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왜 진보신당에 입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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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14일 08: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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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흩어지는 담배연기 사이로 지나온 길들이 슬라이드 화면처럼 빠르게 스쳐간다. 1987년 민중대통령 백기완 선거운동본부를 시작으로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민주노동당을 거쳐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20년이 넘는 세월에도 나는 아직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다.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주위는 황량하고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온 것 같은 낭패감마저 느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신들메를 고쳐 매고 길을 나서고자 한다. 길! 언제나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설레임이 교차하는… 길! 나는 운명처럼 다시 길 위에 서 있다.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이후 나는 다시 당적을 갖게 됐다. 당의 정식 명칭은 ‘진보신당 연대회의’다. 새롭게 당원이 되었지만 나는 설레임은커녕 오히려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시련에 대해 묵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보신당이라는 좌초 위기에 처한 배에 자진해서 승선한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20년 넘게 피 흘리는 포복으로 기어오면서도 끝내 내릴 수 없었던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피 묻은 깃발 때문이다. 청춘을 불살랐던 우리들의 역사를 끝내 지켜가고 싶기 때문이다.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된 당, 자랑스러운 당, 지배계급을 벌벌 떨게 할 강력한 당을 물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입당하게 된 까닭을 밝히기 앞서 먼저 통합연대에 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9.4 당대회 이후 진보신당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진보의 혁신과 재구성’이라는 중간 기착지를 향해 격랑을 헤치며 위태로운 항해를 해오던 진보신당호는 마침내 좌초 위기에 처해 있다.(난파선이 되어 모두 수장되지 않은 것은 또 얼마나 다행인가!)

    위기를 느낀 사람들은 배를 버리고 마구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좌초하고 말 것인가?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온갖 간난신고와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온 이 길의 역사가 우리를 용서치 않으리라.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쓸쓸한 풍경이다!

    통합연대에 하고 싶은 얘기들 

    9.4 당대회 결정을 하루 만에 뒤집고 통합연대를 결성하는 그 약삭빠름과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에 그 원천을 두고 있는 것일까? 나는 솔직해지고 싶다. 돌아보면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를 불러온 이런저런 논쟁과 사건들은 모두 부차적인 것이었다. 근원적 본질은 결코 당권을 장악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으며 이것이 민주노동당 탈당과 진보신당의 창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나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인정한다.

    지금의 탈당 사태와 통합연대의 결성은 ‘진보대통합’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위해서라기보다 이제 진보신당이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로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솔직해지자! 그렇지 않은가?

    도대체 대통합의 대상이 실재하고 있기는 한가? 민주노동당, 이 당의 다수파는 자유주의 세력과의 통합을 진심으로 원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통합은 바로 이것이다. 나머지는 거추장스럽다. 통합연대와 합치는 것은 사실 그들에게는 절박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연립정부와 연방제통일 노선을 관철하는데 통합연대는 가장 골치아픈 존재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당은 수많은 논쟁으로 날밤을 지샐 것이다. 민주노동당 당권파에게는 이것은 악몽이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길이다.

    그렇다고 진보교연을 비롯한 시민사회세력들을 아우르는 통합? 진보교연은 이미 통합이 불가능하다면 진보정치 연합전선이라도 필요하다고 한 발을 빼고 있다. 시민사회세력은 안철수, 박원순 쓰나미에 이미 모조리 휩쓸려 갔다.

    누구와 ‘대통합’을 하겠다는 건가?

    통합연대는 그렇다면 누구와 대통합을 하겠다는 것인가? 혹시라도 민주노동당 내의 전국 조직인 인천연합이 탈당하기를 바라는가? 그것은 몽상일 뿐이다. 인천연합은 경기동부연합과의 당권 투쟁을 할지언정 결코 탈당하지 않는다. 통합연대는 통합 대상이 없는데도 허깨비를 향해 ‘진보대통합’이라는 덩치에 맞지 않는 무거운 칼을 휘둘러대고 있다.

    나는 통합연대로 결집한 세력이 진정으로 진보대통합을 실현시키고자 했다면 당대회 결정을 존중하고 탈당 대신 당의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대통합의 불씨를 살려나갈 수 있었다고 본다. 더구나 민주노동당 당대회에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이 부결될 수도 있는 상황은 다시 한 번 대통합의 드라이브를 걸 수 있는 호조건이 만들어 지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조급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이제 통합연대는 명분도 실리도 모두 잃어버렸다. 통합연대는 이른바 대중조직이 아니라 활동가 조직이다. 달리 말하면 정치단체가 되었다. 새통추에 가입하기는 했으나 이미 새통추는 진보대통합을 압박해 나갈 힘을 이미 상실했다. 칼자루는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이러한 현실을 더욱 고착화시킬 것이다.

    가출을 하고 나니 날은 어두워지고 배는 고프고 잠 잘 곳도 마땅치 않다. 3년 전 굶어죽고 얼어 죽겠다는 각오로 만든 집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다녀야 한다. 어떤 이는 아름답게 헤어지자고 대통합당에서 다시 만나자고 속삭이며 가출의 이유를 둘러댄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신파는 현실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통합의 불씨를 지펴 대통합의 불꽃을 만드는 것은 현실에서는 거의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원하는 대로 통합이 잘 되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떠날 사람 떠나고,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이제 떠날 사람은 대략 다 떠나고 나는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입당했다. 그러나 지금의 진보신당은 위기의 당이다. 여전히 개량주의당이다. 나는 진보신당이 2년 안에 근본적인 혁신, 문자 그대로 환골탈태하지 않는다면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 판단한다.

    언제까지 무대에서 행인1, 행인2로 살 것인가? 주연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중 있는 조연, 존재감이 확실한 조연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그 배역에 이르기 위해서 대략 10여 년의 고군분투가 있어야 하리라고 판단한다.

    지금 우리는 세계사적 격변기를 거치고 있다. ‘Occupy Movement’로 대표되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대중은 급진화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열패감에서 대중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대중의 직접행동이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타면서 진보신당은 급진좌파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유럽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해적당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완전히 새로운 정당으로 스스로를 혁신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낡은 관행과 구태를 거침없이 벗어 던지고 시대의 변화에 맞는 스마트정당이 되어야 한다. 직접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는 소통하는 정당, 재기발랄한 정당, 젊은이와 비정규직 노동자를 주력으로 하는 사회적 약자의 명실상부한 대변자인 정당, 대중의 직접행동을 조직하는 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타기 위해

    그러지 않고서는 역사의 기관차에 올라탈 수 없다. 역사에는 무임승차란 없다. 급진적 대중은 이미 우리를 훨씬 앞질러가고 있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는 반드시 그 전조가 발견되기 마련이다.

    지금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중병에 걸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호흡곤란으로 산소마스크가 없이는 생존하기가 힘든 지경이다. 이제 진보신당은 끼리끼리 모여 몰래 속삭이지 말고 대중의 광장에서 이 썩어빠진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엎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다녀야 한다. 자본주의는 야만 그 자체임을 폭로해야 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는 확신을 대중의 가슴 속에 심어야 한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누구에게나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얼마 전 입당 사실을 알게 된 오랜 동지가 나에게 기회주의, 개량주의자라는 끔직한 딱지를 붙였다. 이제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뜻과 다를 바 없는 선전포고(?)였다. 나는 조용히 답했다. 이것이 내가 할 일이라면 어떠한 수모도 달게 받겠다고. 사회주의는 어두침침한 골방에서 찬란한 대중의 광장으로 나와야만 한다.

    나는 지금의 진보신당을 급진좌파 정당으로 탈바꿈 시키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결의를 다지며 입당했다. 물은 서로 다투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듯이 사회주의자도 급진좌파와 다투지 않고 ‘개인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조건이 되고, 만인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의 조건이 되는 자유로운 인간의 공동체’라는 바다로 흘러가야만 한다.

    나는 육상 종목 중에서 장대높이뛰기를 좋아한다. 진보신당이라는 장대를 짚고 자본주의 체제라는 바(bar)를 여러 벗, 동지들과 훌쩍 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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