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주먹 광부들, 광산주와 '조국'을 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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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11일 11: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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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이후 잠시 중단됐던 최정규의 ‘아빠의 이야기’가 다시 연재를 시작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 * *

    한인 광부들 투쟁사

    아빠가 그동안 이야기를 못했구나. 이제 다시 한다. 아빠가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너도 나처럼 노동운동과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한번 자료를 인용해 60~70년대 파독 한인 광부들의 투쟁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너도 관심 있지?

    여기 자그마한 새활동을
    독일땅 루르의 지하탄광에서
    생명과 건강을 잃어버린
    사랑하는 우리의 동료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빛나야 할
    꿈을 위하여 바친다.

    1981년 2월 5일
    재독한인광부인권협회 [새활동 인용]

    전두환의 등장과 함께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사람들이 흔들릴 때 재독한인광부 인권협회(이하 인권협회)의 서명운동은 참으로 힘들게 진행됐다. 적은 인원이 악착같이 뛰어다니는 걸 보면 무척 안쓰러웠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가 접근하면 피하고 서명을 거부했다. 전두환이 등장하자 박정희 죽음으로 조용했던 일명 ‘애국주의자’들이 인권협회 서명운동을 왜곡 선전하기 시작한 결과였다.

    "순수한 체류권 서명운동에 모 노동자 단체가 조종한다고 한다."
    "반국가 정치운동을 하는 정치교회와 불순한 세력들이 뒤에 있다." 등등의 얘기가 흘러다녔다. 

    인권협회 활동가들 중 일부는 개인적 사정이 있다면서 활동을 중지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떠도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는 걸 설명하게에 급급했다.

    처음 출발할 때의 뜨거웠던 열기가 전두환 등장 이후 주춤해질 때, 루르 지역 독일가톨릭노동청년회, 에쎈(Essen)대학교 기독학생회, 일부 양심적인 독일인들의 연대로 독일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하고 홍보에 나서면서 체류권 쟁취 서명운동이 여론화되기 시작했다. 

    파독한인광부인권협회의 출발 선언을 보자.

    재독 한인광부 현실 개선 서명운동

    인간의 존엄성에 알맞은 인간의 권리를 찾기 위하여 우리 재독한인 광부들은 모든 인간과 동포들에게
    호소합니다. 재독한인 광부를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합니다.

    1. 3년 의무노동 규정의 즉시 폐기 및 자유롭고 인간다운 취업 기회 보장.
    2. 유고나 터키 노동자와 동등한 노동 및 체류 허가 연장보장.
    3. 직업 기술교육의 기회균등 보장.
    4. 사회보장대책의 동등한 혜택 및 질병 재해시 정당한 보상의 특별보호.

    1979년 11월 17일
    재독한인광부인권협회 [새활동 인용]

    전두환 때문에 장기 체류 허용?

    이런 내용을 요구한 서명운동은 80년 광주 5월 전두환 살인마의 살육 작전의 소식이 독일 언론을 타고서 한국의 상황이 알려지자, 그해 8월 14일 독일연방 내무성과 사회성의 합의로 한인 광부들도 3년 이상 장기노동 및 체류 그리고 광산 이외의 다른 직장에서의 취업의 자유가 허용됐다. 이로써 18년간 기다리던 한인 광부의 숙원이 이루어지고, 인권협회 활동의 주요 목표도 달성됐다.

    딘스라켄의 신문인 라인니쉬 포스트(Rheinische Post in Dinslaken)지에는 당시 이와 관련해 ‘한국의 정치상황 변동이 이러한 주요 결정의 요인임이 확인’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인권협회 발행 새활동 인용)

       
      ▲파독 한인광부 사진. 

    자, 그럼 이제 1960년대부터 파독 광부로 온 한인 광부들의 저항투쟁 사례를 자료를 인용해 이야기해보겠다. 

    파독광부 차별에 대한 투쟁 사례 1. 클뢰크너 광산

    1965년 4월 6일 오전 6시, 서독 카스트롭-라욱셀 클뢰크너 광산. 한국인 광산 노동자 186명이 입갱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이곳에 근무하는 한국인 노동자 265명 가운데 70%에 이르는 수치다.

    이날 사태의 직접적인 발단은 우발적이었다. 한국인 광산노동자 1차 2진인 이00씨가 독일 노동자에게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구타를 당한 게 이유였다. 이 씨는 독일인 노동자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그래서 한국인 노동자들은 5일 저녁부터 집단행동을 결의했던 것이다.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은 단순히 이 씨의 구타에 대한 조치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언론 등에 보도된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이다.

    -외국인이라고 푸대접하지 마라
    -독일인과 같은 임금을 달라
    -가족수당을 소급 지급하라
    -우리에게 맞는 일자리를 달라
    -탄광회사를 위해서만 일하는 통역을 해고하라
    -한국에서 온 고춧가루를 착취한 통역은 사실을 밝히고 자진 사퇴하라
    -보조통역은 우리와 같이 입항하라

    임금개선 보장과 수당지급, 직무배정 전환 등 경제적 요구와 외국인 차별 철폐 등 민족적 요구 등도 함께 담겼다. 즉, 구타 사건을 매개로 그간 쌓여 있던 회사에 대한 불만과 함께 민족적 감정, 보편적인 인권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폭발한 것으로 분석된다.

    하루 전날 연락을 받았던 주독한국대사관 노무관은 4월 6일 오전 2시에 클뢰크너 광산에 도착, 한국인 노동자들을 달랬다.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을 요청했고, 이를 위해 일단 작업에 지장이 없도록 작업장에 복귀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주독 한국대사관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계속 입갱을 거부했다. 그래서 광산회사측은 가해자의 인사조치 등은 약속했지만, 임금개선이나 가족수당 지급 등의 문제는 독일법과 ‘임시고용계획’ 등에 저촉된다며 요구조건 수용을 거부했다. 양측이 팽팽히 맞서면서 하루가 지났다.

    4월 7일. 이번에는 최덕신 주독 한국대사까지 현지로 달려왔다. 최 대사는 한국인 노동자들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은 뒤 작업장으로 돌아가 달라고 간곡하게 설득했고, 파독광부들은 대사의 명령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입갱을 결의했다.

    4월10일 오후 10시. 한국인 노동자들이 갱으로 다시 들어갔다. 재입갱 기간 동안, 광산회사는 구타한 독일 노동자에 대해 인사조치했지만 그 외의 요구는 모두 거부했다.

    이후 서독대사관측이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서면서 사건은 유야무야됐다. 여기에 탄광회사측의 해고압박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즉, 한국인 노동자들의 무단결근은 해고 사유에 속하며 따라서 「임시고용계획」의 제 1장에 의거, “계약 만료 전 한국 광부의 유책 사유로 인하여 귀국할 때 그 여비는 본인이 부담하여야 한다”(제20장 2항)는 규정에 따라, 귀국경비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압박했던 것이다.

    비록 한국인 파독 광부들의 입항거부 사태는 주독 한국대사관측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광산회사까지 거들고 나서면서 마무리됐지만, 사건은 독일 언론 등에 게재되는 등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다. (한독심포지움자료인용)

    투쟁 사례 -2 아헨 에밀마이리쉬 광산

    1970년 9월경 서독 아헨(Aachen)에 있는 에밀마이리쉬(Emil-Mayrisch) 광산에서 일하던 한인광부 73명은 대부분이 한국에서 광산노동은 커녕 육체노동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나, 젊음의 패기로 독일 사람들도 위험하고 힘들어 싫어하는 1000미터 지하광산 막장에서 일을 했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봉급이 독일 사람들과의 부당하게 차별 지급되고, 건강상 힘들어 일할 수 없음을 호소하며 다른 작업에 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하기 싫으면 한국으로 가라"고 쏘아붙이는 등 마이스터(Meister)나, 항장으로부터 심한 욕설과 심지어는 폭행까지 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14항의 낮 반 근무를 하는 12명의 한인광부은 항의하기 시작했다.

    첫째: 부당한 임금 지불에 대한 추가 지불을 할 것
    둘째: 각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일자리를 배치할 것
    셋째: 한국인을 모욕하는 언사와 폭행을 즉시 중지할 것

    이상과 같은 내용의 요구서를 작성하여 12명이 연대 서명하여 광산통역을 통해 광산소장에서 제출하였으나, 일주일이 지나가도 광산측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14항의 12명은 이제 행동에 들어가기로 하고 입항하지 않고, 기숙사로 돌아오자 14항은 채탄이 중지되었다.

       
      ▲채탄 작업 중인 한인 광부들. 

    이 소식을 접한 광산소장은 통역을 통하여 만일 한인광부 12명이 늦게라도 입항을 하지 않으면 즉각 해고할 것이며, 당장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통고하여 왔다. 그러자 한국인 광부들은 분노하여 12명뿐 아니라 73명 전체가 집단적인 행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최초의 불법파업

    한국인 광부들의 정당한 요구사항이 관철되느냐 아니면 12명이 해고당하여 한국으로 귀국하느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계속 입항을 거부하자 해고 협박에 입항할 줄 알았던 광산 측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1964년 이래로 많은 한국인 광부들이 에밀마이리쉬 광산에 와서 3년의 계약을 마치고 돌아갔지만 집단적인 입항 거부, 소위 불법파업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태가 이쯤 이르자 광산 측의 제의에 광산 측, 광산노동자평의회(Betriebsrat), 한인광부 73명이 참석한 조정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광산소장은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우리가 요구한 사항들을 앞으로 잘 참작 할 것이며, 오늘 전원이 입항해서 일을 하면 12명에 대한 해고도 취소하겠다고 말했다. 소장의 말을 통역하던 광산통역은 우리들에게 제발 입항하라고 호소하듯 하자 73명의 한인광부들은 동요되기 시작하며, 다행히 12명이 강제귀국은 당하지 않게 되었으니 일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말고 입항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자 농성을 주도하고 있는 14항의 12명은 광산 측이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을 서면으로 받자고 요구를 하자, 두 개의 안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하였다. 그러자 우리들의 분열된 모습에 만족했는지 광산 측은 퇴장해버렸다. 우리들은 장시간 토론을 계속하여 우리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행동을 같이한다는 결정을 했다.

    다음 날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3명, 광산 측, 그리고 우리 73명이 참석하여 조정회의가 다시 열렸다. 그런데 이날은 대사관 측에서 일방적으로 우리들을 설득만 하였다. 수석노무관은 왜 우리가 독일에 왔으며, 우리들의 집단행동(파업)은 불법적이고, 부당하며 조국의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강조했다. 한편으로 설득하고 한편으로는 겁을 주는 것이었다.

    대사관에 따지면서 눈물

    이러한 재독한국 대사관의 노무관 말에 우리들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래도 우리를 지켜줄 거라는 기대가 산산이 깨지면서, 일방적인 대사관의 태도에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였다. 한국대사관은 무엇을 하는 곳이냐? 독일 광산주 편인가? 부당한 차별과 대우를 받고 항의하는 한인광부들 편인가? 따지면서 울고 말았다.

    이국땅에서 우리들을 지켜줄 거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일했던 한인 광부들은 조국도 우리를 버리는 것만 같아서 설음과 분노를 씹으며 더욱 단결하여 우리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고, 해고된 한인광부가 전원 복직되었고, 부당하게 체불된 임금도 추가 지불 받았으며, 한국인을 모욕하는 언행과 폭행은 없어졌다. [민건회 기관지 ‘광장’ 인용]

    가진 것이라고는 빈 주먹밖에 없는 우리 노동자들도 똘똘 뭉치면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광산업주와 지원은커녕 탄압하는 조국 정부도 이길 수 있음을 배웠다.

    60년대 투쟁은 구타 등의 노골적인 차별에 대한 저항이었다. 70년대 들어서는 그보다 제도적 차별을 깨닫고 요구하는 투쟁을 했다. 막내둥이 광부로 온 에발트 광산의 한인 광부들의 체류권 투쟁과 광주 5월항쟁으로 장기체류권을 갖게 된 한인들은 정착이 완성되면서 80년 광주 5월항쟁 계승운동들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한다.

    80년 초에 어느 날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네 엄마는 아파트가 났다고 주택은행에 가보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고있는 하팅거쓰라세(Hattingerstr) 902에 짓고 있는 아파트를 계약했고, 5월 초에 이사를 했다.

    모처럼 한마음조합원과 교우들을 불러서 집들이 걸지게 한바탕 했다. 나는 5월 햇살에 따스한 바람을 맞으며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긴급 속보를 접했다. 화면에서 계속 "코레아! 코레아!" 소리가 나서 텔레비전을 보니 광주시민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장면이 긴급 뉴스로 나왔다. 이렇게 1980년 5월 18일(일요일)은 집을 옮기고 행복했던 우리에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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