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유럽 극우파가 극성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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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28일 01: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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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유럽 정치 현실의 한 가지 불가사의한 화두는 그나마 공황을 비교적으로 잘 비켜가는 나라들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들이 누리는 높은 인기다. “위기가 극우들의 극성을 부른다”는 상식(?)에 완전히 어긋나는 사실은, 국가 파산과 사상 최악의 생활 수준 저하를 맞고 있는 그리스에는 극우보다 각종의 좌파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유럽 극우, 불가사의한 화두

    지금 그리스 국회에서 극우라고 할 수 있는 ‘민중 정교회 소집'(Λαϊκός Ορθόδοξος Συναγερμός)당은 전체 300의석 중의 15의석 밖에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중도 우파(신민주당) 외에는 국회의 주도 세력들은 사민주의자(154의석), 공산주의자(24의석), 신좌파(9의석) 등이다.

    고전을 거듭하는 그리스는 ‘좌경화’돼 있는 것과 정반대로는, 재정 상황은 유럽연합 안에서는 가장 양호한 편에 속하는 핀란드는 지난 2011년 4월 총선에서 전세계를 놀라게 한 바 있었다. 극우 포퓰리즘의 전형에 가까운 ‘진정한 핀란드인'(Perussuomalaiset) 정당이 돌연히 19%의 득표율을 보여 국회 제3당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이와 같은 ‘포퓰리즘의 폭발’은 하필이면 왜 위기에 비교적으로 덜 노출된 유럽 나라에서 터져야 했을까?

    핀란드뿐만인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우포퓰리즘이 가장 극성을 부리는 또 하나의 스칸디나비아 나라는 바로 스칸디나비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제일 높은 (7만9천 달러 정도 되는) 노르웨이다. 노르웨이 같으면 대표적인 극우 포퓰리즘 정당인 소위 ‘진보당'(Fremskrittspartiet)은 2009년 총선에서 국회의 169 의석에서 41석이나 차지했다.

    지난 9월에 치러진 지방자치 단체 선거에서 득표율은 11.4%까지 급락했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진보당의 전(前) 당원인 아네르스 브레이비크가 2011년 7월 22일에 노르웨이 사상 최악의 대량 살육을 감행하여 70여 명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진보당은 당연하게도 브레이비크의 범행과의 그 어떤 관계도 부인하고 그 범행을 강력 규탄했지만, 진보당 당원 사이에 만연된 반이슬람주의적, 인종주의적 분위기가 브레이비크의 광적인 민족주의적, 배외주의적 세계관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만인이 다 인지하는 사실이다.

    문제는, 브레이비크의 범행이 어느 정도 과거 속에 묻혀 망각될 몇 년 후 같으면, 진보당은 얼마든지 그 2011년 초기의 지지율, 즉 25~30%의 지지율을 확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사회에서 극우 정당의 지지율이 이 정도 된다는 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생각하게끔 하겠지만, 그럴 만한 객관적 이유는 분명히 있다.

    신자유주의 복지국가의 귀결

    핀란드나 노르웨이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사회에서 극우주의 지지자들이 이 정도로 많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현실 같지만, 실은 이 두 사회에서 오랫동안 주도적 역할을 해온 온건 좌파의 신자유주의적 변질의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핀란드 같은 경우에는 사민당의 바워 리뽀넨(Paavo Lipponen)은 1995~2003년간 국무총리이었는데, 바로 그 때에는 신자유주의가 핀란드 사회 속으로 깊이 삼투되기 시작했다.

    자본의 초(超)국가적 운동에 일체 장벽이 거의 제거돼 핀란드의 10대 대기업들의 해외 피고용자 비율은 2002년에 거의 60% (1982년에는 불과 15%이었다)에 달했는가 하면, 비정규직 고용이 ‘자율화돼 특히 저임금, 여성 노동자 중심의 비정규 노동이 사회에서 보다 큰 몫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 전체 근로자 중의 비정규직의 비율은 이미 21%에 달했는데, 이는 유럽연합의 평균치(14%)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었다. 70%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전환을 희망함에도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불가능해서 비정규직의 자리에 남아야 하는 ‘비자율적 비정규직’으로 분류되었다.

    1980년대 말 같으면 핀란드에 거의 없었던 노동파견 회사들은, 1990년대 말에는 이미 약 15만 명의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이와 같은 업체에서의 평균 고용기간은 50일 정도이었다. 한 마디로, 리뽀넨의 정부는 1990년대 초반의 불황을 저임금 노동자에 대한 강화된 착취 등을 통해서 극복해보려 했던 셈이다.

    그리스와 북유럽 국가의 차이

    노르웨이 같은 경우에는, 비록 비정규직의 비율(9% 정도)은 유럽에서 비교적으로 낮은 편에 속하지만, 1990~1997년 온건 좌파인 노동당의 집권 시에 국유였던 대기업의 부분적 사유화를 추진하고 ‘노동의 유연화’를 장려하는 등 공장을 저임금 국가에 이전하려는 기업들의 해고를 제대로 막으려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불안 심리가 조장되는 동시에, 기업세 인하 정책 등의 효과로 거부(巨富)들의 수는 늘어나기만 했다. 노동당이 다시 정권을 잡은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초(超)부자의 수가 두 배 늘어나 지금 180명에 달하는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유연화에 가장 노출된 토건업 같은 부문에서는 오슬로 지역 같으면 약 25%의 노동자만이 정규직이고 나머지는 국내나 외국에서 파견된 비정규직이다. 한 마디로,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온건 좌파는 복지국가의 골간을 유지하되, 사회의 점차적인 신자유주의화를 상당 부분 허용했으며, 1~2%의 최상층(부유층)과 10~15%의 빈민층, 준(準)빈민층의 극적 성장을 추동하는 과정에서 사회를 상대적으로 불안화시킨 바 있었다.

    그리스의 경우 지금 사민주의자들은 민중들에게 매우 아픈 예산 삭감 정책을 집행하는 등 다수와 점차 괴리가 벌어져가고 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 기본적으로 민중들에게 그나마 덜 고통스러운 국가자본주의적 기본틀을 간직하려고 했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지금 예산 삭감 정책에 대한 민중의 투쟁을 이끌어가는 여러 세력 중의 하나다.

    즉,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이들은 그리스의 경우에는 대중적 좌파 정당이라는 배를 얼마든지 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핀란드나 노르웨이는 그렇지 않다. 핀란드나 노르웨이의 온건 좌파야말로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의 전위가 된 셈이다.

    극우와 변질된 온건 좌파

    노동시장 불안화, 소득 격차 급등 등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은, 노르웨이의 노동당이나 핀란드의 사민당의 문을 두드릴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노르웨이에는 노동당보다 더 왼쪽에 있는 사회주의 좌파당(SV)이나 적색당(Roedt) 등이 있는데, 전자는 노동당의 들러리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으며, 급진적 지식인 중심의 후자는 대중성이 약해 노동계급에 잘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핀란드 좌익동맹당(Vasemmistoliitto)은 사민당보다 왼쪽에 있다고는 하지만, 1995~2003년에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해온 사민당의 내각에 참여하는 등 신자유주의 반대 세력으로서의 자격은 심히 모자란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미래의 대한 확신을 잃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되는 저임금 노동자, 영세업자 등은 과연 어떻게 투표하게 될 것인가?

    특히 저임금 노동 시장에서 이민자들과의 경쟁을 벌이게 되는 상황에서 이민 제한 정책을 내세우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에게 가버릴 확률은 꽤 높다. 물론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제시하는 배외적인 정책들은 신자유주의적 노동 위기의 그 어떤 진정한 해결책은 될 리는 없다. 이민자들을 배척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에서의 저임금 노동의 불안함이 개선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극우들의 정치담론은 신자유주의로 변질된 온건좌파의 허를 찌르는 부분들은 분명 있다. ‘진정한 핀란드인’이 핀란드 정당들 중에서 유일하게 유럽연합을 강경 반대하는 것은 그 사례다. 그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민중의 생계 파괴에 앞장서는 유럽연합에 대한 원칙에 충실한 반대를, 왜 사민당과 좌파동맹당은 못하고 있는가? ‘온건함’이라는 이름의 그들의 변질과 무능은 결국 극우들의 발호를 가능케 했다.

    좌파가 좌파답게 실천하기만 하면 극우들이 극성을 부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좌파답게 한다는 것은, 1990년대 이래 ‘“주류’가 돼버린 여러 담론들을 과감히 반대하고, ‘주류’에서 어쩌면 비인기 집단이 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좌파답게 실천하면 극우 극성 사라져

    좌파답게 한다는 것은 부유층에 대한 과세 강화, 유럽연합에 대한 반대, 민영화에 대한 절대 반대와 자원과 에너지 등 핵심 부문 대기업과 은행의 국유화 지지, 그리고 노동계급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우선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간다면 부유층과의 정면 충돌도 각오해야 하고, 독일 등 유럽연합의 중심 국가 지배층과의 충돌 가능성도 각오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고, 계속 우경화해온 노르웨이나 핀란드의 온건 좌파가 결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길로 가지 않는 이상 ‘진보당’이나 ‘진정한 핀란드인’ 정당과 같은 부류들이 상당수 노동자의 표를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좌파가 노동계급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챙기지 않으면, 좌파를 중심으로 해서 뭉쳐진 노동계급의 정치적 정체성 자체가 점차 흔들리게 되고, 어쩌면 부분적으로 해소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계급의 정치적 정체성이 위험에 처해지는 일이야말로 1990년대 이후로 유럽 부국(富國)들의 온건 좌파가 택한 길의 가장 무서운 결과다. 신자유주의 세계체제 자체가 치명적 위기를 맞고 있는 오늘날에는, 과연 그들이 좌파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 이 글은 창간 예정인 잡지 <진보전략>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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