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명높은 경동산업서 노조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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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9월 07일 07: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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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재로 짤려져 나가는 손가락이 1달에 한 바케스씩은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산재사고 최고로 꼽히는 사업장’,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썰물과 밀물처럼 입사하고 퇴사하는 이직률이 인천에서 최고인 사업장’,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일하면서도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는 사업장’.

    30년 전 인천 경동산업(현재 키친아트)을 상징하는 이야기들이다. 당시 경동산업은 스텐레스 주방용품을 제조하였는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출경기 호전으로 더욱 고속성장을 하게 되어 국내에서 판매 순위 1위가 되었다. 1980년도 이후에는 양식기 제조업체들 중에서 최대 규모의 사업장이 되었다.

    금형기술자가 되고 싶었던 청년 노동자

    1982년, 금형기술자가 되고 싶은 22살의 청년 김흥섭이 이 회사에 들어갔다. 김흥섭은 노동 현장은 어딜 가든지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제도로 인해 작업환경이 좋은 사업장이나 그렇지 않는 사업장이나 오십보백보로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다만 고급기술을 배워 기술자로 인정을 받으면 거기에 따라 당연히 월급도 오르고 대우도 달라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경동산업 금형실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들어가 보니 공장 밖에서 떠도는 소문들이 사실임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게 되었다.

    츨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잔업으로 인해 퇴근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그날그날 상황을 봐서 몇 시에 퇴근할지가 결정이 되었다. 거의 매일 야간작업을 했지만 잔업수당은 지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흥섭은 금형기술을 배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흥섭.

    서울대생이었던 형 김일섭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유인물을 돌리다 구속이 된 후 당연히 학교에서도 제적이 되었다. 감옥에서 석방이 된 후 형은 공장에 취업을 하여 노동자로 살고 있었다. 형은 함께 노동자가 된 학교 친구들과 종종 만나 열악한 노동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노동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정치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현장노동자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모임을 하기도 하였다. 형의 모습을 지켜보며 김흥섭은 대학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로 살면서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현장 활동가들

    때를 맞춰 형의 친구인 한덕희와 몇몇의 활동가들이 경동산업에 취업을 하였다. 그들은 현장노동자들의 조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합법적인 방법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사전 조직활동들을 하고 있었다. 김흥섭은 김흥섭대로 모임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동료들과 관계가 원활하고 활동적이며 의협심이 있는 좋은 품성을 가진 동료들을 물색하면서 일을 하였고, 퇴근 후에는 인천지역 문화활동가들과 함께 사물놀이를 배웠다.

    사물놀이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연습을 하였는데 힘든 현장 일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사물놀이를 배우고 난 후에는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각자 사업장의 이야기와 사귀게 된 현장 동료들에 대하여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천지역 다른 사업장의 작업조건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열악한 현장에서 힘들게 일을 하면서도 현장 모임을 만들기 위해 심사숙고하였다.

    1982년에 나는 경동산업에 입사하여 전해실이라는 부서에서 숟가락 추리는 일을 하였다. 내가 경동산업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워낙 작업조건이 좋지 않아 입사 후 오랫동안 일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들이 많고, 수시로 입사와 퇴사를 거듭하여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입사절차가 매우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작업량은 항상 산더미처럼 밀려있고 현장노동자가 부족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인사과에서는 제출한 입사서류에 대해 꼼꼼히 설펴보지 않고 바로 그날 현장에 배치하였다. 현장에서 사용하는 위험한 화학약품의 성분과 위험한 기계에 대한 안전교육은 당연히 없었다.

    나는 1년 이상 근무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회사측과 경찰은 나에게 수박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 당시 경찰에서 현장활동가들을 세 종류로 분류를 했는데 사과와 수박과 토마토의 유형으로 구분을 한다는 것이다.

    사과와 같은 사람은 겉은 빨간데 속은 하얀 사람으로 겉보기에는 사상이 불순해보이지만 속마음은 그런대로 건전한 사람이고, 수박과 같은 사람은 겉은 파란데 속은 빨간 사람으로 겉모습은 아주 건전해 보이지만 사상이 불순한 골수분자이며, 토마토와 같은 사람은 겉과 속이 모두 똑같이 골수분자라는 것이다.

    사과, 수박, 그리고 토마토

    나는 수박과 같은 사람이라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건전해 보이지만 사실은 지독한 골수분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부당해고를 거절할 줄 알았는지 출근 하면 탈의장에 가두고 아예 일을 시키지 않았다. 친했던 많은 동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전전긍긍하며 일만 했다.

    얼마 전에는 그때 함께 일했던 김현숙이라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 핸드폰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더니 “그게 뭐가 중요하냐”며 당시 “그 때 함께 하지 못해 미안했다. 목소리라도 듣고 나니 평생 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덜은 것 같다”고 하였다.

    당시 동료였던 김현숙은 부부가 함께 경동산업에서 일을 하였는데 김현숙은 평상시에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입바른 소리도 잘하고 의리도 있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회사 측에서 내가 동일방직에서 해고당한 사상이 불순한 노동자라고 악선전을 해대자 친한 척하지 않고 데면데면하게 대했었다. 그때 나는 현장동료들이 나를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는 회사 측의 중상모략에 부화뇌동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를 이해해주고 암묵적인 동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김흥섭은 현장 사람들과 신뢰관계를 형성하였다. 기물실의 이형곤, 이정우들과 만나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노동운동에 관한 이론 공부를 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이때 이형곤의 소개로 나와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김흥섭이 만든 모임에서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에 대해 서로 공감들을 하였다. 서서히 현장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회사 측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회사 측은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을 하나 둘씩 불러내어 “해고 시키겠다”, “부서이동 시키겠다”, “노동조합을 하면 신세 망치는 일이니 포기하라” 며 회유도 하고, 협박, 공갈도 했다. 

    함께 뜻을 모았던 핵심 멤버들이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어 버렸다. 회유를 거절한 김흥섭은 금형실에서 연마실로 보복성 부서이동을 당하였다. 김흥섭이 꿈꾸던 금형기술자의 희망은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다. 그러나… 

    연마실은 스텐양식기 제품에 광약을 발라 기계로 문질러 반짝반짝하게 광을 내는 부서였다. 그래서 연마실은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내내 한겨울에 내리는 싸락눈처럼 쇳가루가 흩날렸다. 한 술 더 떠서 스텐레스의 마찰열에 의해 현장의 온도는 한겨울에도 한여름처럼 더웠다.

    한참을 일하다보면 눈과 이빨만 빼놓고 온 몸은 땀과 쇳가루로 새까맣게 범벅이 되었다. 부서이동을 당해 일을 하게 된 김흥섭은 연마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더욱 힘이 들었다. 그러나 노조 결성에 대한 열정과, 질 수 없다는 승부욕, 그리고 어려운 상황을 견뎌내야 한다는 뚝심으로 잘 버티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조합 결성을 서둘렀다. 노동조합 결성 총회를 하고 관할관청에 신고할 때까지 철저한 보안이 필요했다. 헌법에서 보장한 대로 합법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었음에도 기업주가 알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당노동행위로 탄압을 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 흩어져서 활동을 하던 활동가들을 규합하였다. 김흥섭과 형의 친구인 한덕희와 최봉근, 그리고 몇 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종호도 만났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1984년 어렵사리 노동조합 설립총회를 하였다. 김흥섭이가 위원장으로 피선이 되었다. 신고필증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기다리던 신고필증은 나오지 않고, 기계실에 근무하던 한덕희와 김흥섭과 나는 회사 측으로부터 일방적인 해고 통보를 받았다.

    우리는 출근 투쟁을 하였다. 회사 측이 위반하고 있는 근로기준법 위반사항을 노동청에 고발을 하였다. 그 결과 회사 측이 지급하지 않던 잔업수당과 야간수당 등을 모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인천교 소식’이라는 소식지를 통해 알렸다.

    인천교소식지는 출퇴근 시간에 배포를 하기도 하고, 경동산업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인천 송림동과 십정동에 집들이(골목을 돌아다니며 모든 집에 유인물을 뿌리는 일)를 통해 현장 동료들에게 전해졌다. 당시 같은 지역에서 노동조합 결성을 준비하다 비슷한 시기에 해고를 당했던 영창악기, 삼익가구, 진도산업의 노동자들을 만나 인천지역 해고자모임을 하였다.

    해고자모임에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공동투쟁을 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우선은 노동3권의 완전 보장을 위하여 노동악법 철폐 집회를 하기도 하고 몇 차례 거리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1985년 한덕희와 김흥섭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이 되고 나는 수배가 되었다.

    결혼 한 후 공장을 전전하다

    6개월 형을 살고 석방이 되었다. 김흥섭은 먹고 살기 위해 새한전기 등 몇 군데 사업장에 다시 취업을 하였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에 의해 번번이 해고를 당하였다. 경찰들의 감시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담당형사 다섯 명이 교대로 돌아가며 김흥섭의 자취방을 지켰다.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자 친구 엄정애가 김흥섭이를 찾아왔다. 서로에게 호감과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별 거부감 없이 사귀다가 1987년 결혼을 하였다. 부부는 함께 공장에 다녔다. 김흥섭은 취업이 되지 않아 노가다를 하기도 했고, 주안공단과 부평공단 외곽에 있는 마찌꼬바(작은 규모의 영세 사업장)를 전전했다. 아무리 아등바등하며 절약해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김흥섭의 부부는 생선장사를 시작했다.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신분이 드러나서 ‘해고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수고한 만큼 돈을 벌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라 열심히 하다 보니 돈을 벌기도 하였다. 하지만 북한과 중국 수산물 무역에서는 두 번이나 실패도 하였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기력이 소진 되었는지 2002년 43살이 되던 젊은 나이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말도 어눌해지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당연히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내가 억척스럽게 장사를 하여 두 아들의 학비를 대고 김흥섭의 치료비를 댔다. 김흥섭은 2006년도부터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1987년 경동산업 노조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강현중, 김종하, 최웅님의 추모제에 참여하기도 하고 해고자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1987년도 이후 경동산업의 투쟁과정을 들으면서 1984년 노조를 결성한 후 해고 당하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구속되었던 억울함이 조금씩 풀어졌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맺혀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듯하였다.

    몸도 회복이 빨라지는 듯하였다. 가장으로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택시운전을 하기도 하고, 나의 남편이 일하고 있는 사업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나는 김흥섭에게 지속적인 운동을 하면서 건강이 회복되도록 노력하기를 권유하였다.

    귀농을 하다

    2010년도에 김흥섭은 평소 소망대로 아내와 함께 강원도 영월로 귀농을 하였다. 아내는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며 틈틈이 농사를 짓고, 김흥섭이는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노가다’를 하기도 한다. 몸은 아직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내와 아들 둘과 함께 먹고 살아야 하고 아이들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농사를 지어 된장과 간장과 고추장을 만들었다. 들깨 기름도 짰다. 산에 다니며 나물도 캐고, 동네 형님의 도움을 받아 약초를 캐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블로그(다음/ 휘파람을 불며가자)를 통해서 아는 사람들에게 판매를 한다. 농사일이 아직 낯설은 새내기 농사꾼이지만 고추, 옥수수, 콩 등 여러 가지 농사를 지으면서 요즈음에는 자연이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기도 한다.

    농사꾼이 된 김흥섭은 현장노동자로 살 수 없기 때문에 27년 전처럼 노조 결성을 할 일도 없겠지만 만약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들이 승리자가 되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좀 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하며 일하고 싶은 소망도 가지고 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 오직 몸뚱이로 하나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가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 생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절망이지만 어려운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평생을 해 야 하는 삶의 여정이며 훈련임도 깨닫고 있다.

    비가 온 후에 땅에 더욱 굳어지듯이 건강은 잃었지만 아픈 몸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마음 편히 사는 것도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농사를 지으며 더욱 절실히 느끼기도 한다.

    나는 김흥섭이 지금처럼 농사도 지으면서 이런저런 구상들을 하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몰두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나그네처럼 바람처럼 왔다가는 우리네 인생살이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겪어왔던 파란만장한 우여곡절들을 교훈으로 경험삼아 심오한 인생의 참 맛을 누렸으면 좋겠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척박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도 존재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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