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노총이 혁신주체? 백배 사죄해야
    주사파만 척결하면 돼? 소가 웃을 일"
    [노동과 희망] "노동운동, 정당정치로부터 철수해야 한다"
        2012년 05월 21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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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사태가 첫 고비에 달한 듯하다. 강기갑 혁신비대위가 출범했고, 이제 ‘구’ 당권파가 된 세력들은 ‘당원비대위’를 만들었다. 일각에서는 ‘시즌 2’ 프로젝트로 “들어가서 바꾸자”는 입당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도 모두 촉각이 곤두섰고,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거의 모든 언론들과 유명 논객들도 이런저런 훈수두기에 바쁘다.

    이 모두의 시선이 통합진보당의 ‘최대 주주(?)’인 민주노총으로 집중되었다. 강기갑 비대위원장이 16일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김영훈 위원장에게 크게 허리 숙여 사과하는 장면이 모든 언론에 올랐다. 강 위원장은 “민주노총이 … 통합진보당에 대거 들어와서 당의 주체로서 혁신하고 개혁”해달라고 주문했다.

    사진=노동과 세계 / 이명익 기자

    민주노총의 대답은 17일 중집회의 결과로 나왔는데, 그 내용은 ‘조건부 지지 철회’였다. 일단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되, 혁신비대위의 조치 결과를 보고 이후 재지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민주노총 내에 ‘제2 노동자 정치세력화 특별기구’를 설치하기로 하고, “통합진보당이 현재의 혼란을 극복하고 노동중심 진보정당으로 거듭나 이 논의에 함께 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혁신비대위는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정치조직인 통합진보당 문제 수습의 주체로 나섬으로써 혁신비대위를 중심으로 한 사태 해결에 힘이 실리는 분위기이다.

    이번 사태의 또 다른 당사자, 민주노총

    그러나 이 과정을 보는 내 마음은 사실 매우 불편하다. 나는 민주노총이 이번 사태의 또 다른 당사자이며, 따라서 통합진보당 지도부 못지않게 민주노총과 산하 산별조직의 지도부들이 우선 그 조합원들 앞에 머리 숙여 백배 사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두세 가지만 적어보자.

    첫째, 이번 4.11 총선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통합민주당과 사실상 ‘일심동체’로 움직였다. 내부 반발 때문에 ‘배타적 지지’만 유보했을 뿐, 반MB 야권연대를 통한 정권교체 기조, 야권 단일후보에 대한 전면적 지지, 통합진보당 비례 후보에 대한 집중 투표, 이를 위한 재정·인력의 대대적인 지원 등이 있었다. 민주노총과 통합진보당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공동의 책임 주체들이다.

    둘째, 이번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거가 ‘총체적 부실·부정 선거’였다면, 민주노총 역시 그로부터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 예컨대 총연맹은 조합원 2만여 명에 대한 ‘ARS 전화여론조사’라고 하는 희한한 방식으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집중적 지지를 결정했다. 한 산별노조는 전직 위원장이 통합진보당의 비례후보로 선거에 나서면서 조합원 4,500명을 당원으로 대거 가입시켜 이들의 집중 투표를 꾀했다. 이석기 후보가 아니라 실은 이 산별노조의 후보가 ‘동일 IP’ 투표비율 1위였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셋째, 통합진보당이 노동 혹은 노동의제를 배제 내시 경시하여 민주노총이 화가 났다는 것도 많이 어긋난 이야기다. 민주노총은 이번 선거를 ‘묻지 마, 반MB’, ‘묻지 마, 야권연대’, ‘묻지 마, 집중투표’의 기조로 임했다. 여소야대를 당연시하고, 여소야대만 되면 “한 번에, 10가지 노동의제를, 100일 안에(1-10-100)” 관철시키겠다는 것이 민주노총의 선거방침이자 2012년 투쟁 방침 아니었나? 그렇다면 선거 과정에서 노동의제 실종 타령은 생뚱맞고, 민주노총 출신이 후보 내지 당선자가 못 된 것에 대한 불만이라면 좀, ‘거시기’하다.

    조직 민주주의 문제, 이미 노동운동 전체에 만연

    좀 더 솔직히 이야기하자. 이번 사태의 발단이 진보정당에서의 ‘조직 민주주의’의 실종에 있었다고 한다면, 민주노총은 이를 ‘야단칠’ 지격이 있나? 없다는 걸 다 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민주노총 산하 조직들의 선거는, 특히 지역본부나 산별 등 상급조직들의 집행부 선거는, 조직 민주주의가 점차 실종되고 ‘패권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있는가?

    투표함을 열었더니 ‘무더기 표’가 나오더라는 이야기, 남의 이야기였나? 부정투표 시비로 법원까지 갔는데, “문제는 있었으나 당락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해서 겨우 면죄부를 받았던 조직이 어디였더라? 지금도 선거 시비 여파로 본부장이 공석인 지역본부는 어디라더라?

    정파 이야기들을 한다. NL이니 PD니, 경기동부니 울산연합이니, 좌파니 우파니 중앙파니, 그러더니 어느덧 “주사파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버린 듯하다. 소가 웃을 일이다.

    노동운동의 지도부, 간부, 활동가들에게 물어보자. 이번 기회에 주사파만 척결하면 우리 노동운동이, 노동정치=진보정치가 제 길을 찾을 수 있나? 아니라는 것 다 알지 않는가? 통합진보당 구당권파가 어떤 정파였는지 몰라서 통합하고 지지했는가? 통합이 맞나 틀리나 싸울 때 기준이 무엇이었는가? 신자유주의 세력과 통합해도 되나, 안 되나가 아니었나? 혁신비대위가 조직을 ‘혁신’하면 이 문제가 해결되는가?

    노동운동, 정당정치로부터 철수해야 한다는 것은

    노동자 중심의 정치운동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는 활동가들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의 고민을 십분 이해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지금은 일단 멈추어야 할 때이다. 노동정치=진보정치가 이 모양이 된 것은 대중조직이 망가지고 있었던 데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다. 밑바닥이 엉망인데, 그 위에 무슨 아름다운 집을 또 짓자는 것인가?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면 정치를 만들 수 있는가? 누군가 나서서 새 깃발을 들면 사람이 모이나? 그러면 새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가?

    아쉽고 억울하더라도, 지금은 멈추어야 할 때인 듯하다. 당을 새로 만들자고 목소리를 높이기 이전에,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러면 길이 다시 보일 것이다. 노동정치의 복원을 말하기 이전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그 교두보들을 먼저 건설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곧 대선 정국이 펼쳐지고, 곧 보궐선거도 있을 것이고, 곧 지자체 선거도 있을 것이니 자꾸 마음이 급한가?

    급할수록 둘러가라 했다. 곪은 상처의 뿌리를 들어내지 않고 봉합하면 더 크게 곪을 뿐이다. 불구경하다가 보따리 잃는다고 했다. 남을 탓하기 바쁘다 보면 내 눈의 들보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돌부리를 탓하기보다, 차라리 자빠진 김에 쉬어 가자고 했다. 천천히 함께 가야 멀리도 가고, 그게 빨리 가는 길이라고도 했다. 우리가 애들이냐고? 그럼 지금 우리가 애들보다 더 나은 생각을, 더 나은 행동을 하고 있는가?

    필자소개
    한국노동운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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