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꼼수', 논객시대의 마지막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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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17일 04: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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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객 시대의 탄생

    2000년 4.13 총선이 끝나자마자 노하우라는 노무현의 홈페이지 게시판을 중심으로 ‘네티즌’들이 모여들고 노사모를 만들었다. 나 역시 거기에 덤벼든 고3 수험생이었다. 강준만의 무크지 『인물과 사상』을 읽고, 딴지일보 김어준의 글을 읽고, ‘씨바’와 ‘좃선일보’를 익히고, 안티조선 우리모두에서 ‘눈팅’을 하면서 평생 조선일보를 보던 아빠를 설득해 한겨레로 돌려보던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눈팅’하던 우리모두의 한윤형(당시 아흐리만)은 서울대 주최 논술대회에서 대상을 타고, 후원(혹은 주관?)하던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거부했다. 우리모두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조선일보의 ‘광수생각’을 뒤집어서 ‘꽁수생각’을 만들고, 조선일보 사설과 김대중, 류근일 칼럼 등에 대해 논술 첨삭지도를 하고, 온갖 논객들이 평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거기에 참여하는 ‘젊은 논객’들이었다. 앞서 언급한 한윤형도 있지만, 그 외에도 10~30대의 많은 논객들이 게시판에서 댓글, 댓글, 또 이어지는 댓글로 논쟁을 했다. 80년대의 탄탄한 필력을 자랑하는 386들부터 논쟁을 하지 않고 ‘눈팅’만 하던 나 같은 10대까지 꽤나 많은 글 쓰는 이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90년대 PC통신에서부터 등장한 흐름, 2000년대에 ‘네티즌’으로 등장한 흐름, 학생운동권 등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글을 쓰고 또 읽었다. 우리모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좌파들은 카피레프트 사이트에서 자료를 받고, 진보넷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진보누리에서 글을 쓰거나, 또 소수파의 사람들은 이스크라라는 사이트에서 진을 치고 놀기도 했다. 여기에는 ‘젊은 논객’들에 대한 진입 장벽이 없었다.

    좌파 이론에서 말하는 ‘주체 생산이론’이라는 것을 적용할 경우, 나는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비평하는 ‘대중적으로 글 쓰는’ 주체들이 대거 탄생한 시기가 바로 2000년대라고 본다. 자신의 삶의 조건, 계급적 아비투스 때문에 정치적 입장이 나뉘지 않았다.

    이건 한국전쟁 이후 아마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체로 각자의 놀던 게시판과 커뮤니티, 대학에서의 만났던 사람들과의 접촉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나뉘었다.

    지금 20대, 30대 초반에 한정할 경우 진보누리에서 놀던 누구는 초창기 민주노동당-진보신당 지지자가 되고 노동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200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대학의 ‘NGO 총학’ 이런 곳에서 ‘색다른 인터넷 세대’의 운동을 경험하거나 ‘서프라이즈’나 노사모에서 놀던 누구는 개혁당-열린우리당 지지자가 되었다. 나도 그랬던 경우였다.

    대체로 2000년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잡은 이들은 온라인 대중정치의 장의 영향을 받았고 생각한다. ‘입 진보’, ‘온라인 수꼴’, ‘노빠’, 그 무엇이든. 그리고 그 온라인 대중정치의 장은 ‘스타’들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진중권, 김어준, 변희재 등. 그들은 여러 종류의 비평·평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뭐라 해도 ‘토론’과 ‘논객’의 시대였다. 그게 경박하거나 품위 있는지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논쟁에 ‘처 발리면’ 안 되는 시기. 대중은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하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대변자를 만들어내곤 했다. 노사모와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노무현이 등장했고, ‘옥-석(이문옥-김민석) 논쟁’이 등장했고 민주노동당의 ‘담론적’ 위치가 만들어졌고, 권영길이 등장했다.

    이명박 정권과 ‘20대 논객’

    그런데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단말마’(트위터) SNS 정도를 제외하면 논객과 논쟁의 공간이 급격하게 축소되기 시작했다. 정치 평론도 급격하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소통’을 말하는 정부는 10년간 만들어진 새로운 담론의 ‘소통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촛불에 ‘명박산성’을 쌓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불통’을 만들어냈다. 또한 진보 미디어의 공간이 줄어드는 만큼 진보적 담론의 소통 공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지상파에서는 아예 그 논객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명박 정권 초반부부터 등장했던 담론이 있다. 그것이 바로 ‘20대 논객’에 대한 담론이다. 고종석이 노정태를 언급하고, ‘3대 20대 논객’으로 한윤형, 노정태, 허지웅(혹은 김현진) 등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우석훈을 중심으로 20대가 ‘책’을 쓰라는 ‘운동’이 시작되기도 했다. 『88만원 세대』를 통해 세대론 이야기와 함께 20대가 갑자기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와 더불어 그렇지 못함에 대한 ‘꾸짖음’으로 ‘20대 개새끼론’도 등장했다. 그리고 많은 지면에서 20대들에게 글 쓸 기회를 할애하기도 했다.

    한 4년의 잠깐 열렸던 공간. 그 안에서 많은 젊은 인텔리들이 대중적 글쓰기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블로거로 ‘스타덤’에 오르면 작은 지면에나마 칼럼 하나 정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0년간의 소통의 공간이 닫혔을 때 그 전위로 ‘젊은 필자’를 통해 돌파하려던 시기. 그게 내가 보는 이명박 정권 4년간의 담론계의 상황이다.

    ‘논객 시대의 종언’

    하지만 내가 외려 말하려는 것은 바로 ‘논객 시대의 종언’이다. ‘논객의 대부’ 진중권이 은퇴해서가 아니고(아마 다시 글을 쓸 것이다), ‘20대 논객’이 없어서도 아니다. 누가 공중파 방송에서 쫓겨나서도 아니다. 그건 바로 ‘논객 시대’의 ‘밑바탕’이 날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꼼수다>는 바로 기존 10년 동안 만들어놓은 ‘논객 시대’의 마지막 발악이다. 김어준은 ‘가카 헌정방송’으로 ‘가카 퇴임’까지만 방송한다고 했는데, 나는 김어준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꼼수다>로 만들어지는 그 ‘시효’ 역시 딱 거기까지라고 본다.

    <나는 꼼수다>의 멤버들과 <나는 꼼수다>를 듣는 많은 사람들의 합의는 지금의 문제를 ‘가카’와 ‘그 일당’의 문제로 간단히 환원시키고 ‘요순’ 시대는 아닐지언정 ‘특권’과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소비하는 맥락도 똑같은 이유에서다.

    박원순을 당선시키고 ‘민주개혁세력’에다가 ‘진보진영 야권 단일화’를 실현하여 대권을 창출하는 것까지가 그들의 목표다. 그런데 ‘가카’가 등장한 것이 과연 ‘꼼수’에 국민들이 넘어가서였을까?

    <나는 꼼수다>는 대중의 망각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대중의 실질적 삶의 붕괴가 만들어내는 연쇄는 이러한 ‘개혁’의 정치에 대한 냉소로 전환된 지 오래다. 그나마 지금 피어오른 박원순에 대한 희망도 이러한 방식이라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대안적’인 진보 혹은 좌파 그리고 당장 ‘민주개혁세력’의 의제와 정책이 없다. 먼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다. 덥석 ‘복지’를 물었지만 당장 이 세계를 어떻게 재편해야 할지에 대해서 아무런 구상이 없는 민주개혁세력의 문제는 차치하고, 진보와 좌파 역시 ‘국민의 뜻’을 받들 뿐 그 국민을 어떤 세계로 인도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상이 없고, 피어오를 담론의 세계가 없다.

    ‘20대 논객’을 위시한 젊은 논객들에게 주어진 역할도 한정적이었다. 일본의 ‘프레카리아트 노조’ 운동에서 떠오르는 이야기와 비슷하게 전개되는 한국의 불안정 노동과 비정규직화를 체험하는 자신과 주변에 관한 ‘비참한 스토리’를 들려주거나, 기존 논객들과 비슷하되 좀 다른 각도에서 현재의 정치에 대해서 평론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화려했던 2000년대의 ‘논객 시대’는 소멸되고 있다. 기존의 논객 중 살아남는 경우는 ‘대의’를 부여잡는 이들밖에 없고, ‘새로운’ 시각을 갖는 20대 논객들은 매번 비슷한 평론을 쓰다 지치고, 돈이 없어 시달리다가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책을 쓰던 20대 좌파들은 이제 2010년을 분기점으로 펜을 꺾고 있다. 이제 몇 명이 남았고 그들도 ‘글 밥’으로 재생산은 불가능하다. ‘저자’로 몇 권의 책을 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의 ‘논객 시대’는 담론 생산과 재생산 모두에서 덫에 걸렸다.

    ‘진보, 야’와 젊은 글쟁이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은 글쟁이들이 많아야 한다는 지점에 동의한다. 많은 글쟁이들이 쏟아져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논객의 생태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현장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운동가의 글쓰기와 새로운 조직을 고민하는 조직가의 글쓰기, 일상의 에세이를 사회적 이슈와 묶어낼 수 있는 에세이스트와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하는 논객이 공존할 수 있는 생태계가 존재해야 한다.

    기존의 구도에서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이들도 ‘글 밥’을 먹을 수 있거나, 다른 방식으로라도 생계를 유지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구축되어야만 다른 ‘담론’의 창출과 다른 ‘진보정치’가 만들어질 수 있다.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은 상태에서 기본소득을 받으며 글 쓰는 것이 정책적 목표라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한 달에 4~5편의 글을 써서 100만 원을 벌어서 책 사고 글 쓰고, 묶어서 책을 낼 수 있는 ‘젊은 글쟁이’의 생태계는 그 전제 조건이다.

    2010년 천안함이 침몰되던 그날, 차 안에서 조병훈과 ‘진보, 야’를 쓰기로 ‘결의’했다. 많은 걸 약속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전혀 다른 진보’의 이야기를 꺼내자는 것이었다. 애초에 민주개혁을 지지하지도 않고, 여전히 2개의 양대 정파나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그렇게 1년 6개월이 지나갔다.

    대부분의 젊은 논객들이 그렇듯 우리도 객관적인 계급적 조건을 통해 진보가 된 것이 아니라, 온라인 대중 정치와 학교 선배를 통해 진보가 되었다. ‘쁘띠 사회주의자’로 호명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쁘띠 사회주의자들’의 글을 ‘척결’하느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글로 뿜어내며 기득권도 던져버릴 수 있는 공현과 같은 ‘프레카리아트 20대 논객’이 쏟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로운 방식의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방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진보 운동의 성장과 기존의 ‘온라인 대중정치’의 인텔리 출신 논객이 아닌 새로운 논객들이 등장할 때를 기다리고, 또 만들어나가는 데 할 수 있는 일은 좀 탐색해보려 한다.

    천상 ‘인텔리’가 가질 수 있는 ‘재능 기부’인 ‘연구’는 놓지 않으려는 게 내 계획이다. ‘새로운 진보’를 바라는 이들이 있다면, 여러분의 계획은 어떠하신가?

    * 필자 양승훈씨는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진보, 야!’ 필진을 그만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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