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 해산, 조기 총선, 조약 파기
        2011년 11월 23일 05: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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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준무효!”
    “명박퇴진!”
    22일 밤 명동에 모인 시민들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서면서 외친 구호다.

    시민들의 심정과 소망을 오롯하게 담은 구호이지만, 생각해보면 의미를 찾기 어렵다. 비준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는 단호함이지만 날치기는 어찌됐건 한미FTA가 비준됐다는 의미다. 대통령 퇴진은 봉기 수준의 저항을 결심해야 한다.

    지도부 없이 모인 자율적 시위대의 분노 표현으로는 적절하지만 정치적인 목표나 전망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비상한 시기에 급진주의자의 선택과 구호는 무엇이 되어야 하나. 급진주의자들은 대중에게 무엇을 제시해야 하나.

    반년 뒤에 심판하자?

    우선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같은 보수야당, 자유주의 진영의 구호는 분명히 오는 4월 총선에서 표로 한나라당을 심판하자일 것이다. 예의 쫄지마 구호를 연신 외치며 5개월을 기다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왜 여권은 이런 급작스러운 날치기를 강행한 것인지. 정치평론가들의 골치 아픈 분석을 기다릴 필요 없이 역지사지 생각해보면 너무 뻔하다.

       
      ▲  2008에서 2011로, 거리의 투쟁. 3년주기로 반복되는 민주주의를 위한 동원훈련. 이번엔 쇠고가 아니라 날치라는 점이 다르다. (진보신당 사진제공)

    여권의 입장에서 한미FTA의 연내처리를 포기하는 것은 야권에 대한 백기항복이다. 특히 청와대 입장에서는 남은 1년을 식물정부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내년으로 넘기면 총선에의 타격이 너무 크다.

    한미FTA를 포기한다는 선택지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여당으로서는 어차피 맞을 매라면, 조약의 비준을 내년 4월 총선과 하루라도 멀리 떨어트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대중의 망각과 여론의 냉각에 기대고, 날치기에 대한 반발을 무마할 정책 대안을 준비할 수 있다.

    친이건, 친박이건, 쇄신파건 한나라당 의원 전부를 공범자로 만들어 야당에 맞서 똘똘 뭉친 운명공동체이게 하려는 여권 지도부의 계산도 있을 것이다. 즉, 4월 총선 심판론은 여당에게 두려운 구호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가장 잘 대응할 수 있고, 또 가장 바라는 일정이다.

    이 시점의 날치기는 최악의 경우 연말 예산안 처리를 불가능하게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이 이걸 모르고 악수를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마저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민주당 입장에서 눈 뜨고 날치기 당했다. 이들 실력에 복수(?)할 방법은 예산안을 붙잡고 의미 없는 투쟁을 벌이는 것뿐이다.

    당장은 여론의 악화와 저항에 부딪치겠지만, 오히려 예산안 통과의 실패로 연초부터 국정이 마비 상태로 갈 경우 여당은 국가를 담보로 투쟁하는 야당이라는 선전을 통해 반대세력을 무책임 집단으로 몰고 국면 전환을 시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4월에 표로 심판하자는 구호는 급진주의자의 전략이 될 수 없다.

    전야당 총사퇴와 국회 해산

    급진주의자의 대안은 국회의 즉각적인 해산과 이에 따른 조기 총선 요구, 그리고 차기 의회에서 조약 자체를 파기하는 것이다. 이는 민주당 등 보수야당에 대한 대중적 압력과 근본적 비판을 통해 실현할 수 있으며, 한나라당으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현행 헌법에서 국회의 해산은 불가능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행정부의 국회 해산권은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았고 그래서 87년의 유산인 6공화국 헌법은 이를 아예 삭제해버렸다. 결국 국회의 해산은 외국과 같은 해산 결의가 아닌 사실상의 국회 무산만이 가능하다.

    이는 조승수 의원이 22일 저녁 여의도 국회 앞에서 언급했듯이 야당 의원 전원의 집단사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보정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소속 의원 전원이 사퇴를 결의해야한다는 의미다. 한나라당이 자멸을 결심하지 않는 이상 내년 4월까지 모든 것을 자기들끼리 처리하는 ‘여당 유일 국회’를 유지할 수 없다. 이는 사실상의 헌정 중단이며 계엄령 없는 계엄상태이다. 이 공백을 메울 대안은 조기 총선뿐이다.

       
      ▲사진=진보정치 정택용 기자

    만약 3년 전 촛불정국 때 민주당이 의원 총사퇴를 했더라면 이 글은 물론이고 날치기도, 어쩌면 이명박 정권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민주당은 가능성으로 조차도 의원 총사퇴를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설혹 손학규, 정동영 등 분노한 현 민주당 지도부가 총사퇴를 꺼내든다 하더라도 민주당 의원 전원이 동의하지도 않을 것이다. 민주당 스스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길이다. 오직 대중적인 압력과 동원을 통해서만 이를 민주당에 강제할 수 있다. 민주당의 지지자일지라도 지금 시기에서는 한나라당에 대한 분노만큼 민주당에도 화살을 돌려야한다. 민주당을 근원적으로 비판할 근거는 세 가지다.

    우선 민주당은 한미FTA를 시작한 원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어찌됐건 제1야당, 거대야당으로서 날치기를 막지 못하고 허망하게 당했다는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두 가지 이유는 민주당 일각에서도 이의 없이 받아들일 내용이다. 세 번째 이유이자 가장 중요한 근거는 사실상 민주당이 이번 날치기의 일등공신이라는 ‘사실’이다.

    날치기의 일등공신, 민주당

    23일자 조간을 보면, 보수언론이건 진보언론이건 모두 일치하고 있는 분석이 민주당 내 소위 협상파의 대두를 통해 한나라당이 여론 전환의 자신감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내 보수파가 사실상 한나라당에 투항하는 데도 지도부가 강력하게 제어하지 못했을 뿐더러 당론이 선회할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만 하루를 허비하면서,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저항력에 결정적인 의문을 가졌다.

    또한 이 소동은 대중들에게도 한미FTA가 반드시 막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합의되면 처리할 수도 있는 수준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다. 바로 이어서 한나라당은 민주당 내 보수파와 반대파의 갈등 조장, 대통령의 국회 방문을 통한 여당 내부의 단속, 민주당과 민노당의 공조 이완을 노리는 언론 공세를 차근차근 전개했다.

       
      ▲  "구국의 강철대오" 민주당 협상파 의원들이 구한 ‘나라’는 물론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나라’다. 사진은 협상파의 일원인 김성곤 의원. (김성곤의원실 사진제공)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이 지난 주말 이후 연일 언론에 노출된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당론 거부였다. 특히 송영길 인천시장의 눈부신 활약은 한나라당 지도부로 하여금 22일 날치기 결행을 결심하게 만든 결정타다. 손학규 대표는 당론에 반하는 단체장을 제압하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이들의 반란을 여과 없이 언론에 노출하는 무능을 보여줬다.

    민주당은 한미FTA 반대라는 당론의 정당성을 자기 내부에서 계속 흔들면서, 대중을 설득해 반대 여론을 높이기는커녕 중간지대의 시민들을 오히려 약한 찬성이나 조건부 찬성 쪽으로 밀어 넣는 역할을 했다. 누구보다도 한나라당이 원하던 일이다.

    날치기를 결행한 것은 한나라당인데 왜 민주당이 욕을 먹느냐고 항변한다면, 지난 한 달간의 신문을 보라. 왜 지금 한나라당이 날치기를 결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신문에 분명히 기록돼 있다. 이것이 한미FTA에 반대하고 날치기에 분노하며 한나라당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들이 민주당 의원들에게 총사퇴를 요구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도 충분한 이유다.

    정치적 상상력이 바로 힘

    급진주의자들은 국회 해산과 조기 총선의 구호를 통해 대중들이 민주당에 행동을 촉구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아울러 조승수 의원과 민노당 의원단 등은 선 사퇴를 통해 민주당을 압박해야 한다. 사퇴하면 보궐선거로 이어지는 부담감(지역구의 경우)도 없는데 어차피 한동안 거리에서 살아야 할 진보진영 의원들이 지금 의원직에 연연할 이유도 없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하면 총사퇴는 민주당이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민주당이 크게 살아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걸 알면서도 민주당 스스로는 결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희극이자 비극이다. 현실적으로 조기 총선의 최대수혜자가 보수야당이 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러면 어째서 이것이 급진주의자의 선택인지 의문이 생긴다.

    표면적인 목표는 물론 한미FTA의 사실상의 폐기다. 그러나 과정에서 대중이 어떤 경험과 정치적 각성을 얻을지 생각해 보자. 이는 국회해산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과도 묶여있다. 요컨대 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의 문제다.

    서울시 무상급식 투표를 하루 앞둔 지난 8월 26일 누군가 앞으로 두 달 뒤 오세훈 시장이 물러나고 박원순 변호사가 새 시장이 된다고 주장했다면 그는 필시 소망과 전망은 좀 구분하라는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딱 두 달 뒤 우리는 그것이 실현된 세상을 보았다. 오세훈의 자살골이 조기 시장선거로 이어졌다면 한나라당의 자살골이 조기 총선으로 이어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기 총선을 하면 진보정당이 몇 석이나 확보하겠느냐는 셈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대중들이 국회권력을 감히 접근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참여하고 연대하면 허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험하게 해야 한다. 이 경험의 유무가 이후 한국의 정치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결정할 것이다.

    우리가 외칠 구호

    물론 급진주의자의 요구는 민주당 의원의 총사퇴뿐만 아니라 소위 협상파 의원들의 지역구 박탈과 불출마까지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조기 총선과 야당의 압승이 실질적으로 대통령 권력의 식물화나 조기 퇴진을 의미한다는 것은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방법이 없는 대통령 탄핵 구호는 카타르시스 효과조차 없는 공허한 메아리다.

    23일부터 급진주의자들은 자신의 역량을 거리에 쏟아 부으면서 국회의 해산과 보수야당의 책임, 결단을 압박하는 구호가 대중적으로 채택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진보신당은 지난 통합논의 과정에서 이완되거나 이탈한 당원을 당으로 결집하는 계기로 삼을 필요도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당 지도부 및 지역 당직 투표율을 고려하면, 현장에 투표함을 놓고 당원들이 거리로 결합하게 독려하면서 당의 지도부가 투쟁의 거리에서 탄생하도록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급진주의자들의 결의와 실천만이 시민 대중을 정치 일정에 예속된 유권자가 아니라 상상력을 가진 정치 주체로 바꿀 수 있다. 그게 이 황당한 시대가 급진주의자에게 요구하는 과제다.

    “국회를 해산하라!”
    “민주당 의원은 총사퇴하라!”
    “조기 총선 실시하라!”
    “조약을 파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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