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혁신의 길은 희망버스에 있다"
        2011년 10월 06일 04: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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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때이르게 한 해를 돌아보고픈 생각이 든다. 아직 올해가 세 달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9월 25일 민주노동당 당 대회에서 국민참여당을 포함하는 ‘진보통합정당’ 안건이 부결되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주 이상하지는 않다. 아니 저마다 숨가쁘게 달려온 일 년을 좀 더 긴 시간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적절하다.

    진보의 통합과 혁신 그리고 희망버스

    시간 길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지난 1년 간 우리가 겪은 것은 크게 보자면 두 가지이다. 진보 정치의 통합과 혁신 그리고 ‘희망버스’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어차피 무수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길게 반복할 필요는 없겠다.

    다만 시대에 뒤떨어진 기존 진보의 사고방식, 의제, 스타일, 주체 등에서 유래한 총체적 위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진보 집단에서 나왔고 이것이 2012년 정치 일정을 앞두고 공명하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점만을 일단 지적해두자.

    이 시대의 상징이자 화두가 된 희망버스라는 스핑크스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 이 스핑크스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 대답이 있고, 또 그만큼 많은 행동이 있다.

    하지만 우선 김진숙과 송경동을 빼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는 어렵겠다. 어떻게 이야기한다 해도 김진숙의 용기 있는 행동, 그것이 한진에서 죽어간 노동자 동지들에 대한 인간적 약속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것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 행동이 없었다면 희망버스는 출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김진숙이 카고 크레인 위에서 버티고 있지 않다면 희망버스는 출발 준비를 하지 못할 것이다. 희망버스의 원천이 김진숙이라면 송경동은 거기에 형태를 부여한 일종의 창조주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송경동은 개인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김진숙과 송경동

    시인의 상상력과 노동자 시인의 뚝심이 송경동 안에서 결합했을 때 희망버스가 주조될 수 있었다. 이렇게 출발한 희망버스에 김여진과 날라리, 여러 예술가, 자발적인 시민들 등등이 다양한 색깔을 입혔다. 이 색깔은 트위터 등 SNS에 기반해서 덧칠해지거나 변주되어 일종의 대위법적 합창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김진숙과 송경동은 어떻게 말한다 하더라도 상징일 뿐이다. 희망버스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 시대의 문제, 즉 신자유주의 체제가 우리 모두의 삶에 미친 영향,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우리의 바람 때문이다. 어떤 시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크레인 위에 올라있기” 때문에 희망버스가 커다란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상상을 절하며 치솟는 전세 가격, 대다수의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학 등록금, 나날이 뛰는 식료품비를 비롯한 물가, 안정된 일자리는 정말로 소수에게만 돌아가는 현실, 이 모든 게 우리를 삶의 벼랑을 몰고 있고, 그 불만이 희망버스로 나타났을 거라고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게다가 권력의 담당자들은 저들만의 배를 불리는 파렴치함, 그 어떤 것도 잘했다고 우기는 뻔뻔함을 보이는 데 희망버스 같은 대중의 ‘봉기’가 없다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일 것이다.

    희망버스의 ‘성공’에 고무된 기존의 진보 운동권과 이른바 민주개혁진영의 일부 인사들은 저마다의 또 다른 희망을 가지고 희망버스에 올랐다. 그 덕분에 희망버스의 울림은 좀 더 넓어졌고,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한진중공업 회장 조남호 청문회도 열릴 수 있었다.

    이러는 가운데 한진중공업의 무분별한 정리해고의 책임이 조남호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더 나아가 기존의 정리해고법이 지닌 큰 문제점이 드러났다. 자본에게 지극히 유리한 노동의 유연화!

    보편복지는 만병통치약인가?

    하지만 이들이 품었던 저마다의 희망은 우리 시대의 문제를 정면에서 넘어서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잘해봐야 한진중공업에서 ‘부당하게’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이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렇게 된다면 김진숙과 동료들이 걸어서 카고 크레인을 내려오는 감격적인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정리해고법을 손질하는 성과를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세상은?

    물론 기존의 진보 진영과 민주개혁진영 인사들은 보편 복지를 만병통치약처럼 처방하고 있다. 민주당조차 무상급식은 말할 것도 없고, 무상의료와 ‘반값 등록금’까지, 스스로를 복지의 실현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기야 한나라당조차 복지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는 마당에 제1야당인 민주당이 무슨 이야기인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부자감세 철회로 보편 복지를 실현하겠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사실상 국가채무가 1800조가 넘는 나라에서 부자감세를 철회하는 것으로 보편 복지를 실현하겠다고 하는 것은 보편 복지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일이거나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어떤 복지 의제가 나와도 4대강 사업만 철회하면 다 된다는 식의 이야기는 그냥 개그라고 치부하기에는 눈물이 날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일부 진보정당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 복지라는 담론의 유행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징후일 뿐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 즉 체제의 전환을 위한 의제를 도외시한 채 대증요법적인 복지 정책을, 그것도 제대로 된 재원 마련의 용기도 내지 못한 채 떠벌이는 것은 대규모 사기극일 뿐이다.

    혁신과 통합 어디서 잘못됐나

    이쯤 되면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벌여온 진보의 혁신과 통합 노력이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가 드러난다. 진보의 혁신과 통합은 기존 세력의 재편을 수반할 수밖에 없지만, 정말로 새로운 가치와 의제를 중심으로 해야 하고, 그것도 새로운 주체의 형성 속에서 이루어질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분위기와 정서만 혁신이었지, 실제는 각 세력의 기득권과 확대가 통합 논의의 원천이자 방향이었다. 그렇기에 진행 과정에서 혁신 의제 및 정세를 둘러싼 쟁점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그러니 잠정적 결과가 봉합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 봉합은 세력 관계에 의해서건 대중의 요구에 의해서건 뜯어질 운명이었다. 결국 돌아서 우리는 제자리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제자리가 꼭 제자리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에는 희망버스가 버티고 서 있다. 희망버스는 우리 시대의 위기와 가능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징후이다. 다만 우리가 대안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대안이 있어도 기득권의 고르디우스 매듭을 잘라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스핑크스처럼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우선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들만의 문제도, 이들을 대신해 카고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의 생사의 문제도 넘어서 버렸다. 그렇지 않다면 마리의 철거 세입자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야간 노동 철폐를 외친 유성 기업 노동자들, 더 오랜 기간 싸워온 재능 노동자들, 성희롱 피해 여성 노동자, 무수히 많은 시민과 예술가들이 희망버스에 올랐겠는가?

    모두가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억압, 착취, 수탈을 당하지만, 정확하게 어디를 목표 지점으로 삼아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우리 모두가 85호 크레인과 희망버스에서 집결지를 찾아냈던 것이다.

    민중의 독자정치세력화 한 시대 지나

    희망버스는 또한 기존 진보 운동의 이념, 조직, 스타일로는 우리 시대 대중의 열망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불길한 예언자이다. 이것은 그저 희망버스가 보여준 발랄함이나 트위터 같은 SNS의 강점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기존 진보 운동조차 신자유주의 체제가 쳐놓은 칸막이 안에서만 허우적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 체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포괄적이고 팽창적인 관계망과 스타일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런 희망버스를 통해 진보의 혁신과 통합 과정을 바라본다면, 헛수고까지는 아닐지라도 찻잔 속의 태풍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발 떨어져서 좀 더 긴 호흡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우선 1987년 이후 부침 속에 이루어진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의 한 시기가 끝났다고 할 수 있다. 1897년 체제 속에서 민주노조 운동과 통일 운동에 기반해서 탄생한 민주노동당의 여름은 지나가 버렸다. 이른바 당권파가 국민참여당까지를 포함한 통합 정당을 만들고자 하고, 2012년의 목표롤 진보적 민주 정부라고 설정한 위에 민주대연합을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나름의 정세 판단에 따른 전략 설정이다. (그 전략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들이 고유한 혁신의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고자 하면서도 국민참여당과의 합당을 진보의 이름으로 저지하고자 하는 세력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태도를 노정한 셈이다. 도리어 진정 진보의 이름에 값하고자 한다면 혁신 진보 세력을 중심으로 해서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 제2기를 열어야 한다.

    새로운 미디어운동과 함께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 제2기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종식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진 사람들의 광범위한 네트워크 방식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출발은 어디에서 시작해도 좋겠지만, 비정규, 불안정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와 네트워크화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때 네트워크화는 새로운 미디어와 함께 가야 할 것이다. 고전적 사회주의가 신문의 시대와 겹치고, 한국의 시민운동이 인터넷 매체와 함께 갔다면, 노동자,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 제2기는 또 다른 미디어 시도와 함께 가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진보 혁신의 길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대답은 이렇다 희망버스를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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