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독일 사는 우리 아직도 괴롭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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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9월 05일 08: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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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의 이야기도 한 달간 휴가했다. 뉴욕은 무척 덥다고 하던데 잘 지내냐? 아빠는 여전히 ‘자유노동’에 깊이 빠졌단다. 그래도 여전히 동네모임에는 뛰어다닌단다.

       
      ▲풍물패와 함께. 

    8월이면 재독동포들의 총집결하는 8.15 광복절 행사가 열리는데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늘 행사장 입장식에서 길놀이 풍물을 하게 되었단다. 올해도 여전히 풍물패가 길놀이를 했다. 아빠는 또 북을 잡았다.(오른쪽 사진)

    박정희 죽음과 동상 이야기

    오늘은 박정희 죽음과 지금 독일에 박정희 동상 세우겠다고 설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박정희를 독재자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간첩으로 신고하게 만든 토큰 사건과 또 나의 동서까지 네 아빠를 신고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관련 글)은 나를 무척 긴장시켰으며, 독재가 하는 일이 뭔지를 확실하게 알게 했다.

    또한 각종 집회와 모임에 참석하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억압하고 노동자를 탄압하는 수많은 사례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나는 군사독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망가지게 하는지를 실감나게 체험할 수 있었다.

    헌데 지금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그 박정희가 부활시키려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우리를 분노케 만들고 있다.

    독일에서 파독광부의 친목단체인 그룩아우프회(Glueckauf) 회장과 일부사람들이 1천m 지하에서 피땀 흘리며 일했던 파독광부의 역사와 죽어간 동료들을 기억하기 위해 건립된 파독광부 기념관에 박정희 동상과 기념관을 세우고 만들겠다고 야단이다. 아빠도 잘 아는 고창원 회장이 ‘박정희 전대통령 비문 및 동상 건립 추진위원회’ 해외총괄 위원장으로 나섰단다.

    그들은 박정희 전대통령이 자신들을 파독광부로 보내줘서 잘 살게 해주었고, 1964년 12월 독일을 방문했을 당시 눈물을 흘리며 파독광부, 간호사들을 위로하고, 오늘의 한국이 있게 경제발전의 초석을 놓으신 분이기에 기념하고자 사업을 추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박정희가 광부를 독일로 보낸 게 아니다. 박정희 쿠데타로 오히려 파독광부 협상을 열약하게 만들어서 우리들을 더 힘들게 했다. 민주정부인 장면정권이 파독광부 협약을 진행했으면 파독이 더 이뤄졌을거고, 쿠테타로 떨어진 신임을 얻기 위한 박정희보다 광부들의 권익을 훨씬 더 많이 챙기는 협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동상은 정신적, 교육적 상징이어야 하는데 박정희 행적은 정신적으로나, 교육적으로 자랑할 것도 추모할 것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 쪽에 더 가깝다. 

    어떻게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시대에 일본천왕에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총을 든 독립군 소탕에 앞장섰던 인물을 우리의 정신적, 교육적 추모 대상으로 삼을 수 있나?

    또 청년학생들의 피로 이승만 독재를 물리치고 들어선 민주정부를 향해 총칼을 겨누며 쿠데타를 자행한 주역인 박정희를 어떻게 우리가 추모할 수 있는가?

    박정희는 변절자이자 거짓말쟁이다. 그는 또 부인인 육영수 여사가 총에 맞아 죽어가는데도 그는 행사를 그치지 않고 계속 진행한 무서운 사람인가? 매년 하는 그 8.15 행사가 말이다. 참 불행하게도 부인도 그도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헌데 재미 있지 않냐? 박정희 딸인 박근혜가 지금도 여전히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가 돼 있으니 말이다. 

       
      ▲박정희 동산 건립 문제를 놓고 토론하는 재독 한인들.(사진=한글 잡지 ‘풍경’) 

    그 박정희 망령이 지금 독일 동포사회를 흔들고 있구나. 파독광부 모임인 ‘그룩아우프회’의 회장인 고창원이란 사람이 느닷없이 3억500만원(23만유로)을 들여서 파독광부 기념관에 동상과 비문을 세우겠다고 나서서 말이다.

    헌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조선일보>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이 생긴다. 신용석이라는 예전 조선일보 기자였던 사람이 지난 2010년 박정희 비문을 세우겠다며 독일로 달려와 두이스브륵시와 협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잘 안 됐던 거 같다.

    생각해 봐라 독재자를 추모하는 사업에 사민당 소속 시장이 동의하겠냐? 세 번 정도 만나도 결과가 없자 그는 ‘파독광부 기념관’을 방문하고 "여기다." 생각했던 거 같다. 파독광부 기념관은 사적 소유이기에 기념관 안에 세우는 거는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재미있게도 동상건립 추진위는 국내와 해외 담당으로 출발한 거다.

    국내총괄 담당자는 신현태로 한나라당의 전직 국회의원과 경기도 도의원을 지낸 자이다. 신용석과 어떤 관계인지가 궁굼하다. 신용석은 현재 인천 아시안게임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인 거 같다. 그때 명함이 아시아 올림픽평의회 부회장으로 되었있더라. 그리고 전 독일대사를 했다는 권영민이 고문으로 되어 있었다. 해외총괄은 고창원이 맡았다.

    재미 있지 않냐? 통상적인 예로 보면 독일에서는 무슨 추진위 같은 게 뜨면 그 다음 지역에서 지원후원조직들이 만들어지는데, 이번 경우는 아예 처음부터 동상추진위가 국내와 해외에서 동시에 만들어져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더 재미있는 거는 파독광부 기념관 건물을 사면저 진 빚이 18만 유로라고 한다. 현재 사정으로 보면 이 빚을 갚기도 벅찬데 23만유로 들여서 동상세우겠다고 설치니 이해가 안간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다.

    아빠는 죽어도 박정희 동상이 파독광부 기념관에 세워지는 거 못 본다. 너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목슴을 걸고 투쟁할 거다. 반노동자적이었던 개발 독재자 박정희가 2011년 독일에서까지 망령으로 되살아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사 이야기

    한국에 다녀온 후 오펠자동자 공장에 취직이 돼서 신나고, 한마음조합 결성으로 고민고민을 하면서도 신날 때 집주인이 처음과 다른 조건을 내놓았다. 옆에 있는 건물을 함께 사라는 거였다. 우린 그 돈을 마련할 수도 없었고 그 건물을 사서 활용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거부했단다.

    그러자 주인은 당분간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이사를 하라고 해서 우리는 집을 옮겼다.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다. 암자텔굿 쓰트라세에 있던 천장 높았던 집 말이다. 집세는 엄청 싼 거였는데 대신 우린 석탄난로 피웠단다. 오래된 집이라서 천장이 엄청 높았다.

    헌데 어느날 네가 아침 근무 후 돌아와 너와 함께 놀다가 낮잠을 자던 나를 깨웠다. "아빠! 아빠! 필 아우게(Auge)! 필 아우게!"하고 소리 치면서 말이다. 난 한참 웃었다. 아우게는 우리 얼굴에 있는 그 ‘눈’인데, 너는 하늘에서 펑펑 내리는 초겨울 눈(Schnee)을 보고 "필 아우게"를 외친 거지. 네가 말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그후 아빠는 우리 말과 글에 뜻이 다른 같은 표현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물건을 바라보는 눈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 그리고 노를 젓는 배와 먹는 과일인 배, 그리고 우리 몸통 중에 한 부분을 이르는 배처럼 말이다. 

    재독 한인광부 인권협의회

    79년도가 저물어가는 때에 에발트광산에서 자주 만났던 한 광부 형이 역전 근처에서 좀 만나자고 했다. 교회 예배를 마치고 슬그머니 그 곳으로 그 형을 만났다. 

    그 형은 재독 한인광부 인권협의회가 발족돼서 체류권 투쟁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내게 말해줬다. 그러니 서명운동에 도와달라고 했다. 공개적으로는 하지 말고, 개인적 차원으로 해줘야 한다고 신신당부까지 했다.

       
      

    박정희가 죽었어도 여전히 그 두려움은 남아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는 신이 났다. 나름대로 열심히 싸우왔던 그 에발트광산 광부들이 체류권 투쟁으로 다시 일어선 것이 멋지지 않냐?

    에발트 광산 투쟁 속에서 광부들은나름대로 앞으로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던 거 같다. 그들 중 일부가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토론을 하던 중 ‘체류권 투쟁’ 문제가 제기돼서 시작된 것이라 했다. 너도 알다시피 파독 한인간호사들의 ‘체류권 투쟁’이 승리한 사례를 본받아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는 소리없이 적극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그해 12월 12일 빨간 색깔을 배경으로 찍힌 사진과 함께 전두환이 등장했다. 박정희보다 더 겁나게 전두환이 무대 위에 오른 것이다. 군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부하가 상관을 체포하는 사건과 박정희의 촉망받던 군인들의 사조직인 ‘하나회’가 전두환을 상징으로 행동을 시작한 거였다.

    아빠가 70년대를 넘어가기 전에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아빠가 직접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기억해야 하는 파독광부, 간호사들의 투쟁 이야기가 거기에 포함된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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