너 알지 ? 아빠가 엄마한테 할머니가 "종자는 있어야 헌다"고 하신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을. 어쨌든 내가 그 말을 한 이후 네 엄마는 종자인지? 아닌지? 아무튼 임신을 했는데, 아빠가 엄청 큰 사고를 쳤다.

    그러니까 그날이 아마도 너의 세 살 생일잔치 때였을 거다. 1980년 3월이다. 그날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다. 물론 그날 후 교회나 다른 행사에서 만나도 많은 사람들이 인사처럼 나에게 물었다.
    "아들이야? 딸이야?"
    난 그때마다 "내가 종자를 심었는데 모르겠어? 아들이지! 아들!" 그러고 다녔단다. 참 웃기는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네 아빠의 그런 얘기를 듣고 정말 고민스러웠을 거 같다. 철부지처럼 지가 종자를 심었으니, 아들이 분명하다며, 설치고 다니던 내가 만약 아들이 아니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둘째 훈이를 낳고. 

    1980년 7월에 네 동생 훈이가 엄마의 몸을 통해서 세상으로 나왔다. 그날도 아빠는 사람들한테 "종자여! 틀림없는 종자여!" 하면서 큰소리를 치고 다녔기 때문에 병원이 아니라 집에 있었다. 아빠가 엄마한테 얼마나 못 되게 굴었는지 너도 상상이 되지? 마침 집으로 전화가 왔다.

    "여보! 아들이야."(엄마는 이런 말 못하지만 아마 속으로는 "최정규, 나 오늘 종자 낳았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난 그래도 첫째인 너를 낳았을 때보다는 숙달되어 미역국을 끓여서, 그릇에 담고 하팅겐 에팡겔리쉬 병원까지 달려갔다. 네 엄마는 내게 "훈이를 먼저 보자"고 했다. 너를 낳았을 때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아들/딸 표시 가리키면서 "여보, 봐! 저기 우리아들이야!"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무척 부끄럽구나. 내가 한 행동과 말이 네 엄마를 얼마나 부담스럽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래도 엄마는 할머니의 희망대로 지금은 멋쟁이가 DJ가 돼 있는 네 동생 훈이를 낳았단다.

    한마음조합 사업

    79년 11월 결성된 한마음조합 일은 참으로 힘들었다. 핵심적 활동을 해왔던 사람들이 에발드 광산투쟁으로 다 흩어져서 일부는 타지역 광산으로, 나머지 몇 명은 기술교육을 받으러 가서 현장인 보쿰에는 나 혼자만 덜렁 남아있게 되었다. 함께했던 이 박사도 귀국 준비로 이미 마음은 한국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습조 지도선인 정현백 선생이 주말 교육세미나를 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같은 학습조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더니 좋다고 해서 세미나를 준비했다. 그 당시 세미나 주제가 잘 기억 되지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독일과 한국 농민전쟁 비교’였던 거 같다.

    요즈음 가끔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와! 우리가 사는 곳이 이토록 멋있구나’라고 생각을 한다. 특히 스티펠(Stiepel)에 빠지면 말이다. 그 스티펠에 있는 개신교 교육관에서 주말세미나를 갖게 되었단다.

    독일 농민전쟁과 종교개혁에서 루터와 토마스 뮌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 농민전쟁에서는 갑오동학농민혁명전쟁에서 남접과 북접 이야기를 했다. 아빠는 이미 오펠자동차공장 공장노동자평의회 모임을 통해서 느끼는바가 많았지만 그 당시 주말 세미나에서는 엄청 충격을 받았았다.

    왜? 같은 사상을 뿌리로 하는데도 서로 생각과 실천 방법론이 다를까? 헌데 서로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늦게, 아주 늦게 알았다. 그리고 나는 5.18 항쟁 후 나도 모르게 민족주의에 깊게 빠지는 과정에서 갑오동학과 전봉준 장군 이야기를, 우리 할머니가 불렀던 ‘새야 새야’라는 노래를 기억하였다. 너도 알지? 다시한번 불러고 보고싶은 노래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마라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마라

    아래녘새는 아래로 가고 위녘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마라 우리 논에 앉지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발톱 다 닳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마라

    이런 상황에서 ‘찾아가는 선교’의 한계를 넘고자 시작한 ‘한마음조합’은 뭘 할 수 있는가? 한마음조합 결성 때 결의한 대로 공부하면서 실천하는 공동체로 가는 공부와 공동체실천에 노력하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주말마다 한 주간 있었던 다양한 현장(동네) 현황을 이야기하면서 공부하는 학습모임도 했다. 그때 가장 멋지게 날렸던 게 전에 이야기 했던 ‘구원의 빛’과 ‘노동자의 길잡이’였단다.

    조합원들은 불쌍해서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점점 노동자도 연대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 같지 않은 꿈을, 고개를 갸웃둥하면서도, 슬슬 꾸기 시작한 것 같았다. 우리들이 그런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분명했다.  

    우리가 공부하던 학습교재는 사회 문제를 그려 놓고, 그것을 보고 질문하고 해설하는 형식의 내용으로 꾸려져서, 공부하기에 참 좋았다. 예를 들면, 수도꼭지가 틀어져서 물이 계속 나와 차고 넘치는데 사회의 권력자, 종교지도자, 자본가는 물만 퍼내는 것이다. 어린 아이까지 "왜? 어른들이 저 수도꼭지를 잠가서 물을 멈추지 않을까?" 하면서 의문을 품는 데도 말이다.

    학습조는 몇 날을 열띤 토론으로 밤을 새고, 치열함으로 날을 새는 게 빈번했다. 많은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서로 제안서를 만들어 이야기하자고 했다.

    학습조는 한마음조합이 처음 만들어질 때 했던 결의를 다지고자 했다. 현재 동포 현장 상황에 대한 수집을 최대한 많이 하고, 현장 실천 사업을 만들어 보자는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한마음조합의 강화와 대중성 확보를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공동체 생활 경험을 위한 농사 : 발트롭 농장주가 밭을 그냥 임대해 주겠다고 하니 시작합시다.
    -가래떡 기계를 보쿰교회 집사님이 싸게 넘겨준다고 하니 사서 재정사업을 시작합시다.
    -손자들 본다고 오신 어머님들이 많은데 ‘경로잔치’ 사업으로 동포사회 대중속으로 갑시다.
    -조합원들은 가능한 공동으로 행동합시다. 특히 휴가를 함께 갑시다.

    한마음 조합원들은 그 빨간 배경의 살인마 전두환을 기억하면서도 광주의 오월항쟁을 기억하며 뭔가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조합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우리는 1981년 여름휴가 캠프를 만들어서 이를 추진하였단다. 네덜란드 북해의 브레스켄스였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지역이었단다.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도 많은 조합원들이 참석하여 1981년 여름 우리는 신났다.

    참, 너희들이 집에 오는구나. 엄마 아빠는 너희들 맞을 준비 끝냈다. ‘아빠의 이야기’도 연말에는 잠시 쉬고 2012년 1월 9일에 다시 시작해야겠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