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시대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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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14일 0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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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몇 년 동안의 세계 정세 전개를 한 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파산’이라는 단어는 제일 적합할 듯합니다. 실물경제에서의 이윤율 저하 경향에 부딪친 금융자본들이 지난 10~15년 동안 각종 투기와 고위험의 대출 등을 일삼았다가 2008년에 줄파산을 하기 시작하고, 천문학적인 공자금을 부어서 그 줄파산을 겨우겨우 막은 주요 국가들도 인제 그 부채 부담이 감당 못할 정도로 늘어난 만큼 파산의 위기에 처해지고 말았습니다.

세계적 수준의 파산

그리스 정도면 그 공식적인 파산은 어쩌면 이제 곧 시간의 문제일는지도 모르겠는데, 실은 부채 대 국민총생산의 비율이 119%에 이른 이탈리아만 해도 얼마든지 파산 시나리오들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만 그런가요? 실은 유로존 같으면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핀란드 등 몇 개 국가를 빼면 나머지는 거의 다 궁극적으로 파산으로 치달을 수 있는 연속적 재정 위기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개별적 국가들의 파산만 문제가 아닙니다. 유로존, 나아가서 유럽연합이라는 시장통합이란 이념 자체가 사실 이미 파산된 것이죠. 그리스 은행들이 만약 독일 정도의 저금리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리스 정부는 독립적 화폐를 발행하여 경기부양책이라도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위기는 있어도, 지금과 같은 파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유럽 중심부의 제조업자와 은행가들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진 유로존은, 한 때에 그리스와 같은 준주변부 국가들에게 허구적인 ‘성장’의 당근을 던져주었다가 인제 그들을 나락으로 끌고 간 셈입니다. 금융자본, 국가에 이어서 유로존이라는 "자본을 위한 영토 구축"의 아이디어가 파산을 맞은 셈이죠.

궁극적으로는 지금 파산을 맞고 있는 것은 시장 자본주의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직면해야 할 진리는, 이윤을 추구하는 시장 경제가 장기적으로 자기 보존과 지속도 제대로 못한다는 점과 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의 자기파괴적 속성

경기 주기의 추이에 따라 이윤은 계속 떨어지게 돼 있기에 자본은 자꾸 투기와 고위험의 약탈적 금융으로 가고, 빚폭탄을 만들고 거기에다가 초과 이윤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비정규직 등의 형태로 노동을 초토화시킴으로써 결국 자기 내수 기반부터 파괴시켜 그 자체의 확대재생산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자본은 자기파괴적 속성을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적 통제가 전혀 없는 시장경제라는 것은, 운전자가 없는 자동차와 똑같은 것입니다. 사람 몇 명 쳤다가 나무나 가로등에 박혀 폭발되고 말 뿐이죠.

그런데 국가가 구원투수 노릇을 해도 자본의 위기는 말끔히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은행의 빚을 국가가 떠맡았다가 국가 그 자체가 부도 위기에 봉착하고, 아프간부터 지금의 리비아까지 신식민지 침략 전쟁을 통해서 군수복합체를 살려 특수를 만들었다가 역시 전쟁 비용으로 더욱더 휘청거리게 됩니다.

70~80년 전처럼 파쇼 독재를 세우고 세계대전 하나쯤 일으키는 것은 이와 같은 과잉생산, 이윤저하 위기 국면들의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세계의 통치자들마저도 이와 같은 ‘극한 처방’을 핵무기의 시대에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준비는 늘 돼 있겟지만요).

그런데 큰 전쟁은 나지 않아도 자본주의 중심부에서마저도 다수의 삶은 점차 비참해지고 있습니다. 유럽연합 안에서는 15~24세 젊은층 사이의 실업률은 21%, 단순 사무직마저도 이제 별따기로 인식되는 거에요. 스페인 같으면 약 38%의 젊은이들은 직장이 전혀 없거나 각종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한국화돼가는 유럽

운이 좋아 직장이 잡혀도 삶의 질이 기대만큼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 노동 강도는 물론 우리의 위대한 대한민국과는 비교는 안되지만, 점차 ‘한국화’돼갑니다. 네덜란드처럼 비교적으로 노동자 권리가 그나마 보장돼 있는 사회에서마저도 약 10%의 노동자들은 만성피로증(burnout)에 시달리며, 독일에서는 최근 4년 동안 우울증 약물 판매는 약 40%나 늘어났습니다.

미국처럼 가장 야만적인 자본주의 국가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만합니다. 70%의 부모는 "일 때문에 아이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약 33%는 "극심한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하는 겁니다. 점차 늘어나는 불안, 영구적인 스트레스, 과도한 착취와 사회적 소외로 인한 우울증과 늘 불행한 느낌 – 이건 자본주의 위기 시대의 황폐화된 우리 내면 풍경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 국면의 정도는 어쩌면 1930년대 초반을 능가하고 있지만, 총노동의 대응 능력은 오히려 그 때보다 훨씬 못하는 것입니다. 반독재 투쟁의 경험이 있는 그리스 같으면 그나마 전투성이 좀 있는 공산당과 급진노조라도 남아서 지금 투쟁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대다수의 중심부 국가에서는 혁명 정당은 아예 없거나 힘없는 동호회로 전락하고 만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 방식은 많은 경우에는 다소 ‘게릴라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게릴라성 투쟁’은 지난 번 영국 런던 등지에서의 빈민 반란이나, 6년 전의 불란서 "파리 부근 위성도시의 반란"(Les émeutes des banlieues)과 같은 형태로 진행되지만, 중산층 (특히 젊은이들)의 ‘게릴라성’ 투쟁은 3년 전의 우리 ‘촛불 사태’나 최근 스페인의 주요 도시 광장 점거 농성, 그리고 이번에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월가 점거 농성 운동’ 등 덜 폭력적인 형태로 전개됩니다.

이 게릴라성 투쟁의 중요한 특징은, 잘 표명된 구체적 의제가 없거나, 표명적 의제와 진정한 의제는 서로 상당히 괴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3년 전 우리 촛불사태 같으면 표명적 의제는 쇠고기 수입과 졸속 굴욕 대미 협상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극우정권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종합적 불만이 막 터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운동 끌고갈 강력한 급진 좌파정당 필요

지금 월가 점거 농성 운동은 "은행업자 반대"를 외치고 있지만, 그 은행들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 운동 안에서는 전혀 의견이 통일돼 있지 않습니다. 공적 자금을 그만 부어야 하는가? 보다 강하게 통제하고 보다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하는가? 국유화해야 하는가? 운동 안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되는 대립을 면하려고 요구 통일을 추진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운동 초기로서의 불가피한 측면일 수도 있지만, 결코 장점은 아닙니다.

3년 전의 촛불 사태 때에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지도자도 지도 단체도 없는 자율적 운동"을 칭찬했지만, 이는 아나키스트적 ‘포스트 담론’들이 빚어낸 엄청난 오류이었습니다. 끝내 운동을 지도하고 제도화할 만한 정당 등이 나타나지 않았기에(진보신당도 민주노동당도 그럴 만한 당력은 아직 없었고 실은 지금도 없습니다. 매우 아쉽게도) 결국 운동이 탄압에 꺾여 몇개월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운동을 계속 끌고 갈 강력하고 급진적인 좌파 정당이 있어야 이 운동은 자본주의 위기를 노동자적 입장에서 해결할 힘이라도 가질 것입니다. ‘게릴라성 운동’은 초기로서는 좋지만, 돌파력도 지속성도 크게 모자라 오래 가기가 힘듭니다.

아직은 ‘월가 점거 농성 운동’과 같은 게릴라성 운동들을 총집결시켜 그 힘으로 체제에 강력한 타격을 가할 세력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일 수도 있죠. 운동이 커져가면서 탄압을 받게 될 것이고, 탄압을 받는 과정에서 더욱더 급진화할 것이고, 급진화된 상태에서는 은행의 국유화와 민주적 계획경제만이 자본주의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부분은 보다 널리 인식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어느 정도 공유되면 그 운동의 일부라도 대중적인 좌파 정치 운동의 바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매카시즘 광풍 이후로는 대중적 좌파 정당이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이것은 엄청난 발전일 것입니다. 대중적 좌파 정당이 이미 있는 남유럽 나라들 같으면 앞으로 몇년 사이에 그 당들의 급진화, 전투화가 기대됩니다. 그래야 게릴라성 투쟁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혁명적 시대로 진입 중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본주의의 총위기가 빚어내는 혁명적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위기가 주는 기회들을 피착취 대중들과 진보정당들이 얼마나 이용할 수 있는가 일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는 진보신당과 같은 계급정당의 발전과 강화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보신당이 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되면,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한 핵심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반도의 역사는 한 번 크게 달라질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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