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부 위기→유로존 붕괴→파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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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29일 11: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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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에서 시작된 남부 유럽발 재정 위기가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금은 자리에서 물러난 게오르기 파판드레우 전 총리가 10월 27일 주요 채권 국가들이 새롭게 합의한 구제금융 안의 수용 여부와 총리직을 연계한 신임 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불과 이틀만에 철회한 이후, 남부 유럽의 재정 위기는 스페인과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와 벨기에 및 독일의 금융 안정성을 위협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지금까지 운이 좋게도 국제 금융 투자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비춰졌던 동유럽 국가들의 재정 및 금융 안정성 문제가 새로운 연쇄 뇌관으로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유럽 재정 위기의 최근 현황을 살펴보고, 이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더불어 이 유럽발 재정 위기가 어떠한 채널을 통해 한국 경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큰 틀에서 한국 정부와 사회 운동 단체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한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0.27 ‘합의’와 파판드리우의 ‘실패한 쿠테타’

    우선, 지난 10월 27일에 열린 유럽 재무장관 회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해보자. 잘 알려진 것처럼 이 회담의 합의안은 (1)50%에 상당하는 그리스 정부 발행 국채를 손실 처리하고, (2)유럽 금융 안정 기구의 확대 운용에 필요한 재원을 추가적으로 마련하며, (3)프랑스와 독일 등의 서유럽 채권 은행들의 자본 확충을 돕기 위한 예비 자금을 확보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담 직전부터 이와 같은 조치들이 합의안대로 시행된다면, 그리스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그리스의 국내 은행들은 심각한 자본 손실을 입을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은행들의 연쇄 파산과 그에 따른 그리스 금융 시장의 붕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이와 더불어 이미 세 번에 걸쳐 ‘트로이카'(유럽연합과 유럽중앙은행 그리고 국제통화기금)가 마련한 추가 구제 금융을 지원받는 대가로 그리스 정부가 지금까지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련의 조치들 — 예산 축소와 세금 인상, 공공 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대량 해고 조치와 임금 동결, 각종 연금 수혜 연령의 인상과 지급 동결, 그리고 수도, 전기, 가스 등의 주요 공공 서비스 분야 국영 기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민영화 조치 등 — 이 야기해온 심각한 경기 후퇴 상황을 고려할 때, 이 합의는 그리스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가 유로 통화권에서 이탈해 나갈 것을 전제하고 그에 따른 부정적인 역내 파급 효과를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처음부터 분명해 보였다.

    바로 이 때문이었을까? 게오르기 파판드리우 전 총리는 총리직 사퇴와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그리스 보수 야당 세력들의 주장을 맞받아치면서 총리직과 추가 구제금융 수혜 조건으로 서유럽 채권 국가들이 강요한 강도 높은 긴축 정책에 대한 국민 총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파판드리우 전 총리는 아마도 이같은 선언을 통해 그리스 내부의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외부적으로는 트로이카로부터 추가적인 양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파판드리우 전 총리의 어설픈 ‘쿠테타’ 시도는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

    이 발표가 있은 직후 국제 금융 시장은 요동을 치기 시작했고, 이에 놀란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파판드리우 총리를 불러 신임 투표 안을 철회할 것을 협박, 종용했다. 결국 파판드리우 총리는 총리직 신임 투표 안을 철회하는 대신 보수 야당과 합의하여 연합 정부를 구성하고 자신이 배제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안에 합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3~4일).

    주변부(남부)에서 중심부(서부)로, 다시 주변부(동부)로

    그러나 이와 같은 ‘수습안’ 발표에도 불구하고 남부 유럽의 재정 위기 상황은 더욱 심각한 형태로 커져만 갔다. 그 이후 이탈리아 정부가 발행한 10년 만기 국채의 이자율이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기 시작했고, 11월 25일을 기점으로 최고 8%대로 치솟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 정부가 국제 통화 기금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던 당시의 상황과 맞먹는 수치다).

    게다가 지난 주 독일 정부가 시도했던 국채 공매가 예상과는 달리 저조한 판매량에 그치는 등, 그렇지 않았더라면 유럽 채권 시장에서 거의 유일한 준거점(benchmark)으로 남아 있었을 독일 정부의 국채도 국제 금융 투자자들의 외면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동안 국제 금융 투자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렸던 동유럽 국가들의 재정 및 금융 불안정성 문제가 새롭게 거론되고 있다는 데 있다.

    11월 21일을 기점으로 헝가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국제 통화 기금에게 구제 금융 안을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고, 동유럽 국가들의 금융 기업은 물론 정부 채권에 대한 노출 위험(exposure)이 높은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오스트리아 정부가 자국 은행으로 하여금 이 나라들에 추가적인 신용 대부를 하지 말라는 행정 명령을 내린 사실이 밝혀졌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조치가 자국 은행의 해외 대출 대비 자본 규모를 확대하고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고 판단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막대한 액수의 자금이 중단기 신용 대부의 형태로 동유럽 각국의 금융 시장에 공급된 상황에서 이 조치가 얼마만큼 기대한 바의 효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동유럽 국가들의 민간 은행들이 추가적인 신용 대부를 더이상 받지 못할 경우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파산할 수 있고, 이것이 오스트리아와 독일 은행들의 자본 건전성에 악영향을 미쳐 해당 은행들이 다른 나라에 공급한 신용 대부를 급속히 축소시키고, 결국 이것이 다시 동유럽 각국의 연쇄 파산과 채무 불이행 선언으로 파급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만약 실제로 이러한 사건의 연쇄가 아무런 조정 없이 발생할 경우, 애초 남부 유럽 국가들에서 시작된 재정 위기와 유로존의 붕괴는 동유럽 각국의 채무 불이행 선언과 결합되어 문자 그대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 금융 시장의 위기감을 반영하듯, 이미 남부 유럽 국가들은 물론 서유럽 채권 국가들의 은행에 대한 신용 부도 스왑(Credit Default Swap; 보유하고 있는 금융 상품의 가치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경우에 대비해서 추가로 사고파는 일종의 파생 보험 상품) 지수가 치솟고 있고, 미국의 금융 기업들 간의 상호간 거래 비중이 대폭 줄어들며 거래 시 따라붙는 이자율 프리미엄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시나리오 1 – 그리스의 경우

    지금까지 진행된 사태를 놓고 볼 때 그리스와 남부 유럽 국가들의 채무 불이행 선언과 유로존 이탈은 불가피한 현실로 판명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미 많은 학자들이 우려해 왔던 것처럼, 그리스의 이와 같은 조치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파국적인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

    우선, 그리스 정부는 유로화가 아닌 별도의 통화를 발행하고 이 통화를 기초로 새로운 금융 질서를 수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더불어 자국의 금융 기업들을 통폐합하고 자본 시장을 어떤 식으로든 재편성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릴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 정부가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는 그 순간 그리스는 해외 금융 시장에서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결국 그리스 국민들은 외부의 지원 없이 처음부터 새롭게 자국의 재정, 금융 및 산업 질서를 다시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떠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제조업 분야의 수출 기업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자체적으로 식량을 수급할 수 있는 농업 기반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그리스 국민들과 정부 지도자들이 이와 같은 지난한 과제를 빠른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최악의 경우 그리스 경제가,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 금융 위기가 발생했을 때 그러했던 것처럼, ‘원시 경제 체제’로 퇴락하거나 국민들이 생존을 위해 대거 농촌이나 해외로 이주하는 사태,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극심한 정당간 갈등과 사회적 혼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나리오 2 – 유로존의 경우

    그러나 설사 그리스 정부가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자국의 경제 질서를 재수립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정부의 채무 불이행 선언은 직접적으로 유로 통화권에 타격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 등의 서유럽 채권국 은행들은 그리스와 남부 유럽 국가들의 채무 불이행에 따른 손실을 고스란히 떠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해당 은행의 부실화와 연쇄파산을 막기 위해서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다시 자국의 금융 시장에 긴급 유동성을 공급하거나 해당 은행들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국내 금융 시장에 대한 구조 개혁 조치를 단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재원이 소요되고, 장차 파급될 금융 불안정성이 어느 선에서 차단될 수 있을지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독일과 프랑스의 은행들은 현재의 재정 및 금융 위기가 불거지기 이전까지, 그리스를 포함한 남부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과거 구소련 공산주의권에 속했던 동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의 은행과 기업 및 가계에 막대한 돈을 빌려주었다.

    과연 그리스 발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단행되는 금융시장 질서 재편 조치들이 취해지는 과정에서 서유럽의 민간 은행들이 동유럽 국가들에게 대출해 주었던 자금을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회수할지에 따라 남부 유럽의 재정 위기가 서유럽에서 차단될지 아니면 동유럽 국가들의 재정 위기와 연쇄 지급 불이행 사태로 파급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계속)

    * 이 글의 필자 신희영은 미국 뉴욕 신사회과학원 (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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