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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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9월 16일 1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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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는 오랜만에 레닌그라드에서 사시는 한 노년의 친척 분과 통화했습니다. 예상대로 그 친척의 이야기는 주로 세상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아무리 척추와 다리 뼈가 아파도 ‘국가 복지지출 삭감’을 노리는 국립병원에서 이를 ‘장애’로 인정해주지 않아 ‘장애인 연금’ (즉, 일반 연금보다 약간 더 높은 연금)을 책정해주지 않고 지속적인 노동 경력이 없기에 앞으로 받을 연금은 대체로 최저고령연금, 즉 한화 25만원 상당의 금액이 될 것이라는 게 불평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나의 분노와 친척의 훈계

    물가 수준이 서울 이상의 도시인 레닌그라드에서는 이 정도의 금액으로는 빵과 우유는 살 수 있어도 생선조차 자주 먹기 힘들 것이고, 수많은 저소득층 노인들이 이와 비슷한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나는 소련 시대로부터 남아 있는 복지 제도들을 조금씩 슬그머니 축소시키는 푸틴의 악랄한 독재를 상대로 해서 바로 노년층 시민들이 중심이 돼 투쟁해야 되지 않나, 이 독재가 붕괴돼 보다 사회주의 지향적 정권이 성립되지 않는 이상 과연 이와 같은 고통이 멈출 수 있을 것인가, 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분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습니다:

    "투쟁? 투쟁해봐야 어차피 주관적인 행복이란 개개인 나름이지. 행복할 사람은 빵과 우유만으로도 행복할 것이고 불행한 사람은 아무리 투쟁해도 불행할 것이고. 이 정권 무너지고 저 정권 서고… 4백만 년이 지나면 아프리카주와 구라파주도 거의 합쳐지는 등 세계지도까지 다 바뀔 터인데,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정권을 누가 무너뜨리고, 연금 인상을 위해 누가 어떻게 투쟁하고 하는 걸 과연 누가 기억하겠냐?

    투쟁이고 뭐고 우주적으로 봤을 때에 다 그냥 먼지지, 먼지. 그러한 허무한 일로 소일하느니 차라리 꽃 위의 이슬방울이나 한 번 눈여겨 보거나 아기가 웃는 목소리를 잘 들어보게. 이거야말로 행복한 일이지."

    이 말씀을 듣고 저는 당장에 이렇다 할만한 설득의 말씀을 찾지 못하고 결국 화제를 바꾸어서 약간의 이야기를 더 했다가 그냥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꽃 위의 이슬이나 아기의 웃음소리에서 빵과 우유만으로 자족하면서 행복을 찾으라는 말부터는 일단 수긍은 갔습니다.

    베라 자술리치의 경우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우주적 생명의 리듬을 느끼는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건 맞고, 단사표음 (簞食瓢飮)의 행복에 대한 조상님들의 이야기도 어찌 틀렸겠습니까? 그것까지 다 맞는데, 저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맑은 마음으로 꽃위의 이슬을 즐겨보고 아기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투쟁’이라는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즉, 투쟁이란 동심(童心)을 되찾아 천지의 도(道)와 합일되는 일의 반대라기보다는 그 일의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표피적으로 봤을 때에는 욕망을 자제해 마음공부에 몰두하는 일(遏人欲處工夫)과 ‘투쟁’이라는 과정은 거의 정반대로 보이긴 합니다. 혁명적 상황에 처해지거나 폭압적 정권을 상대할 때에는 폭력을 대단히 혐오하는 투사가 불가피하게 바로 그 폭력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모순에 얼마든지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 혁명운동의 역사만 봐도 대체로 과격한 투쟁 수단에 호소하는 이들은 대개 애당초에 성품이 매우 선하고 폭력의 ‘폭’자도 입에 올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었습니다. 1878년에 한 정치범을 체벌케 한 상트페테르부르그의 경찰청장을 사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인민주의/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여걸 베라 자술리치(1849~1919)를 보세요.

    산파라는 직업상 생명의 탄생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 그녀는, 돈이나 배려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아낌없이 도와주고, 천사처럼 착하게 사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며, 재판정의 배심원들이 그녀를 무죄로 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평소의 평판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망명지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주로 대중적인 저술 활동을 통한 혁명적인 계몽운동에 남은 인생을 바친, 즉 폭력과 별다른 개인적 인연도 없었던 그녀에게는 운명의 1878년 1월 24일에 경찰청장의 가슴에 권총을 맞추어 쏘는 것은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투쟁과 우주적 질서 그리고 행복

    제정 러시아와 같은 무간지옥에서는 투쟁이란 가끔가다가 본인의 착한 마음을 극도로 억제하고 팔자에 없는 무기를 잡는 것을 의미할 수 있었지만, 노르웨이처럼 보다 개명한 사회 같으면 본인이 속해 있는 적색당(공산당)에서의 투쟁이란 꽤나 시간 소모적이고 심심한 일일 뿐입니다.

    회의하고 선전물을 쓰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설득하고, 일간지 <계급투쟁>지를 구독하면서 가끔 거기에 글을 쓰고, 집회에 나가고… 생업, 육아에다가 그저 또 하나의 ‘일’을 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폭력적이거나 심심하고 시간 소모적이거나 하는 이 ‘투쟁’이라는 과정은 정말 인성 (人性)에 맞지 않은, 이 광활한 우주의 질서와 무관하고 궁극적으로 인류에도 행복을 추구하는 개인에게도 필요 없는, ‘먼지’ 같은 일일까요?

    "투쟁과 우주적 질서, 그리고 행복"이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가장 정확한 답을 내린 사람은 위대한 혁명시인 마야코브스키(1893-1930)였던 것 같아요:

    Пролетарии 무산계급은
    приходят к коммунизму 공산주의로 오는 것은
    низом — 밑으로부터다
    низом шахт, 광산,
    серпов 낫,
    и вил, — 쇠스랑이의 ‘밑’으로부터
    я ж 나 같으면
    с небес поэзии 시문학의 하늘에서
    бросаюсь в коммунизм, 공산주의로 빠져든다
    потому что 왜냐하면
    нет мне 나에게는 그것 없이
    без него любв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1925년)

    투쟁 없는 행복은 가능하지 않다

    황제의 감옥에서 양심수가 채찍을 맞고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사랑스러운 아이의 웃음소리만 들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살 수야 있지만, 베라 자술리치처럼 관세음보살과 같이 착한 사람이 그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권총을 잡은 것은 그저 자타의 행복을 빌고 세상이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하는 마음의 표현이었을 겁니다. 폭압 통치 하에서 아무리 하루 스물네 시간 동안 아기 웃음 소리를 들어도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실은 ‘정상적’ 자본주의 국가도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 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노르웨이만 해도 ‘정상적인’ 삶이란 자신을 노동시장에 내다파는 ‘임금노예'(wage slave)의 삶이고, 자신의 인간적 본질인 노동을 상품화해 파는 삶입니다. 노르웨이의 ‘임금노예’ 정도면 세계적으로 꽤나 ‘부유한 노예’ 부류에 속하겠지만, 제3세계에서 5초마다 한 아이가 굶어 죽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 옆집의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를 즐겨 들을 수만 있겠습니까? 자본주의가 이 지구별을 1년에 6백만 명의 아이가 굶어죽는 커다란 고문실이자 도살장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면서 정말 개인적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물론 선전물을 쓰고 집회에 나간다고 해서 직접적으로는 한 아이도 구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심심하고 무의미하다고도 느껴질 수 있는 이와 같은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자본주의 전복을 위한 하나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반자본주의적 정당과 활동가층, 이데올로기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기가 오더라도 자본주의 극복이 불가능할 것이고,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의 그 어떤 행복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레닌그라드에서 사시는 노년의 친척과 통화하고 나서 제가 결국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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