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기와 욕망으로 자본주의 고장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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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9월 25일 01: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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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타리는 나에게 일종의 혜성이라는 인상을 준다." (Maria Tereza Aaron)

    구조에 짖눌린 ‘동지’들

       
      ▲책 표지. 

    가끔 예전에 함께 운동했던 ‘동지’들을 만날 때가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운동을 완전히 접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 조직은 떠났지만 운동의 주변부에서 또는 자신의 생활 속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들, 그리고 지금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이들 등등 다양한 현재를 만나게 된다.

    술이 한두 잔 들어가고 의례적인 근황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이면, 운동을 지속하고 있는 이들은 열심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뭔가를 모색하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저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친구들은 어색한 침묵을 지키다가 일찍 자리를 뜨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말하고 있건, 듣고 있건, 그저 침묵하다가 먼저 일어나건 간에 점점 피폐해지는 현실과 그 속에서 갈수록 무기력해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고민의 흔적이 읽혀진다. 서로의 공간은 다르지만 더욱 강력해지는 이 구조(system) 안에서 누구든 자신의 삶과 활동의 의미, 긍정적 변화의 가능성을 찾기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곤 한다.

    이반 일리히도 말년에는 “새로운 시대의 특징적인 인간은 사회 시스템의 촉수 중 하나에 의하여 소집되고 삼켜진 존재였다. 희망하는 무언가를 실현시킨다는 믿음을 공유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시스템에 의해 삼켜진 새로운 시대의 인간은 하위 시스템으로 스스로를 인식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가타리는 이 어두워보이는 현실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가타리는 이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아이, 동물, 광인) 사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욕망과 삶을 자본주의적인 것이 아닌 색다른 것으로 바꾸어내는 것이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가타리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혁명은 특별한 혁명가나 지식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민대중이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다. 혁명은 미래에 도래할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사랑과 욕망과 기쁨의 정서가 새로운 부드러움의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작은 변화들이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한다.

    가타리를 통해 우리는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의 유의미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신승철의 『사랑과 욕망의 영토』(중원문화사, 28000원)는 이러한 가타리의 메시지를 7명의 철학자와의 접속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스피노자, 프로이트, 맑스, 라이히, 소쉬르, 바렐라, 들뢰즈의 철학과 가타리 철학의 비교를 통해 가타리 사상의 핵심들을 설명하고 있다. 가타리는 사랑과 욕망의 힘을 강조하는데 이 책은 가타리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욕망하는지를 보여준다.

    우선 이 책에서 우리는 가타리의 소수자에 대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다. 가타리가 이야기하는 소수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사회적 약자나 타의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기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특이성을 생산할 수 있는 주체성’을 의미한다.

    사실 자본주의의 질서하에서 이 소수자는 오히려 수적으로는 다수이다. 즉 ‘남성-백인-자국민-이성애자-비장애인-성인’은 수는 적지만 다수자이고, 소수자의 계열은 ‘여성-유색인-타인종-아이와 노인-동성애자-장애인-광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수자는 다수자와는 다른 욕망을 생성해내고 그들의 규범에 갇히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소수자라는 주체성은 스피노자적 ‘자유인’이라는 주체성의 계승자”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이러한 소수자와 접속할 때(스피노자의 ‘변용’, 가타리의 ‘되기’) 돌연변이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될 수 있고, 비로소 자본주의적 예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사회현실 침묵하는 프로이트 비판

    가타리는 광인, 광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타리는 광기를 발생시키는 분열된 사회현실에 대해 침묵하면서 광기를 개인의 정신상태의 문제로 돌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이러한 분열은 들뢰즈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세가지 지층으로 분석된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의 사회분열인데, 경쟁시스템으로 사람들을 극도로 분열시키면서 실제로는 극소수밖에 성공할 수밖에 없고 대다수가 패배하는 현실을 말한다. 두 번째는 정신분열인데 미친듯이 노동하고 놀고 소비하는 자본주의적 광기가 정지되는 순간, 욕망의 작동이 정지하는 한계점을 의미한다. 세 번째는 창조적 분열인데 비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과학, 예술,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특이성 생산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의미한다.

    즉 “경쟁사회에서 무의식이 황폐화되고 광인이 된 사람이 자신의 특이성을 발견하고 색다른 욕망의 움직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타리는 “광기를 분석하지 않고는 자유를 해석할 수 없다. 사실 사회 현실과 투쟁하려는 주체들의 입장에서 투쟁은 반드시 광기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광인해방 운동의 문제의식은 사회해방운동의 문제의식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저자는 우리에게 “정상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우리 사회의 소위 정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삶이 보여주는 개발주의 · 성장주의적 욕망, 승리주의 · 성공주의를 향한 맹목적인 욕망, 부동산투기, 주식투기, 사교육 열풍, 벤처 열풍, 미디어와 인터넷에 대한 각종 중독. 이런 것들이 과연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어찌 보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이 욕망들에 눈멀어 있는 정상인의 ‘미침’보다는 차라리 정신병자의 ‘미침’이 덜 파괴적이고, 건강해 보인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 속에서 똑같은 목소리를 낼 때 특이한 목소리와 색다른 움직임을 형성할 수 있는 광기(분열증)는 특이성생산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혁명적인 원동력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욕망과 분자혁명

    자본주의하에서 기존의 관계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한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달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타리는 이러한 광기를 치료행위를 통해 정상화시키려 하지 않고 배치를 달리함으로써 특이성 생산으로 나아가게 하려고 노력했다.

    가타리가 또 애정을 표출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가타리는 자신의 미시적인 욕망의 움직임을 색다르게(자본주의의 욕망과는 다른 색다름) 만드는 것을 자본주의를 변혁하는 ‘분자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분자혁명이라는 혁명운동은 “삶으로부터 소외된 영역에서 매우 특별한 혁명가나 혁명운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수준에서의 사랑과 욕망의 차원을 개방하는 혁명”이다. 이 혁명의 개념은 중앙집중적인 운동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그런 다음에야 노동해방이 오고, 그런 다음에야 인간해방이 온다는 속류 맑스주의의 환원론을 넘어선다.

    분자혁명은 지금 이 순간, 모든 이들에게 가능한 혁명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가타리가 이야기하는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 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수준의 차별, 그리고 네트워크 형태의 다국적 지배질서이다.

    통합된 세계자본주의는 전통적인 착취 개념뿐 아니라 특이한 욕망을 배제하고 정상적인 욕망만을 인정하는 차별을 통해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특이한 욕망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차별을 통해 유지되는 자본주의 작동방식을 고장낼 수 있다.

    자본주의를 고장내다

    그리고 이 고장은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변형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가타리가 자신의 기계 개념에 바렐라의 오토포이에시스(자기직조, 자기생산, 자기생성) 개념을 접목시킨 자기생산하는 기계라는 개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운동을 외부로 자신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재생산’의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자본주의를 하나의 구조가 아닌 다양한 기계의 연관으로 사고했을 때 중요한 것은 ‘자기생산’이다. 색다른 기계가 만들어져 다른 흐름과 움직임을 자기생산 한다면 사회기계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타리에 의하면 혁명조직은 구조를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생산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가타리는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은 지식인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가타리는 소쉬르의 기표를 넘어서서 도표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기표라는 것이 청각영상 즉 언어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도표는 색채, 음향, 냄새, 몸짓, 표정, 화음, 디지털코드 등 현실에 존재하는 기호들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기표적 수준이 아니라 TV, 영상, 이미지 등의 도표적 수준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가타리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를 바꾸어낸다는 것은 도표를 생산해내는 것인데, 이것은 채식을 한다거나 자전거 출퇴근을 한다거나 등등 실제 삶에서 특이성 생산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지식인의 말보다 인민대중의 행위가 더 중요한 이유이다. “지식인은 기표를 생산함으로써 말 속에서 무엇인가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인민대중은 도표를 생산함으로써 행위양식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가타리는 현시기 자본주의의 언어와 기호 분석을 통해 좀 더 명확히 드러낸다.

    기표와 도표 또는 지식인과 인민대중

    가타리는 외부로 드러나는 운동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운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네트워크에서의 도표를 생산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작동되는 추상기계로부터 시작되어 구체적 기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보이지 않는 욕망의 움직임이 특이성 생산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동물과 정을 나누었던 사람,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아이 목소리를 내는 어른 등이 자신들의 특이한 욕망을 보이는 영역으로 드러낼 때 자본주의의 기계 작동이 변화하고 네트워크가 출렁이게 된다.(예를 들면 모피에 반대하는 동물보호 운동가들의 나체 시위)

    이런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의 투쟁은 무의식 영역에서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무의식을 통제하고, 특이성 생산을 가로막으려 한다. 하지만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특이성의 생산이 지속되는 한 무의식 혁명, 네트워크 혁명은 가능하다고 가타리는 이야기한다.

    가타리의 이러한 소수자에 대한 긍정, 지금 각자 자리에서의 보이지 않는 작은 실천에 대한 긍정을 통해 우리의 삶 또한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 책의 큰 미덕이다.

    개인적으로 가타리를 읽으면서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벌어진 촛불집회, 반값 등록금 투쟁, 희망버스, 두리반이나 명동 마리, 강정마을 등의 투쟁 속에서 가타리의 철학을 재발견할 수 있었고, 지금 일하고 있는 대안학교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운동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현실 투쟁 속에서 재발견한 가타리 철학

    이 책은 그 외에도 훌륭한 교양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선 책 곳곳에서 가타리가 사용하는 어려운 용어와 개념들을 친절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스피노자, 프로이트, 맑스, 라이히, 소쉬르, 바렐라, 들뢰즈 그리고 니체와 네그리의 철학에 대해서도 중요한 맥락을 짚어주고 있다.

    이것을 현실운동에 깊이 관여했던 가타리의 사상과 비교함으로써 각 철학자들의 현실적 한계를 살펴보고, 가타리가 이러한 철학을 어떻게 발전시켜 현실 운동을 긍정하고 에너지를 불어넣는 도구로 사용했는지를 볼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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