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물 비판의 '퇴보'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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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30일 04: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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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당최 이해를 하지 못했다. 이게 지금 문제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지금 모두에게 해야 할 일이 있는 데 그것을 외면하고 ‘뻘짓’만 하고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조영훈의 사교육 노동자, 공교육 현장, “분노하라”라는 사자후까지 읽으면서 느껴지는 감정의 복잡함이다.

    문제적인 조영훈의 글

    그리고 지난번의 글은 그가 느끼는 진보진영의 문제의 총집합으로 느껴진다. 시사주간지를 팔려고 ‘사정’하는 전화, ‘도덕적 당위’와 ‘서글픈 문구’로 젊은이들의 사연을 팔려는 매체들, ‘현실을 바르게 알고 함께 하자는 시민단체나 노동조합의 손짓’, ‘고졸 출신 내 친구’의 ‘의욕’을 ‘무참히 꺾어놓는’ ‘대중을 위한’ 정치철학 세미나 등.

    그런데 이번의 “진보, 되고 싶지 않거나 될 수 없는”의 글은 굉장히 문제적인 글로 보인다. 일단 조영훈의 진단이 과연 적절한지도 따져봐야 하지만, 그것이 ‘밑밥’ 혹은 암시로 깔아두는 정치적 메시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조영훈의 진단에 대해 판단을 해보자. 먼저 돈이 없어서 시사주간지 구독을 ‘사정’하고, 매체들은 젊은이들의 글들을 신파적인 내용으로 윤색하여 마케팅을 위해서 활용하는 황색 저널리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의 문제, 두 번째로 모여서는 대학에 가지 않은 이들에게 ‘학번’이나 따지면서 세미나를 하면서는 기껏 한다는 게 ‘우리 안의 이명박’ 정도의 간단한 해설이 아닌 ‘들뢰즈의 아이들’과 ‘지젝의 아이들’의 패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은 말 그대로 ‘표면’에 대한 인상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싫다” 정도의 감상 이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사주간지 구독(사실 신문구독도 마찬가지)에 대한 강권과 선정적 제목 뽑기, 내용의 윤색 뒤에는 조금만 ‘진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는 신문시장과 매체시장의 독과점적인 구조와 광고시장의 문제가 존재한다.

    일단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이나 구독료나 시청료가 아닌 광고로 ‘생계’를 꾸려간다. 그리고 방송은 지금 문제가 되는 미디어렙법의 도입에 관한 이슈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공영으로 광고를 집행하기 때문에 그나마 작은 지역방송이나 EBS 등이 버틸 수 있다.

    언론 시장의 상황

    그리고 시청료는 전기세에 붙어서 빠져나가는 중이라 사실상 100% 수납이다. 하지만 신문은 모든 개별기업이 각자 ‘영업’을 뜀으로써 수입을 확보해야 한다. 광고를 따내는 것도, 구독자를 확보하는 것도 모두 개별 기업의 몫이다.

    그리고 ‘조중동’은 공짜로 뿌리든 돈을 받고 팔든 백만 부 이상의 독자를 가지고 광고수주를 해내지만, 한겨레·경향 그리고 오마이·프레시안 등의 ‘진보’ 매체들 모두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정’이나 ‘간청’을 하면서 구독자를 만들려고 하고, 온라인상에서 그 보기도 싫은 선정적인 광고들을 같이 붙여버리는 것이다.(그래서 프레시안에서는 지원을 하는 정회원들에게는 광고를 안 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들에 대해서 그나마 ‘협의’를 하는 매체는 조영훈의 판단과 달리 그 ‘진보’ 매체들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그래도 그런 전화는 싫다”라고 한다면 그것이야 ‘취향’이라 ‘존중’할 생각이 있다. 냉정하게 끊으려고 맘먹으면 그런 매체들의 ‘사정’하는 전화를 끊기는 콜센터에서 ‘보이스피싱’으로 낚거나 보험 상품과 복리식 적금 들라고 하는 전화를 끊는 일보다 훨씬 쉽다.

    두 번째 무기력한 지식인들의 ‘지적 잘난 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자. 일단 나 역시 지식인들의 ‘학벌’ 노름과 대학에 나오지도 않은 이들에 대한 ‘학번’ 드립에 대해서는 바로 이 레디앙 “진보, 야!” 지면을 통해서 충분한 문제제기를 했던 편이다.(그리고 그 문제를 제기했던 건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그건 뒤에서 설명하겠다)

    하지만 조영훈은 문제를 뒤섞어버리고 그냥 한 방에 ‘훅’ 보내는 방식으로 논리적 오류를 드러낸다. 그리고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상비평’을 해버린다. 그런데 ‘정치적’ 장과 ‘세미나’라는 위치는 엄연히 다르다.

    논리적 오류와 인상비평

    대중정치가 실제로 벌어지는 현장에서 지젝과 들뢰즈파, 조금 더 외연을 확장하자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 랑시에르와 바디우까지 뒤섞어버리면서 ‘개드립’을 치는 좌파는 단정적으로 말해 없다.

    지나가다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혹은 사회당에서 만든 플래카드를 보라. 거기에 그 이름 중 하나라도 있는가? 그리고 각 지역의 당원협의회나 중앙당에서 만드는 문서나, 모임에서 나눠주는 문서를 보라. 또한 실제로 언급한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이들과 좌파 정치 혹은 진보 정치의 ‘현실정치’를 하고 있는 활동가, 당직자, 당 간부는 인적으로도 구분된다.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게다가 조영훈이 만들어내는 분리선도 허구다. 고등학교만 나온 ‘정치에 눈을 뜬’ 친구의 이야기 자체에는 공감할 수 있는 바가 있다. 나 역시 경험할 수 있고. 하지만 문제는 조영훈의 말처럼 말하면 그가 그렇게도 경계하는 ‘단정’을 얼마든지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한 편에는 ‘대학원생’을 위한, 혹은 ‘잉문학(잉여+인문 또는 인문+과잉을 뜻하는 신조어) 덕후’ 혹은 ‘사회과학 덕후’들이 패싸움을 하는 세미나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는 ‘수유+너머’나 ‘주부를 위한 인문학’ 강좌나 ‘감옥’ 인문학이나 ‘노숙인’ 인문학들이, ‘정치철학 강의’가 존재한다.

    거기에서도 지젝, 들뢰즈가 등장할 때가 많다. 하지만 맑스를 읽고 스피노자를 읽거나 헤겔을 읽고 알튀세와 그의 제자들의 지난한 논쟁을 알고, 푸코의 방법론을 이해하고 들뢰즈의 위상을, 지젝의 혁명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다.

    대중 vs대 좌파지식인이라는 자의적 분리선

    외려 시 한 편을 읽고 눈물을 흘리고, 들뢰즈의 어떤 문장에 감동받는 ‘주부’와 ‘노숙인’들이 있다. 그들도 대학을 졸업한 이들일까? 게다가 현장에서 맑스의 그 복잡한 『자본』 강독을 하는 노동자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조영훈은 ‘정치에 눈을’ 떴지만 ‘어려운 말’을 싫어하는, 달리 말하면 이론 세미나나 강좌도 쉬운 말로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중’과 어렵게 말하고 ‘들뢰즈의 아이들’과 ‘지젝의 아이들’의 패싸움이나 해대는 ‘좌파지식인’들이라는 자의적인 분리선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이론가들의 이름을 외면서 잘난 척을 해대는 ‘지식인’들은 분명 문제지만, 지적인 열망이 있는 ‘대중’의 존재를 애써 망각하는 조영훈의 태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거기에 조영훈은 이미 ‘반지성주의’라는 말에 대해서 ‘실드’를 치고 있다. “이론 작업을 하시는 분들 역시 반지성주의 운운하며 한탄만 한다고 대중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반지성주의’를 말하면서 과연 ‘이론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한탄할까? 한탄하는 사람들은 보통 ‘국개론’을 외치는 이들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조영훈은 철학을 주전공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기준으로 그 분리선을 완성했다. 이론은 정규 과정에서 공부한 자만 이해할 수 있다는 자의적인 설정. 이는 전형적인 엘리트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으로 볼 때 마지막으로 제기할 문제제기. 즉 조영훈의 정치적 ‘메시지’에 대해서도 따져야만 한다. 조영훈은 계속 ‘쉬운 말’을 하라고 강조하고 ‘리좀’, ‘주이상스’와 진보를 순식간에 엮어 버린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그의 비난조는 사실은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것이 된다.

    그의 눈에 대중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우리 안의 욕망이 이명박을 만들었다는 진부한 이야기” 정도를 대중들이 알아내는 것일까?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은 ‘현실을 바르게 알고 함께 하자는’ 정도이다.

    문제는 스토리텔러의 부재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안의 욕망’은 노무현도 만들었고 김대중도 만들었고, 권영길에게 100만 표를 주기도 했던 욕망이다. 도대체 조영훈의 ‘우리’는 누구일까? 그리고 시민단체와 노동조합은 액면 그대로의 현실을 바르게 알려주는 조직일까? 도대체 그 ‘현실’은 무엇일까?

    문제의 핵심은 조영훈의 관점이 요구하는 정치적 판단이라는 것이 진보와 좌파의 정치가 말하고 있는 것들을 뒤돌리기 딱 십상이라는 것이다. 진보와 좌파는 부단하게 새로운 정치적인 대안들을 말하게 된다.(말해야 할 때도 있다)

    왜냐하면 기성의 정치구도, 그리고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사회경제적 조건들 혹은 권력의 문제들이 다른 방식의 정치가 다 나쁜 것이라고 칭하거나 없는 것이라고 무시하는 것들이 바로 진보와 좌파 정치가 제시하는 정치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진보와 좌파의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이슈들을 캐내는 것, 예컨대 청년 유니온의 『레알 청춘』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의 상황 같은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런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구조에 대해서 심층적인 진단을 하고 그것들을 타개하기 위한 정치이다.

    그 때문에 여러 이론들이 등장하기도 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대중들의 저항감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이론 세미나나 진보정치의 급진적 성격 그 자체가 아니고 그것을 적절하게 해석해내고 ‘대중 정서’의 맥락에 맞게 풀어서 ‘스토리텔링’을 해주는 사람의 부재가 아닌가.

    먹물 비판의 퇴보

    그런데 조영훈은 애먼 몽둥이를 들고 와서 ‘이론 세미나’에 철퇴를 가하고, 맥락 없이 진보 매체를 인상비평하면서 냉소주의만 풍기고 있다. 그리고 그 냉소주의는 무엇을 겨냥하는가? 가장 모두다 ‘합의’할 수 있는 가장 ‘온건’한 것들로의 ‘대동단결’ 아닐까?

    나는 “진보, 야!”의 첫 글에서 진보정당의 ‘중앙’에 고고하게 안주하면서 지역에서의 정치를 조직하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로 ‘먹물’을 언급했었다. 그리고 내가 제기하려던 문제는 진보정치가 지역의 대중, 무너져가는 중산층의 아이들인 청년층, 즉 ‘잉여’ 혹은 ‘진상, 양아치’들과 ‘급진적인 지역정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먹물’ 비판이 문제 제기의 맥락은 사라지고 2000년대나 1990년대에나 늘 NL들이 좌파들을 비난하던 방식으로 살아나 ‘급진적인 주장’까지 막아버리는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 ‘먹물’ 비판의 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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