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드 레프트의 화려한 귀환 or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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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17일 12: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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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울하기만 했던 아키히로(明博)의 치하에서 드디어 한 줌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비록 ‘진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한 때에 학생시절에 저까지도 교재 삼아 공부했던 국가보안법 비판서를 쓰쎴던 박원순씨라는 ‘양식이 있는 중도보수’가 된 데에 이어, 300여일 동안의 고공농성 이후에 ‘김진숙’을 상징으로 삼는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의 투쟁은 – 불완전하지만 – 일단 승리로 일단락됐습니다.

    이 두 ‘사건’은 극우 정권의 점차적인 와해를 상징하는데, 특히 후자의 의미는 아주 깊습니다. 2003년 화물연대의 통쾌한 승리 이후로는 신자유주의 시대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노동자의 대대적인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해고노동자의 숫자는 비록 많지 않더라도 이 투쟁의 전례없는 가시성도, 역시 전례없는 각계각층의 지지도, 부산권 경제에서 한진중공업이 차지하는 위상도 이 승리를 매우 특별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가장 암울한 극우정권의 시대에 가장 전근대성이 심하고 악질적인 재벌을 상대로 한 이 투쟁이 극적으로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요? 40분 후에 제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그 음식과 숙제 등을 챙기느라고 더이상 자판을 두드릴 수 없을 것이지만, 남은 몇십 분 동안 일단 이 승리의 가장 중요한 요인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둡시다:

    1. ‘올드 레프트’의 화려한 귀환

    이번 투쟁의 두 명의 상징적 인물인 김진숙 선생님과 송경동 시인은 대표적인 ‘1980년대형’ 올드 레프트, 즉 정통적 좌파적 노동운동가들입니다. 계급의 이해관계가 몸과 마음에 밴 노동자 출신의 유기적 지식인들이고, 계급의 이름으로 투쟁하시는 분들입니다.

       
      ▲왼쪽부터 김진숙 지도위원과 송경동 시인.(사진=국제신문)

    제가 꽤 좋아하는 송경동 시인의 시만 보더라도 당장 아시겠지만, 그 미학은 전통적인 ‘자연의 미’ 등 서정 주제를 노래하는 미학도 아니고, 원자화된 개인의 의식의 심연을 파편화된 시선으로 고찰하는 포스트적인 미학도 아니고, 말그대로 투쟁의 아픔과 절규와 연대적 기쁨 속에서 태어나는, 그런 종류의 미학입니다.

    지향은 약간씩 다른 부분도 있지만 송경동 시인은 김남주 시인의 적자, 문학적 계승자죠. 그런데 이 투쟁을 이끈 ‘올드 레프트’들은 훨씬 더 ‘소프트’화 되고 인권적 감수성이 성숙된 새 시대의 조건에 알맞게 투쟁을 디자인한 셈이죠.

    쇠파이프와 화염병 대신에 그 자리에 ‘평화 시위’의 절대적인 강조가 들어와 오히려 경찰과 극우 알바 (어버이연합 등등)들의 폭력성을 부각시켰으며, 형식화되고 획일화된 율동과 구호 대신에 그 자리에 다양한 걸개그림, 퍼포맨스, 공연, 아동작가 등 여러 창조적인 지식인들의 참여가 들어온 것입니다.

    시청각적 표현을 즐기고, 다양성을 존중해주는 새 시대의 지향 맞게 투쟁은 재기발랄하고 절대 심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위 시작할 때에 남녀 간 공개 키스를 하고 다양한 음악을 즐기는 칠레 학생들의 시위, 즉 현재의 세계좌파 투쟁의 중심이 된 남미의 시위 문화의 예술성에 근접한 듯한 느낌입니다. ‘포스트’의 무의미한 늪에 빠지지 않고도 ‘올드 레프트’가 잘 진화돼 새 시대와 코드를 맞출 수 있다는 걸, 이번 승리는 잘 보여주었습니다.

    2. 도덕적 명분 선취(先取)

    이 나라 대한민국의 유일한 진짜 ‘국시’는 약육강식의 무한경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잇속을 챙기고 자기 식구 정도 챙겨주고 나머지 세상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은 이 쪽에서 지독하게 정상적인 삶의 방식이죠.

    그런데 또 그러한 사회인만큼, 식구가 아닌 타인을 위해 자율적으로 희생을 하는 사람은 커다란 존경을 받을 수 있고 도덕이 없는 사회의 도덕적 명분을 효율적으로 차지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은 안중근을 존경하는 이유를, 오로지 민족주의로만 봐야 하는가요?

    그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얼마든지 일본 유학쯤 하고 통감부, 총독부 밑에서 주사직이니 군수직이니 맡았을 수도 있었던 부유한 지주의 유식한 아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불특정 다수를 위해 목숨까지 던진 것은 우리에게 유쾌한 느낌을 주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쉽게 보기 드문 일이기에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정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해서, 김진숙 선생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입체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직접적 인연도 없는 동료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로 농성을 하는 드라마틱한 운명의 여활동가 대 부를 세습한 악덕 재벌… 이 대립구도에서 선악이 너무나 분명해 노동운동을 싫어하는 ‘시민’들마저도 그 압도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폭넓은 연대

    임금노동자는 이 사회의 다수(약 70%)지만 조직 노동자는 소수(약 9%)에 불과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전투적인 조직노동자 활동가는 아주 극소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립되지 않고 승리하자면 연대는 생명입니다.

    이념과 이해를 약간 달리해도 적어도 이번 싸움에서 우리와 같은 진영에 서줄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그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찾아 우리 쪽에 데려와야 합니다. 이번 운동은 머나먼 미국의 촘스키 선생이라는 전세계적 ‘운동권’의 거목부터 필리핀에서 한진의 착취를 당하는 이국 동료까지, 국내 야당 정치인부터 미술인, 작가까지,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의 월경적(越境的) 연대를 건설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박원순의 당선으로 표현된 최근의 신자유주의와 극우정권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 반응, 즉 "특권층 1%"에 매우 불리한 국내외의 ‘분위기’도 작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적절히 활용한 이번 투쟁의 건설자들에게 정말로 존경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이제 아이가 곧 귀가할 것 같아, 아무래도 마무리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투쟁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노동자 등 벌써 몇년 간 기록적인 (세계에서 어디에서도 보기 드문) 최장기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도 사회 전반의 연대를 필요로 하고, 비정규직 고용 사유 제한의 법제화, 현존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한 투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번 승리가 자양분이 되어서 개별적 직장의 범위를 넘는 지역적, 전국적 비정규직 투쟁이 조직되어, 노동계의 총체적 공세가 시작되는 것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공세야말로 이번 승리를 최종적으로 의미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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