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제철폐 혁명에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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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9월 30일 09: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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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에 갓난 딸을 봐주어가면서 우리 적색당의 소식지를 간간히 봤습니다. 이번 호에서 저에게 가장 흥미로운 기사는 소식지의 말미에 실린 적색당 청년 조직의 수장인 이베르 어스테볼 동지(Iver Aastebøl, 지도부 소개는 여기입니다)의 "숙제 철폐론"이었습니다.

    왜 숙제 철폐인가?

    실은 숙제 철폐는 지금 이 조직의 가장 중요한 당면 투쟁 과제로서, 숙제 철폐를 위한 학생들의 시위를 조직하는가 하면, 바로 지금(2011년9월26~30일간) 숙제 철폐를 위한 전국적인 학생들의 동맹 휴업, 즉 맹휴까지도 조직합니다. 맹휴 참여는 한 시간 동안의 수업 참여 거부와 숙제 철폐를 위한 서명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지금 참가 의사를 밝힌 학생들은 700개 학교 4만 명이라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재미있게 본 기사는 바로 이 운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인 셈이었는데, 그 논리가 정연하여 국내로서 잘 이야기되어지지 않는 부분인지라 여기에서 한 번 논해볼까 합니다.

    적색당 청년 조직의 입장에서는, 학생은 기본적으로 학습노동자입니다. 학생에게 의무적인 학습노동을 강요하는 "학교"라는 기관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1) 소년, 소년, 청년들에게 권위와 권력에 습관적으로 복종하는 유순한 심신을 배양토록 유도하는 등 친체제적 방식으로 미성년자들을 사회화하고 2) 학습노동을 통해서 학생들을 주어진 과제를 지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시간 엄수 등에 익숙해진 예비노동자군으로 편성시키고 3) 성적을 매개로 해서 아동 각자의 계급적인 신분상승의 한계를 규정짓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학생들이 ‘학습 공장’의 노동자가 되는 셈인데, 노르웨이에서 노동자라면 하루의 8시간 노동을 마치고 일단 그 휴식 시간에는 직장에 대해 아무 생각하지 않고 즐길 것이나 즐기면 됩니다. 그러면 왜 예비노동자인 학생들은, 성인노동자들과 차별돼 그 자유시간까지 학습노동에 바쳐야 하는가, 라는 것은 "숙제 철폐론"의 법리적인 기반입니다.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숙제란 학습노동자의 개인 시간까지 "학교"라는 체제의 기관이 무단 침범해 식민지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론 아동들의 개인 시간을 식민지화하는 것은 숙제뿐입니까? 체제의 논리를 가장 입체적으로 방법으로 은근히 전달하는 텔레비전부터, 유희를 통해서 경쟁과 적자생존의 법칙을 자연스럽게 배우게끔 하는 컴퓨터게임이라는 소프트웨어 자본의 상품까지, 국가와 자본이 아동들의 시간을 식민지화시키고 그 심신을 체제의 규칙대로 맞추어 개조시키는 매개체들이야 무궁무진합니다.

    숙제라는 이름의 아동 폭력

    이들 모두가 당연히 사회주의자들의 투쟁대상이 돼야 하지만, 숙제라는 이름의 아동들에 대한 폭력은 공공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그 투쟁은 보다 시급합니다.

    숙제는 추가 학습노동으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무엇보다 계급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제로서의 성격은 강합니다. 고백하자면 저만 해도 저녁마다 아홉살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검토해주느라고 꼭 30~40분 정도 보냅니다.

    저야 정신노동을 하니까 집에 와서 이런 추가 노동을 할 여력은 그나마 있지만, 8시간 동안 공사장에서 벽돌을 나르고 붙이고 나서 한 번 아이 숙제를 도와주어보시지요. 파김치된 상태에서 숙제를 도와주다가 그저 자버리고 말 가능성은 높습니다.

    거기에다가 예컨대 제 아내만 해도 아들의 노르웨이어 작문 및 문법, 맞춤법 숙제를 도울 능력이 거의 없고, 많은 비서구 1세 이민자 학부모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결국 부모의 "개인 코치"를 받아 숙제해온 아동(저희 아들의 학급에서는 약 3분의 1 정도)들과 그렇지 못한 아동, 특히는 육체노동자, 이민자 가족의 아동들 사이에 적지 않은 "학습능력 격차"가 생기고 맙니다.

    그 격차는 나중에 내신 격차로 이어지고, 내신 성적대로 대입이 이루어지는 노르웨이적 상황에서 고인기 학과 진학 가능성의 차이로 또 이어집니다. 노르웨이 사회 상층부의 상당 부분은 법대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법대에 진학하자면 내신은 꽤 좋아야 합니다.

    한국도 아닌 노르웨이지만, 저숙련 저임금 육체 노동자의 자녀로서는 법대 가는 것이 매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죠. 숙제를 철폐하면 이와 같은 상류층, 중류 상부층의 아동들만의 "프리미엄"이 사라지고 그나마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기회가 약간 더 주어지게 됩니다.

    학습량 줄여서 바보 만든다고? 천만에

    이러한 이야기를 쓰고 나니 한 가지 반론은 벌써 예상됩니다. 아이들의 학습량을 줄여서 모두들을 바보로 만들 생각이냐는 식의 반론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우리가 바로 봐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의 실제적 실효성이 매우 제한돼 있기에, 그 지식의 주입을 조금 덜 받았다고 해서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 일은 전혀 없습니다.

    예컨대 일반 기업체 사원 같은 경우에는 영문으로 된 업무상의 편지를 읽고 간단한 영어 서신을 작성할 능력까지는 필요할 수 있지만, 외국 바이어와 구두교섭할 일이라도 있으면 그 자리에 일반 사원이 아닌 외국어 계통으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쌓은 전문가를 보낼 것입니다.

    수학의 원칙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면 나쁠 일이야 없지만, 계산을 어차피 계산기로 하는 직장에서는 과연 암산부터 고등 함수까지 어느 정도 실용성이 있는가요? "이승만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을 쌓았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으면 씩 웃고 "주변부형 파시즘을 공연히 미화하는 것이군"이라고 촌평할 정도로 역사를 배운 것도 나쁠 게 없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연도, 사건" 위주의 "국민"과 "민족" 이야기의 한계도 누가 봐도 뻔한 것이죠.

    사실 너무나 몸에 가까이 와닿고 재미있을 수도 있는 역사를 무미건조한 "교과서"로 만들어버리고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취미를 애당초 죽이는 것은 정말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좌우간 학교 공부와 우리들의 실생활은 아주 딴판임으로, 학교 공부의 "양"을 적당히 줄인다는 것은 우민화는 절대 아닙니다.

    아동들의 해방운동입니다. 아이들이 방과후 과정에 다녀도 4시반에 집에 오는, "학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노르웨이에서마저도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백베, 천배 더 그렇겠습니다.

    교육 대중화와 간소화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의 교육대중화의 과정에서 대개 교육내용의 간소화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100년 전의 노르웨이 고등학교 졸업자는 라틴어와 고대 희랍어,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자유자재로 했어야 했고, 성경책의 내용을 꽤나 자세히 알아야 했습니다.

    고학력자나 개인 과외 선생을 붙일 만한 여유가 있는 부자의 집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닌 이상, 아주아주 버거운 고난도의 커리큘럼었죠.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은 다 그랬습니다. 실효성은? 1902년에 런던에 처음 온 레닌은 비록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아주 많이 배웠다 해도 영국인들이 말하는 걸 한 마디도 알아먹을 수 없었답니다. 그나마 문법 정도 다 알고 독해력은 있었으니까 그다음에 약 반년 동안 속성으로 다 다시 배운 거죠.

    지금 같으면 아이들에게 고전 언어의 학습은 순전히 자율에 맡겨져 있는 문제입니다. 라틴 문학이 좋아서 학습하려는 이들은 (노르웨이 같으면 충분히 있는) 여유시간에 아주 열성적으로 하는 것이고, 관심없는 다수는 라틴어 강제 주입의 악몽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것이죠.

    저는 이를 일종의 해방으로 봅니다. 강제되어지는 숙제보다는, 아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독서에 재미를 붙이게끔 하는 자율적 독서의 지도가 필요하지요. 타율적으로 주어지는 숙제를 하는 것보다 본인이 알아서 하는 독서에서 훨씬 더 많은 알찬 공부를 하게 됩니다.

    물론 특히 교육경쟁에 미칠대로 미친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숙제 철폐의 혁명"은 당장 이루어지기가 힘들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의 혁명은 어려워도, 진보세력들은 점차적 학습량, 학습시간의 감소 쪽으로 교육개혁의 방향을 트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이들도 조직해서 투쟁을 통해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는 게 좋을 듯합니다.

    1920년대 조선 같으면 동시대의 노르웨이보다 학생들의 맹휴들은 훨씬 더 치열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과도한 학습에 억눌린 중, 고등학생들이 그러한 투쟁에 잘 나서지 못하는 것은 아주 아쉬운 일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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