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자본주의 탐욕과 부패, 시대정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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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0월 05일 11: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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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지적 지도 필요성

    1980년대 중반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유명한 논문에서, 우리 시대의 복잡한 지형을 이해하기 위한 ‘인지적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지형도를 그리기 위해 제안된 이 표현은, 다른 맥락이지만 오늘 우리가 처해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한국이야 말로 동시대의 불확실성, 혼잡성이 그 어느 사회보다 뚜렷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때 늦은’ 복지담론의 과잉으로 여야가 선명성 경쟁을 하는 촌극이 일어나고 있다. 정치권에 실망한 대중들은 ‘새로운 인물’론에 대한 기대와 환상으로 여론의 방향을 좌지우지 한다. 기성정당들이 ‘인물’에 밀려 우왕좌왕 하는 사이 좌파정당들은 통합 과정에서의 상처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제위기와 그에 동반되는 반정치의 환상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럼에도 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다. 몇몇 칼럼니스트 교수들의 단편적인 분석만이 신문지상을 떠돈다. 환원주의라는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우리는 이 과정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현재의 복잡성, 동시대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정치/경제/문화/운동을 총체적으로 인식해 보려는 것이다. 더불어 이는 녹색좌파당을 주창한 진보신당내 일부 독자파 세력과의 대척점을 제시해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더불어 좌파의 분열이라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좌표계를 가져야 하는가를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2. 경제 : 혼돈의 기원

    ‘현재’의 불확실성, 요동, ‘시계제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아마 마르크스주자라면 이구동성으로 경제위기 즉 ‘이윤율의 구조적 저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윤율의 저하가 왜 일어나는가는 학자들마다 조금 다른 입장을 보이지만, 현대 사회의 위기의 근원은 ‘이윤율 하락’에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경제위기의 기원은 1970년대의 이윤율의 구조적 저하에서 비롯되었다. 70년대의 심화된 위기는 볼커 불황으로 폭발했다. 볼커 불황은 당시 미연방준비은행 의장이었던 볼커가 이자율을 급속히 올리면서 진행된 1980년의 불황을 일컫는다. 이 위기 동안 미국경제는 대공황 이후 산업자본 이윤율이 최저점을 기록한다. 그 이후 미국과 세계경제는 회복 국면에 돌입하지만, 그것은 산업자본 이윤율의 구조적 회복이 아니라 ‘경제의 금융화’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미국, 영국을 중심으로 진행된 금융빅뱅은 전후 기간 억압되었던 고도금융을 통한 이윤축적의 길을 열었다. 이때부터 세계적인 유휴자본이 금융시장으로 몰리면서, 주식/채권 등 자산시장의 버블이 점차 구조화되기 시작한다.

    금융자본뿐만 아니라 산업자본조차 실물투자를 줄이고(이를 자본 파업이라고 하자) 유동자산(주식/채권 등)에 투자한다.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들이 금융화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더불어 전후 정규직들이 쌓아 둔 연기금이 주식시장으로 진입하게 되자 주식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금융시장과 함께 부동산시장도 급속도로 성장한다.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거나 사내 유보금으로 투자를 하자 금융그룹들은 새로운 대출처를 찾아야 했다. 금융기관이 찾아낸 새로운 대출대상이 바로 가계였다. 더불어 서구 정부들은 사회주택이나 공공주택 공급을 중단하고 자가 주택 중심의 정책을 더 가속화하자 중산층을 중심으로 모기지론이 급속하게 팽창하게 된다. 은행들은 이렇게 대출된 모기지를 중심으로 새로운 채권을 발행하며 투기를 더욱 조장한다.

    금융자유화와 국제적 자본 이동에 대한 규제 철폐는 이와 같은 경제의 금융화를 뒷받침하고 조장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제 초국적 금융자본은 세계 어디에서도 자산투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가계들 또한 모기지론을 통해 주택투기를 통해 한몫 챙기게 된다.

    실물경제의 축적 조건은 구조적으로 개선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는 금융, 부동산의 잉여를 통해 ‘단기적으로나마’ 이윤율 저하 문제를 해결하는 듯했다. 작고한 이탈리아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지오바니 아리기는 이 기간을 ‘좋은 시절(벨 에포크)’라고 했다.

    벨 에포크의 시대는 모든 자산 투자자들에게 착시효과를 만들어 냈다. 경제학자든 대중이든 불황이 오더라도 다시 경기가 살아날 것이며, 투자된 자산은 질적으로 더 좋은 보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착시일 뿐이었다.

    1980년대 볼커 불황이 끝나고, 군사 케인즈주의와 플라자합의/워싱턴 컨센서스를 거치며 자본주의는 일시적 회복을 달성하지만, 이는 1990년대 초 소위 ‘클린턴 불황’으로 붕괴된다. 클린턴이 주도한 미국의 균형재정 정책이 세계의 불황을 이끈 것이다. 멕시코 경제가 다시 붕괴되고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다.

    클린턴 불황은 신경제로 알려진 IT호황으로 잠시나마 잊게 된다. 그러나 그 와중에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폭발한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미국이 IT버블로 건재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위기도 쉽게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2002년 닷컴 기업들의 몰락으로 붕괴된다.

    미국 마르크스주의자 로버트 브레너의 표현대로 IT호황은 전형적인 ‘폰지 금융’ 상태를 의미했다. 이는 실물의 뒷받침 없이 주식가격만 폭등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001~2002년의 불황을 극복한 수단은 당시 연준 의장이던 그린스펀의 주식시장 케인즈주의였다. 그린스펀이 이자율을 0점대로 떨어뜨려 투자자들로 하여금 돈을 대출받아 주식을 사라고 부추겼던 것이다.

    그러나 아다시피 그린스펀의 구원도 고작 6년 갔다. 2008년에는 리먼 사태가 발생한다. 이번에는 투자은행이 붕괴된다. 2000년 이후 금융부문 이윤율도 구조적으로 하락하자 투자은행들은 보다 위험한 자산을 취급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주택담보부채권(MBS)나 신용부도스왑과 같은 불확실한 채권의 남발이다.

    그런데 불황으로 인해 주택시장이 붕괴되면서 주택담보부채권 가격이 폭락하고 채권만기가 도래하자 투자은행들이 몰락한 것이다. 미국만 그랬다고 생각하지 말라. 모기지의 붕괴는 아이슬랜드, 아일랜드, 스페인에서 동일하게 나타났다. 한국의 가계부채 800조도 거의 같은 과정을 통해 쌓이게 된 것이다.

    2008년 위기는 연준 의장 버냉키의 양적 완화로 잠시 지체된다. 양적 완화란 달러를 찍어내어 경제를 살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죽어가는 시체를 살리기 위해 독약처방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달러를 찍는 것은 기축통화라는 달러의 독특한 지위 때문에 가능하지만 이런 선택에는 위험 또한 만만찮다. 더 찍어낼수록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러를 찍는 것도 언제까지 지속될 수 없다. 미국의 부채는 이미 한계상황에 도달해 있고 상당수의 주정부들은 거의 붕괴 상태다. 유럽 주변부의 재정위기와 유럽 상업은행의 위기, 미국 재정위기와 불황이 동시에 수렴되는 상황까지 온 것이다.

    한국 상황도 그렇게 녹녹치 않다. 가계부채는 이미 800조를 넘어서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이 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주택담보대출이 가계 부채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은행들은 이미 주택담보대출을 토대로 주택담보부채권을 발행했기 때문에 이 채권이 동시에 지불요구를 하는 상태가 되면 부도 위험이 매우 높다.

    거기다가 현재 한국은 금융시장 개방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아 세계위기로 인해 해외자금 유출이 나타나면 외환위기 국가로 바로 전락할 상황이다. 이는 신용부도스왑 거래에서 한국의 신용도가 급속히 올라가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유럽과 미국 수요의 부족으로 수출 하락이 지속되는 국면에서 경제위기가 불어 닥친다면 그 영향은 지금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2008년 어떤 칼럼에서 윤소영 교수는 자본주의의 위기구조가 더 심화되면서 불황의 주기가 더 짧아진다고 했다. 현재 위기는 구조적 이윤율 저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책적 수단을 통해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는 단언했다. 그리고 사태는 그의 예언대로 정확하게 흘러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대해 현재 유럽이나 미국은 어떤 대응 방안도 없는 상태이며, 대외경제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이나 신흥공업국들은 더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한국은 주택담보부 대출만이 아니라 신용부도스왑에서도 높은 위험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어떠한 비관주의나 자동붕괴론에서 비롯된 헛소리가 아니라 현실 자본주의의 운동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3. 부르주아의 풍경 : 포기된 헤게모니

    금융자본주의가 한창일 때 벌어진 사회적 풍경은 더더욱 가관이다. 채권이나 주식, 부동산 투기에서 비롯된 부는 노동소득에서 나온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노동소득에서 비롯되는 불평등은 많은 부분 노동생산성의 격차에서 비롯되지만, 자산소득에서 비롯된 부는 말 그대로 “투기를 통해 전유된 이익”이다. 생산된 부를 금융을 통해, 투기를 통해 강탈한 것이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금융자본주의 하에서는 주식시장의 평가차익을 통해 이익을 배당하기 때문에 구조조정을 내적 요소로 포함한다. 산업자본은 이윤율이 낮아지고 시장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정규직 고용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확대한다. 노동의 신축성을 높여 쉽게 고용하고 쉽게 해고하려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힘도 구조적으로 약화된다. 노동소득이 점차 줄어들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부동산 투자, 주식투자로 돈을 쉽게 번 집단이 유흥가를 흥청거리도록 한 것이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풍경이다.

    그 결과 이윤에 대한 노동소득 배분율도 점차 악화된다. 기업주들은 더 많은 배당과 더 많은 급여를 받는 대신, 노동자들은 경쟁력 있는 기업의 정규직만 그 덕을 본다. 사회 전체적으로 소득격차는 확대된다. 부동산 투기로 인해 엄청나게 치솟은 집값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공간적으로 분리한다.

    타워팰리스와 강남은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은 더 심화고 브라질과 같은 나라는 아예 부자들 지역은 사립 무장집단이 지키는 곳도 있다. 이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풍경이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 자체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차대전과 소련의 도전에 직면하며 서구의 부르주아들은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화하려고 노력했다. 더불어 그들은 교양을 통해 부르주아 문화의 정수를 노동자계급의 아이들에게 학습시키면서 규범적 체계로 이들을 통합하려 했다. 부르주아 나름대로 헤게모니적 통치를 하려했다는 점이다. 이런 부르주아 문화가 성공적이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불문하고, 부르주아 체제는 자신의 질서를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더불어 노동자계급 급여가 상승하고 이들이 복지체제에 적응하면서 체제내화 되었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에서 제기되었다. 좌파조차 부르주아가 문제가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가 문제인 것처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버트 마르쿠제가 노동자 계급을 비판하며 대안으로 학생운동을 선택한 것은 이제는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진보신당 독자파 일부가 녹색좌파당을 주창하며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부르주아들은 더 이상 노동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체제내화 시켜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통치엘리트들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피지배집단을 내적으로 통합해야할 필요가 없어졌다. 재분배를 통해 부를 보장할 필요도 없고, 보편적 규범을 만들어 대중들에게 이를 학습시켜야 할 이유도 없다.

    각자 자기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생각나면 기부 조금 하면 그만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 없다. 정부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개인의 자유 이것이야말로 절대의 선이다. 하디와 같은 노골적인 우파는 가난한 자들은 우연에 의해 세계에서 버려진 존재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자가 그들을 살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초자유주의자 로베르트 노직은 정부가 세금을 많이 걷어서 재분배하는 게 부자에 대한 약탈이라고도 했다.

    타워팰리스의 부르주아들이 무상급식에 반대해 철저히 계급투표를 하는 것이나, 세금인상을 반대하기 위해 모인 미국의 티파티 운동이나, 경제 붕괴 후 아르헨티나 부르주아들이 해외로 재산을 도피 한 것 모두 이런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에 불과하다. 그러던 중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처럼 “부자가 세금 더 내야 한다”고 정신 못 차린 주장을 하면 부르주아지 내부에서 더 왕따 당한다. 미국에서 빚어진 일이다.

    4.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

    조금 교양 있는 부르주아들은 이런 문화를 차이와 다양성으로 포장했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다양하고 어떤 누구의 삶도 다른 이보다 더 좋거나 덜 좋은 것은 아니다. 각자는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 자기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살면 된다는 것이다. 굶어 죽는 것도 일종의 선택이고, 히잡을 쓰는 것도 개인들의 취향이기 때문에 허용하면 그만이다. 다만 굶어 죽는 이들도, 히잡을 쓰는 집단들도 차이와 관용으로 부자들을 봐야 한다는 것은 잊지 말자.

    부르주아들은 1000원짜리 약이 없어 죽어가는 에이즈에 걸린 아이의 모습에는 어떤 연민도 느끼지 않지만 러시아에서 개발된 십억 원 짜리 우주관광 상품에는 편집증적으로 집착한다. 베컴과 호날두의 호화로운 삶을 동경하는 것이 공공의 의제를 대체한다. 유명인들은 더 호화로움과 사치로 대중의 디즈니랜드가 된다. BMW를 타는 것이 멋이자 자긍심을 주는 시대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아이들은 가난한 애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한다. 이 아이들은 가난은 나태와 무절제의 결과이니 그런 자들이 굶는 것은 정의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페리 앤더슨은 “소유계급의 천민화/저속화”가 우리 시대의 진정한 풍경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세계에서 문학이 어떻고 윤리의 기준이 무엇이냐고 따지는 것은 촌스럽다. “윤리란 돈 되는 것”이라고 떠드는 공리주의의 하나면 충분하다. 상대의 성적 취향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문화적 급진주의를 대신하고 있다. 자유와 정의, 보편적 규범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되었다. 더 이상 부르주아들은 교양, 규범, 가치에 얽매이지 않는다.

    다양성의 시대는 그 어떤 것도 보편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긍정의 대상이 된다. 세계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이야기로 구성된 허구일 뿐 보편적 진실 같은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 입장대로 이야기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자본주의적 질서에 알 맞는 윤리적, 미학적 규범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식으로 표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이다.

    물론 이런 시대에도 양심은 있다. 당신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제3세계에서 공정무역을 통해 들어온 커피를 약간 비싼 값으로 사주면 된다. 이는 당신이 제3세계를 생각하는 따뜻한 존재임을 증명한다. 더불어 인종주의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거나 동남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그들의 인권을 위해 기꺼이 투표할 자세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들은 다양성의 문화, 차이의 문화가 유지되기 위한 조미료이기 때문이다.

       
      ▲필자

    단 노동조합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본질주의는 절대 얘기해서는 안 된다. 중심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주변과 타자일 뿐 스스로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야 말로 낡은 근대의 표상일 뿐이다.

    남근의 역사를 쓰는 것이 노동운동의 역사를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흥미를 끄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학, 역사학의 풍경이다. 당신은 그 어떤 본질주의와 형이상학에 빠져서도 안 된다.

    진리가 없기 때문에 비판도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가 착취를 더 심화시킨다는 것도 하나의 견해일 뿐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생각하는 자유, 이것이야말로 다양성과 공존의 문화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오늘의 욕망을 충족하면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은 금융자본주의의 부패와 딱 맞아 떨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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