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내시라, 대한민국 송경동 시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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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05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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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이맘때였던가. 서울 구석진 골목 작은 교회 문 앞에 적힌 송경동 시인의 시를 접했다. 4대강 막개발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용산 참사에서 울부짖던 시인의 목소리가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끝까지 차마 읽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그러나 시를 읽지 않는 것이 시인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 같아 돌아와 끝까지 읽고 시인과 일별을 했다.

    "언니 가면, 나도 갈께요"

    나이가 마흔 줄을 넘어서니 슬픔과 분노를 마음에 담고 있기가 어려워진다. 가뭄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마음의 결이 온몸에 느껴지는 듯해서다. 시를 읽은 날, 돌아오는 길 고속버스 안에서 바라본 ‘그들의 대한민국’의 강들은 차마 바라보지도 못할 만큼 몸살을 앓고 있었다. 우리의 강들은 어딘가로 철새들과 동행해 떠나버린 건가.

    그렇게 시인과의 일별 후 계절이 바뀌고 시인은 저 멀리 부산에서 홀로 싸우고 있는 김진숙 언니에게 함께 가자고 ‘희망버스’를 제안하고 나섰다. 처음에는 ‘얼마나, 누가 갈까’ 했지만. 기실은 나도 가고 싶었다. 서울로 가서 같이 합류를 해야 하나, 어째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다들 어깨를 붙잡고 부산으로, 부산으로 떠났다가 돌아왔다. 2차 때는 물대포를 맞았다기에, 누군가가 잡혀갔다기에 분하고 몸이 떨려 ‘다음에는 나도 간다!’ 했지만 혼자서 움직일 용기는 없었다.

    어느 날 3차 희망버스 날짜가 잡히고 작고 마른 후배가 “언니, 날짜 잡혔는데”, “언니가 가면 나도 갈게요.” 했다. “가자!” 그리고 새벽같이 짐을 싸고 후배 둘과 후배의 얌전해 보이는 고딩 조카 도영이까지 넷이 손을 잡고 버스에 올랐다.

    어떤 이는 수줍게 자기 소개를 하고, 어떤 이는 당당하게, 어떤 이는 또 비장하게 자기가 왜 희망버스를 탔는지 술회했다. 다들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했다. 정체 모를 울분과 뚜렷한 의지가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어느새 동지가 되었다.

    6시간에 걸쳐 부산 남포동과 부산역에 모였다. 소란스러운 즐거움과 바싹바싹한 긴장감이 우리들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2차 희망버스 때보다는 손쉽게 한진중공업 가까이까지 갈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부산역에 있었던 동지들과 조금 늦게 부산에 도착했던 동지들은-심지어 전주에서 함께 출발했던 다른 버스의 동지들까지-세 시간, 네 시간씩 골목골목을 돌아서 산을 넘어서 영도다리를 겨우 건넜다고 한다.

    자랑하는 내가 얄밉고, 대견하다

    난 너무 쉬워서 심심하다고 거만하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검문을 당하면서 한진까지 온 동지들에게, 후에는 매우 미안했다. 그 미안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차갑고 어두운 아스팔트 위에서 내 허리와 엉치뼈가 견디질 못해 새벽에는 근처 여관에 들어가 잠을 청해야 했다. 나보다 더 불편했을 어르신들이나 장애인들도 아스팔트 돗자리에서 차가운 잠을 들어야 했건만….

    아침에 일어나 80년대의 부채감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는 기시감을 느꼈던가. 진부한 부채감이라고 비웃을 이도 있겠지만, 나는 그 부채감으로 지금까지 버티며 살아온 듯하다. 여전히 암울하고 엄혹한 현실 속에서 뛰고 있는 송경동 시인들에게 그 부채감이라도 있어서 조금 덜 미안하기도 한 건가.

    그 밤 그 새벽, 함성과 풍등과 노래와 김진숙 언니와의 통화는 내게 울컥함을 넘어 가슴 속에 강렬한 어떤 덩어리를 남겨주었다. 언니는 희망버스를 타고 온 우리들이 고맙다고 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서 우리들에게 맑은 거울을 주는 언니가 정말 고맙고 눈물겨웠다.

    아침에 일어나 김진숙 언니와 한진중공업 동지들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은 슬프고 아쉬웠다.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 것이, 여관에 들어간 자버린 것이 지금도 내게는 아쉬운 한계였고, 그 뒤로 희망버스를 타지 못하는, 바쁜 척하는 내가 미웠다. 그래도 가슴 한 구석, 나도 희망버스를 탔노라고 자랑하는 내가 보여 조금 얄밉지만 대견하기도 했다.

    같이 갔던 후배들, 어여쁜 조카 도영이가 지금도 보고 싶은 것은 그때 그 밤, 그 새벽을 함께 했기 때문인 듯도 하다. 대한민국 송경동 시인들이여, 힘내시라. 우리 도영이가 아직 10대다.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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