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장구석 어정쩡 좌파 "서사 바꿔라""명박퇴진, 비준무효" 계급담론 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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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27일 09: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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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26일 서울에서는 한미FTA에 반대하기 위해 집결한 1만5천 명의 ‘촛불시민’이 광화문 4거리를 점령했다. 2008년 이후로 3년만의 일이다. 집회의 열기는 뜨거웠고, 또한 평화로웠다. 그렇다. 그날의 집회는 너무나,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어정쩡한 진보의 표정

    1만5천 명이 광장에 모여 평화롭게 국회의원들의 연설을 들으며 MB심판의 의지를 다지다가 평화롭게 자진 해산했다. 한미FTA가 가져올 파괴적인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날의 평화가 미래의 누군가에게는 폭력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요즘 집회 현장에서 소위 ‘진보진영’의 표정은 어정쩡하다. 그들은 활짝 웃지도 엉엉 울지도 못하고 있다. 지난 5년간 고독하게 싸워온 한미FTA 전선에 ‘애국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최전선에 나서고 있으니 기쁘고도 기쁠 일이지만, 요즘 집회 현장의 분위기 속에선 진보진영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은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의 광장에선 과거에 한미FTA를 MB못지 않게 무대뽀로 추진하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한미FTA 결사반대론자로 변신해 투쟁의 주역 역할을 하는 희극적이고도 비극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한미FTA 반대 투쟁에 나선 사람들. 

    그 동안 한미FTA 싸움의 기반을 다지고 거리에 나서 반대해온 사람들은이 ‘총선심판 만능설’을 설파하며 한미FTA를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마음껏 활용하는 모습을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보고만 있다. 선거로 MB를 심판하면 한미FTA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구호에 열광하는 촛불시민들 틈에 어색한 표정으로 끼어 앉아 있는 이 ‘운동권 세력’은 촛불시민들로부터 그렇게 환영받는 것 같지도 않다.

    실제로 어떤 좌파 단체는 발언대에 오른 한 순진한 촛불 여고생에게 "불순한 의도로 끼어들어 집회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을 면전에서 듣기도 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거기에 대응해 싸울 수도 없다는 것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한미FTA를 반대하며 거리에 나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고 있는 상황이랄까…

    비준무효, 명박퇴진에 질식된 계급담론

    속 좁게 원죄를 따지고 들자는 게 아니다. 오늘날 광장에서 타오르는 이 열기가 과연 우리 사회에 무엇을 남길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문제로 상징된 한미FTA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매듭지어질 것인가? 이래가지고 우리가 한미FTA를 넘어서고 나아가 더 나은 사회로 진일보하는 성취를 남길 수 있을까?

    한미FTA는 명백하게 계급 의제이고, 엊그제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오늘날 광장에는 계급 담론이 실종되어 있다. 광장과 거리에 FTA 반대 목소리가 가득한데도 말이다. “(한미FTA)비준 무효, 명박 퇴진” 이 구호가 모든 계급담론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이다.

    광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이데올로기는 "독재 타도, 민주주의 실현"이고, 한미FTA는 ‘독재자의 꼼수’로 상징화되고 있다. MB라는 레임덕 허수아비의 얼굴에 독재자라는 분칠을 해놓고 ‘구국의 투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독재에 맞선 촛불민주주의’라는 상징으로 향후 정치 권력을 얻으려는 세력 아닌가? 이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

    문제는 국회의원이 선거에서 득표를 위해 애쓰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계급정당이 아닌 (혹은 그러길 최근에 포기한) 국회의원들이 한미FTA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이렇게 된 데에는 정당들 간의 지각변동으로 계급정당이 실종되어 버린 상황 자체도 토양이 되었을 것이지만, 한미FTA 문제에 대한 대중의 일반적인 인식 자체도 문제 해결에 계급정당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한미FTA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산되어 있다. 문제 인식에 대한 서사를 둘러싸고 정치세력 간에서도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반대 의견은 크게 ‘FTA 원천반대’, ‘독소조항 반대’, ‘한나라당 날치기 반대’로 나뉘어 있다.

    지난 11월 5일 민주당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FTA 반대 여론에게 반대 이유를 물은 결과 ‘일부 계층에만 혜택이 돌아가서'(34.7%), ‘국가주권 침해'(27.3%), ‘피해대책 미흡'(22.0%)로 나타났다고 한다.(뉴시스 11.11.8)

    계급적 이해 대신 드라마가 장악한 광장

    3분의 1은 일부 계층만을 위한 한미 FTA를 원점부터 반대한다고 볼 수 있고, 3분의 1은 국가주권을 침해하는 매국적 FTA 독소조항에 반대하며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고, 3분의 1은 농업 등 피해부문에 대한 대책과 토론 없이 밀어붙이기 식의 추진을 문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나라당 날치기 이후 반대 의견으로 돌아선 사람들일수록 더 절차적인 문제에 주로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반대하는 이유야 어찌되었건 결론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게 다 ‘가카’의 잘못된 실정이라는 것이고 그 해결을 위해선 ‘대통합 단결’하여 가카와 한나라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광장을 지배하고 있는 인식은 계급적 이해 같은 차가운 계산이 아니라, 가슴을 뜨겁게 하는 어떤 드라마틱한 스토리다. 거기엔 선과 악의 대결이 있고 분노와 감동이 있다. 한미FTA 반대집회를 지배하는 서사는 ‘부자만 위하고/ 매국노이며/독재자이신’ 희대의 악당 ‘가카’가 꾸미는 검은 음모(이번엔 한미FTA)와 이러한 불의에 맞서는 정의로운 의인들(나꼼수, 최루탄 국회의원) 및 촛불시민이 벌이는 힘겨루기의 드라마다. 거기엔 계급적 대립 대신 선악의 대립이 있고 계급적 연대 대신 ‘깨어있는 민주시민’끼리의 화합이 있다.

    한국의 대중은 계급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지 않으며 상당히 금기시되어 있기도 하다. 그것을 대신 하는 것은 의인과 악인의 대립(혹은 집단주의적 니편 내편의 대립)과 민주/반민주의 대립이다.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진보진영은 광장 한 구석에서 불만스럽게 중얼거린다.

    "한미FTA를 추진한 것은 신자유주의자인노무현 대통령이었잖아.", "노무현 추종 세력의 반성과 성찰 없이는 한미FTA와 자본의 공세를 극복할 수 없을텐데…" 이런 말들을 조용히 읊조릴 뿐 큰 소리로 하지도 못한다.(요즘 광장에서 이런 소리 어설프게 하다간 돌 맞을 분위기다.)

    "한미FTA는 항상 자본의 편에 서있던 노무현의 원죄다" 같은 소릴 하고 나섰다가는 그나마 살아나고 있는 FTA투쟁 판이 깨질까 쉬쉬 하는 것이 요즘 광장의 분위기인 것 같다.

    잔챙이 대신 왕성방을 무대로 올리자

    그래서 진보진영이 계급담론에 불을 지피기 위해 들고 나오는 것 중 하나가 요즘 유행하는 ‘1%대 99%’라는 슬로건이다. ‘1%만을 위한 한미FTA, 99%를 위해 폐기하자’ 하지만 이런 주장 역시 MB심판론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부자만을 위해 일하는 악당 MB를 타도하면 되는 거니까. (사실 강부자 고소영 정부라는 비아냥은 인수위 시절부터 있었다) 그래서 혹자는 ‘MB는 독재자가 아니다!’ 라는 논리를 설파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저거 조중동 아니야?’라는 식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바꿀 수 있다면 누군가가 바꿔주길…)우리는 대중의 스토리에 끼어들 필요가 있다. 선악 대결의 드라마라는 인식을 깰 수 없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악역, 진정한 악역이 아닐까 한다.

    누가 진정한 악역인가, 진작부터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인가? ‘미래권력’ 박근혜인가? 안철수인가? 그런 잔챙이들 말고 하부구조의 지배자인 ‘왕서방’을 무대에 올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 한미FTA를 추진하는 곰(이명박)과 그것으로 돈을 버는 왕서방(이건희)이 있다는 것은 진보진영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왕서방은 무대 위에 제대로 노출된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우리는 회장님에게 관대하다.

    회장님의 ‘악행’에 관해 우린 상당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고, 이 문제로 수 년째 싸워온 사람들 또한 우린 알고 있다. ‘한미FTA는 삼성의 프로젝트다.’ 새사연 정태인 소장의 주장이다.(관련 인터뷰)

    ‘의료민영화도 삼성의 프로젝트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실장이 수년 전부터 해오던 주장이다. 한미FTA와 의료민영화는 서로 유기적으로 얽힌 문제이고, 삼성이 찍는 한 편의 영화에 나오는 두 시퀀스라고 볼 수도 있다.(관련 기사)

    최루소년 김선동과 김용철 변호사

    이런 관점이 광장에 나온 누군가에겐 충격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고 본다. ‘또 하나의 가족’인 줄 알았지만 사실 한미FTA와 의료민영화 추진 세력인 삼성. 노무현 대통령과 ‘가카’ 뒤에 언제나 있어왔던 삼성. 독재국가가 아닌 재벌왕국 대한민국. 이런 서사가 광장을 지배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광장의 분노가 회장님에게 이어진다면, MB와 죽도록 싸우는 것보다는 조금 더 계급적인 투쟁이 되지 않을까? 모르긴 몰라도 양극화 같은 계급적 문제에 뿌리를 두고 발생한 대중의 분노가 ‘가카’ 혼자 희생양이 되어 제단의 제물로 바쳐지고, ‘새날을 약속한’ 야5당의 승리로 마무리 되는 것보다는 조금 나을 것이다.

    가카가 맞는 돌을 회장님이 맞고, 한미FTA 날치기 국회의원 사진이 실린 신문 1면에 삼성장학생의 사진이 실리고, ‘최루소년’ 김선동이 받는 박수를 삼성비리를 폭로한 김용철이나 삼성노조를 세우다 해고되어 지금도 복직투쟁 중인 박종태가 받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런 광장은 지금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런 서사를 담은 한미FTA 투쟁의 상징과 구호들이 우리에게 남는다면, 가카가 무대에서 내려간 뒤에도(퇴진, 퇴진 하는데 사실 퇴임이 1년밖에 안 남았다. 가카가 떠나고 나면 우린 대체 누구랑 싸울 것인가…) 우리가 앞으로 계급적 이익을 지키고 관철시키는 움직임을 건설해 나가는 데에 작은 초석이라도 마련될 수 있을 지 모른다.

    이런 서사라도 띄워 광장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싸워나갈 진짜 적이 누군지 생각해보게 하는 것, 또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열광하는 정치인들에게 (가카가 아닌)삼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도록 하는 것이 한미FTA 투쟁의 ‘원조’였지만 어느새 광장 한 구석의 무기력한 구경꾼이 된 ‘좌파’들이 광장에서 해야 할 역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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