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를 회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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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2월 02일 01: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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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흔히 한 가지 ‘이념적 무의식’이 있는 것인데, 이게 바로 (제도적 의회)민주주의 내지 (절차적)민주화를 어떤 절대선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주류’의 관점에서는 ‘산업화’와 마찬가지로 ‘민주화’야말로 대한민국을 북조선 등과 긍정적으로 차별화시키는 어떤 절대적 ‘우리들의 업적’으로 평가되는데, 이와 같은 지배자들의 의견을 또 알게 모르게 수많은 피지배자들까지 수용하게 됩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계급적 함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영구적인 장시간 고강도 노동착취 구조에 구속 받게 하고 커다란 불안 노동자층을 만들어놓은 산업화에 대해서는 그나마 회의를 해보는 것이 적어도 진보진영에서 흔히 가능한 일이지만, 민주화만큼은 거의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어지는 듯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적)민주주의의 그림자, 즉 복잡한 계급적인 함의에 무감각한 것입니다.

    물론 권위주의보다 (절차적 부르주아)민주주의라도 좋다는 사실이야 저도 다 체감했습니다. 1991년, 서울에 처음으로 갔을 때에 거리에서 자주 맡았던 메쓱한 최루탄 냄새와 기숙사 동숙생들이 주고 받았던 잡혀간 선배들의 이야기, 프락치로 밝혀진 ‘가짜 학생’ 이야기 등등을, 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제는 최루탄 대용으로 얼음 물대포를 쓰고, 제가 그 때에 갔던 고려대와 같은 ‘명문대학’에서 잡혀갈 만한 급진운동가도 거의 남지 않아 문제지만, 좌우간 운동권의 투사가 아닌 일반인마저도 부정한 권력에 ‘쫄지’ 않고 살 만큼 (절차적)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돼 천만다행이라는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1991년 같으면 재벌가들의 ‘사설 기쁨조’ 이야기를 그저 입소문으로만 전하고 있었지만,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이종걸 의원처럼 <조선일보> 방모씨에 대해서 "장자연씨를 술/성접대로 결국 자살케 만든 ‘악마’"였다고 발언해 고소를 당해도 무죄로 풀리지 않습니까?

    물론 재벌가들은 계속해서 그들의 먹이가 돼야 할 수많은 남녀들을 자살로 몰고 있겠지만, 적어도 국회의원 정도의 신분이 되면 이 사회에서 사람들을 생으로 잡아먹는 식인종들이 지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도 되니 정말 너무나 먼짓 세계입니다. 선진화가 다 됐나 봐요. 좌우간, 씁쓸한 이야기를 그만두고 핵심을 말하자면 분명 (절차적) 민주주의에 쓸만한 면들은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측면도 보자는 말씀이죠.

    보통선거권과 체제 편입

    국내에서는 민주화 과정은 약 50여년 걸렸지만 (소위 ‘건국’부터 김영삼, 김대중의 집권까지) 유럽 같으면 남녀 구분없는 보편적인 투표권 획득은 한 세기 이상 걸리는 경우들은 수두룩합니다.

    영국을 한 번 보시지요. 1832년의 선거법 개혁으로 남성 중에서의 약 12%의 부유층 및 중산층만이 투표권을 얻어 전체 성인 인구 중의 투표권 보유자가 약 6%가 된 것이죠. 그게 하나의 시작이 되어 1918년과 1928년의 두 차례의 국민대표법 채택으로 드디어 재산을 기준으로 해서 투표권을 제한시키는 제도가 폐지되고 보편적 투표권이 획득됐습니다.

    거의 한 세기 정도 걸린 셈이죠.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 과정에서 투표권이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획득된 측면은 큽니다. 예컨대 1830~40년대의 보통선거권 획득 운동인 차티즘 운동은 정치적 노동자 파업과 같은 강력한 민중투쟁의 수단들을 세계사에서 거의 최초로 발견한 셈입니다.

    그런데 보통선거권이 밑으로부터 쟁취된 측면도 있지만, 또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영국에서 그때까지 없었던 징병제가 처음으로 실시되는 등 빈민까지도 총동원해야 할 강력한 ‘전시동원 국가’가 창출된 것이죠.

    이 국가의 순량한 국민이 되어서 대륙으로 건너가 같은 노동자, 농민인 독일 병사들의 가슴에 아무 주저없이 총검을 박을 ‘충군애국의 평민’들을, 국가가 만들어야 했습니다. 평민들을 국가와 자산계급을 위한 살인자로 만들자면, 그들에게 겉으로라도 최소한의 참정권을 주어야 된 것이었고, 이러한 차원에서는 1918년의 ‘민주화’는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체제 편입’의 기제이기도 했습니다.

    참정권과 지배자들의 계산

    또, 그들에게 최소한의 ‘국가 사회 구성원의 자격’을 주지 않으면 그들이 볼셰비키를 벤치 마킹해서 자신들을 4년 동안 죽고 죽이게 만든, 그 흡혈귀 같은 국가를 아주 박살낼 우려도 그 때에 컸습니다. 참정권을 얻어 기존의 ‘온건한’ 정당들의 선전의 대상이 되어 기존의 정당 질서 속에 편입된 노동자가 덜 위험할 거라는 건 그 당시 지배자들의 계산이었죠.

    아마도 누군가가 저에게 "그러면 수많은 빈민들이 투표권을 얻은 것은, 공산당 등 반체제 투쟁 단체들에게 유익하지 않았겠느냐? 그들이 왜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서 체제와의 싸움을 진행해 체제를 평화적으로 본격적으로 바꿀 수 없었겠느냐"고 물어볼 것입니다.

    글쎄, 제1차대전의 종료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급진화 추세를 타서, 1922년에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최초로 영국 국회의원이 되긴 했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아무리 ‘민주화’된 나라라 해도 자본주의 국가인 이상 체제의 본격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영국 공산당 같으면 1926년 총파업 때에 ‘소요선동죄’에 걸려 그 지도자 12명이 영어의 몸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신사적’ 나라 영국에서 온갖 탄압들을 다 맛봤습니다. 그리고 감옥행만은 문제입니까?

    "모스크바의 간첩들"이라는 모든 부르주아 신문들의 끝이 안보이는 비방전, 학교, 교회에서의 반공주의적 세뇌, 공산주의자들을 최악의 라이벌로 생각해서 그 배격에 모든 힘을 다 모으는 보수화된 노조 관료들의 악질적 방해…

    형식적 민주화가 백 번 돼도, 이미 보수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급진 분자’들이 아무리 ‘침묵하는 대다수’의 객관적인 이해관계를 표방한다 해도, 절대적으로 지배자들의 이념적 헤게모니의 철사망을 뚫어버릴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급진 분자들은 (의회) 민주주의 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할수록 그들 스스로가 보수화의 길을 걸어 그 바깥의 사회와 동질화되는 것입니다.

    일본 공산당의 경우

    예를 들어서 일본공산당을 보시지요. 1950~55년간, 즉 제6회 전국협의회까지 무장투쟁의 노선을 걸었지만, 그후에는 (절차적)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각급 의회 진출에 올인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는?

    1972년에 491개의 의석이 있는 국회에 38명의 의원을 보내는 등 꽤 가시적인 "유의미한 정치적 소수자"의 위치를 획득했지만, 그 대가로 포기한 게 한두 가지이겠습니까? 무장투쟁 시기에 생사를 같이 했던 재일조선인 등 종족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거의 버렸다시피 하고, 노조는 관례화된 춘투 등에 안주해 보다 더 공세적인 투쟁을 포기하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이나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매우 느슨하게 하는 등 ‘세계’에 대한 관심도 거의 잃은 듯했습니다.

    결국 평화헌법 사수 등 ‘민주주의 수호’와 복지예산 증가 등의 제한적인 (현 체제 하의) 재분배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보다 본질적인 사회개혁에 대한 욕망을 접고 만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실망으로 신좌파가 공산당을 버려 독자적 길을 걷게 됐는데, 신좌파의 경우에는 공산당 정도의 대중성마저도 잘 없었기에 결국 대중들과의 유리된 입장에서 극소수 영웅주의, 맹렬 가투주의 등으로 그 혁명적 에너지를 별 효과없이 소모시키고 말았습니다.

    공산당과 신좌파의 분열은 일본 진보 운동의 일대 비극이었는데, 그 분열의 원인은 어디까지나 공산당의 현실 안주, 혁명성 상실에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의 적극 참여는 이처럼 과거의 혁명가들을 순치시키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의회)민주주의는 대단히 보수적이며 부족합니다. 직업 정치인들이 기업들의 막대한 정치자금을 이용해 유권자들에게 그 정치적 ‘상품’을 판매하고, 그 판매가 성공해 금배지만 달면 직업 관료, 기업인들과 하나가 되어서 기존의 체제를 기득권층의 이득을 위해 그대로 운영하는 것은,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라고 보기 힘듭니다.

    진짜 민주주의

    이러한 의회민주주의를 급진적인 정치적 선전, 민중의 생활개선 투쟁 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만, 사회주의자로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수준에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우선 착취자들의 선거 왜곡 (정치자금 증여 등)의 완전한 차단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보다 숙련공 정도의 보수를 받고 일절 특권이 없는, 언제나 유권자에 의해서 소환이 가능한 민중의 대표자들이 매순간 유권자들의 감시와 견제, 지도를 받고 유권자들의 이해관계를 충실히 실행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서 그러한 진짜 민주주의를, 꿈만 꿀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통상 민주주의라는 부르는 현 제도는 ‘짝퉁’ 물건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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