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음악 그리고 사회
    2011년 11월 20일 12:1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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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치열한 시대적 사유와 서양미술 기행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미술과 미술 비평이 어떻게 시대의 문제와 맞닿을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미술기행 에세이로, 1992년 한국에 소개된 뒤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책이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창비, 15000원)는 20여년 만에 나온 그 연작으로, 서경식의 주된 글쓰기 대상이었던 미술이 아닌 서양음악을 소재로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의 또다른 면모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음악이라는 예술이 지닌 고유한 성질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음악이 어떻게 인간, 사회, 시대와 뜨겁게 호흡해왔는지까지, 서경식만의 흡인력 강한 글쓰기로 말해주고 있다.

서경식의 글이 지닌 매력은 평이한 문체로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깊이있는 인식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정면으로 승부하여 그것을 시대와 역사에 대한 성찰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구체적 현실의 모순으로부터 이른바 시대적 보편성을 획득해나간 그의 글쓰기는 그러나 멋을 내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일상의 체험과 느낌을 자신만의 사유로 온전하고도 담담하게 그려 보인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참신하게 받아들여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평이라고는 하나 미술 사조나 개념에 대한 학술적 분석이 아닌, 개인의 체험과 미술작품이 조우했을 때의 진솔한 감정에 대해 서술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으킨 파장은 그 어떤 비평서도 성취하기 힘든 것이었으며, 미술 비평에서 한걸음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꿰뚫는 힘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러한 서경식 글쓰기의 힘은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중산층 이상 엘리뜨 계층의 고급 취향으로서의 클래식음악이 아닌, 한 인간을 깊은 성찰로 이끄는 예술로서 음악 본연의 모습이 더 깊어진 통찰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서경식이 가난한 어린 시절 음악에 품었던 동경과 열등감의 고백에서 출발한다. 문화적 교양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재일조선인 집안에서 자랐기에 그에게 음악이란 “신분이 다른 연인”과 같은 것이었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이라는 표지(標識)고 교양있는 가정의 표지였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일본인’이라는 표지고 재일조선인인 내게 클래식음악이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치스러운 장난감 같은 것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걸어가는 유복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보면 돌이라도 던져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케이스 속의 아름다운 악기를 잠시라도 만져보고 싶다, 무슨 소리가 날지 내 손으로 켜보고 싶다 (…) 애타는 동경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신분이 다른 연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페라의 주인공처럼. ―「어릴 적」(본문 43~44면) 중에서

가난에 더해진 문화적 소외로 인해 가지게 된 열등감과 그럼에도 주체할 수 없었던 음악을 향한 동경은 사실 소년 서경식의 것만은 아니다. 이는 클래식 음악에, 더 넓게는 고급예술에 대해 우리 모두가 느끼는 당혹과 열망이라 할 수 있다.

고급예술을 자유롭게 향유한다는 것은 풍족한 엘리트 집안에서 자라나 어릴 적부터 공기처럼 문화적 축적을 누려왔다는 의미이기 쉽다. 클래식음악은 오디오쎄트나, 값비싼 악기와 음악교육을 동반해야 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을 알고 싶다는 열망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가 다른 클래식음악 에세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음악을 향한 자기고백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이와같이 서경식의 소년시절에서 청년시절,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음악에 품었던 복합적인 감정과 그에 얽힌, 때로는 한없이 서정적이고 때로는 긴장감 넘치는,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어 흡사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하다.

                                                  * * *

저자 : 서경식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봄부터 2년간 성공회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지낸 바 있으며, 현재 도쿄게이자이대학 법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 『고뇌의 원근법』, 『청춘의 사신』,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공저), 『디아스포라 기행』, 『난민과 국민 사이』, 『교양, 모든 것의 시작』(공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시대를 건너는 법』, 『경계에서 춤추다』,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공저) 『언어의 감옥에서』등이 있으며 『소년의 눈물』로 1995년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마르코폴로상을 받았다.

역자 : 한승동

1957년 경남 창원군 시골에서 나서 부산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서강대 사학과를 다녔다. 1986년부터 잡지 <말>에서 일하다 1988년 창간된 <한겨레>에서 2008년 현재까지 민족국제부, 사회부, 정치부(외교통일)를 거쳐 문화부 책·자성팀에서 일하고 있다.

1998년 초부터 2001년 초까지 3년간 도쿄 특파원으로 있었다. 국제부장을 지냈고 문화부에서 타블로이드판 섹션 ‘18.0’ 팀장을 하다 지금은 선임기자 노릇을 하고 있다. 《우익에 눈먼 미국》(데이비드 브록), 《부시의 정신분석》(저스틴 프랭크), 《시대를 건너는 법》(서경식)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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