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연대, '3자 원샷 통합'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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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04일 09: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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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연대, ‘3자 원샷’ 결정의 충격

혹자는 당연한 수순이라한다.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내가 순진하다고 한다. 나라 밖에 있어서 ‘고급정보’가 부족해서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머리를 쇠뭉치로 강타당한 듯한 충격 없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혼란 이외에는 이 소식을 수용할 방법이 없다.

이 소식이 이토록 내게 혼란이고 충격인 이유는 첫째로 통합연대의 결정은 스스로의 정치적 대의명분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진보신당 내에서 지난 1년간 통합파의 ‘진보통합’의 명분은 ‘진보정치의 우경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민노당과의 통합이 부결된 지난 9.4 당대회에서 통합안을 승인하는 것만이 민노당과 참여당의 통합을 저지하고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진보정치 본연의 전망을 사수하는 길이라고 강변했던 통합연대 동지들의 주장이 있은지 이제 겨우 두달이 지났다.

그리고 9.25 민노당 당대회에서의 “민노당과 참여당의 합당을 막기 위해” 노회찬과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탈당한 지 고작 한 달이 지났다. 지금까지 통합연대의 모든 정치적 명분은 “비참여당 진보통합”으로 집중됐지만 지난 3일 이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을 하루아침에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통합연대의 이 “명분없는 결정”은 결국 “비참여당 진보통합”은 오직 진보신당 내에서 통합안을 가결시키기위한 ‘위장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고 밖에는 이해할 길이 없다. 또한 9.25 민노당 당대회의 민노+참여 통합안을 부결시키기위해 각종 서명과 압력을 조직한 이유 역시도 “비참여당 진보통합”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조직적 지분이 보장되지 않은 통합에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통합연대는 9.25 민노당 당대회에서 노무현 정권 밑에서 죽어간 수많은 열사들을 떠올리며 “용서는 해도 잊을 수는 없다”며 통합안에 반대한 권영길 의원과 통합안을 부결시킨 민노당 내 좌파동지들을 무슨 낯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왔으니 우경화는 저지될 것이고 진보정치의 원칙과 전망은 지켜질 것이다”라고 말할 텐가. 스스로 뒤엎은 대의명분 앞에 부끄럽지 않다면 이는 자신의 명분을 지지한 이들에대한 정치집단의 도리가 아니다.

둘째는 마치 3김 시대의 보스정치를 보는 듯한 통합연대의 결정 과정 때문이다. 언론에 따르면 지난 달 31일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의 회동에서 ‘3자 원샷’ 통합방식이 합의되고 바로 사흘 뒤 11월 3일 지역 대표자회의에서 별다른 이견 없이 이 통합안이 통과된다.

1년을 훌쩍 넘은 지난 ‘진보통합’의 논의과정에서 그 어떤 정치세력의 결정도 진보진영 전체의 논쟁과 토론없이 이토록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된 것을 난 본적이 없다. 기획 집단의 의지와 무관하게 통합과 관련된 모든 기획은 이슈화되고 논쟁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흐름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이번 통합연대의 결정에는 이게 없다. 물론 통합연대가 ‘3인 보스’의 결정에 조용히 따르기만 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3김시대 90년 3당 통합을 결정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도 “반대의견 있습니다!”라고 외치며 회의장을 뒤엎은 노무현은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표면적인’ 정치적 명분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정을 이루면서도 별다른 이견과 동요도 없는 진보정치판 “인물 중심의 계파정치”의 모습은 내가 헤어나기 어려운 또다른 충격이다.

통합연대, 무색무취의 진보로 향하다

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이 흔히 잊고 있지만, 진보정치의 위기는 진보정당의 분열 이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다. 분당 이전의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의 소위 ‘4대 개혁’을 중심으로한 보수 양당의 대립 속에서 진보의 독자적 의제를 설정하고 이슈화하지 못한 채, 열린 우리당의 2중대로 집권당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때 이미 진보정당은 16대 국회에 10석의 의석을 제공한 국민들에게 “왜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 정당이 아닌 진보정당이 필요한가?”에 대한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위기는 이명박 집권 이후 보다 심화되었다. ‘반MB’로 표현되는 수구-반수구의 경계를 기준으로 한 정치전선이 보다 강화되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현실화된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이러한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한나라당의 재집권을 저지해야 하는 “정권교체의 급박함”이 모든 정치노선을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진보정치의 기회가 아닌 역설적으로 그 위기로 현상되는 것은 이미 제도정치에 철저히 포섭된 진보의 우경화 탓이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조차도 복지를 말하는 시대에 체제위기를 체제이행을 통해 극복할 진보의 독자적 정치의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진보진영의 독자적 의제라 여겨졌던 보편적 복지가 ‘무상급식’ 논쟁을 거치며 야권의 일반적 의제로 확대되면서 ‘진보정치’의 독자적 의제와 영역은 완전히 소멸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대중의 ‘표심’은 정당하다. 끝없이 추락하는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지지율은 대중의 관심에서 소멸하고 있는 진보정치의 위상을 끊임없이 폭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구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한나라당 후보를 누를 수 없는 민주당의 저질 체력을 빌미로 ‘후보 단일화’를 통해 일부를 양보받는 정치공학으로 생존하는 민노당의 미시적 전략은 진보신당의 유력 정치인들의 생존 욕구를 자극했다.

도대체 ‘진보대통합’의 논리 어디에 사멸한 진보정치의 의제를 복원하고 보수정당과 구별되는 전망을 수립하려는 기획이 존재하는가? 진보대통합은 체제 위기를 체제 이행으로 극복할 진보정치의 기획을 묻지않고, 야권단일화의 파이를 키워 내년 4월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의 의석수를 획득하고 민주당과 대선 후보 단일화를 통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그 기획의 본질이며 전부이다.

이것은 민노당이 진보정치의 근본적 혁신없이 보수정당의 역학구도의 약점을 파고들어 생존하는,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먹을 수 밖에 없는 미시적 생존전략을 확대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기획은 대중에게 “왜 독자적 진보정당이 요구되는가?”를 답하지 않고 사멸한 진보의 독자적 정치의제를 복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상누각일 뿐이다.

따라서 진보통합세력이 추진하는 보수 – 자유 – 진보의 천하삼분의 계획은 진보가 자유주의 진영과의 차별화된 정치의제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허상일 뿐이다. 이것이 어제는 ‘자유주의 세력’이었던 참여당이 하루 아침에 “진보세력이자 통합의 파트너”로 둔갑할 수 있는 이유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의 자유주의 세력인 민주당이 내일 “진보세력이자 통합의 파트너”로 둔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또한 이것이 이념과 전망에 기초하지 않은 진보가 결국 유시민, 이정희, 노회찬, 심상정 같은 인물 위주의 당 정치 구도를 형성하고 보스 중심의 정치를 수행하는, 가장 천박한 보수정당 질서를 자칭 진보정당에서 답보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진보는 이제 무색무취의 정치로 변질되고 열사들의 죽음과 한미 FTA의 원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한 정치적 면죄부가 되어 위장된 보수의 얼굴에 씌워지는 가면이 되고있다.

진보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길을 접을 수 없다

한국의 진보정치는 87년 6월의 민주화가 아닌, 뒤이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산물이다. 따라서 그 심장은 노동정치와 계급정치다. 민주노동당이 지난 당 대회에서 ‘사회주의 강령’을 포기했을 때 이미 체제이행의 당파성을 포기한 것이며, 작금의 ‘자유주의와 진보주의의 혼동’ 속에서 자신의 길을 포기한 것이다.

통합연대는 ‘비참여당’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던지고 ‘대통합’ 하나만을 깃발에 남기면서 “왜 독자적 진보정당이 필요한가”라는 민중의 정당한 질문에 “독자적 진보정당은 필요없다”라고 스스로의 무능을 고백하고 “민심을 따랐다”고 위안하는 무책임을 택했다. 이제 진보정치는 어제의 동지들에게 포위되고 사멸의 나락으로 내몰리는 최대의 위기에 마침내 봉착했다.

금융과 비정규노동으로 대표되는 노동유연화에 기초한 지금의 신자유주의 축적체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이는 민중과 노동계급의 위기인 동시에 이대로 축적을 유지할 수 없는 자본의 위기이기도 하다.

흔히 ‘진보의 의제’로 오인되는, 이제 보수정당인 민주당까지도 수용하고 있는 “보편적 복지”는 노동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비정규노동의 물리적 생존을 유지해야만 하는 “자본 축적체제의 재구성” 기획으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 진보정치가 보수정치의 이러한 “보편적 복지”와 구분되는, 체제위기에 대응하면서도 동시에 체제이행을 내장한 정치기획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진보대통합”으로 위장된 “자본정치의 재구성”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진보정치의 기획은 자본주의 임노동 관계를 침식하면서 근본적으로 이행할 적극적 수위의 “기본소득제”를 정치전략화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진보정당은 이러한 기획하에 비정규노동을 중심으로한 노동정치의 전투성을 복원하고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자본의 저항을 함께 적극적으로 주도해나가야 한다.

이것은 어제의 동지들이 떠난 진보정치에 부여된 어렵고 고단한 길이 될 것이다. 이것은 늘 그랬듯 “언제”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진보가 체제의 붕괴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행을 끈질기게 추진한다면, 지금의 신자유주의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노동계급과 민중들의 삶이 보수정치의 “보편적 복지”로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면, 그 길에 어제의 동지들이 투신하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는가.

다만, 어제의 동지들에게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부디 모든 변절의 인사들이 그러했듯이 자본의 극복과 새로운 체제를 꿈꾸는 어제의 동지들을 부정하지 말기를. 자신의 길을 “진보의 포기”라 말하지 않고 “유일한 진보”라며, 어제 꾸었던 꿈과 동지들은 허망한 망상이라고 말하지 말기를. 그리고 (자신의 길에서) 멀지 않은 날 다시 만나자고 남은 동지들을 기망하는 저주는 남기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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