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시대 큰 바위얼굴, 황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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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29일 09: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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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영환 선생. 

    밤샘 일을 하다가 잠깐 졸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면 믿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처구니없고 믿기지 않는 황당한 해고사건은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40여 년 전인 1970년 인천 부평에 있는 (주)한국베아링에서 실제 일어났던 이야기다.

    황영환 선생님은 한국베아링에서 10년을 성실하게 근무하셨다. 그런데 야근을 하다 졸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하셨다. 그 이후 황 선생님의 복직운동은 7년간 지속 되었고 지금까지 평생을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장기집권을 위해 언론통제는 물론이고 민주의 ‘민’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빨갱이로 몰아붙이던 암울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목숨을 바쳐 항거를 했던 비극적인 시절인 1970년에 모범노동자가 해고노동자가 되는 기가 막힌 사건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군사독재 시절에서만이 발생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쇠를 깎는 선반공이 되어 산업전도회 활동을 시작하다

    1960년도에 군대를 제대한 후 황영환은 인천 부평 백마장 입구에 있는 한국베아링에 선반공으로 입사를 하였다. 한국베아링은 공구를 만드는 회사였다. 입사를 하자마자 노조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베아링 노동조합 분회장이 황영환이 다니던 교회의 장로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황영환은 자연스럽게 분회장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노조활동을 시작하였다. 황영환은 어느 부서를 가더라도 현장 동료들에게 신망을 얻어 노조 대의원으로 계속 선출되었고, 분회장 직무대행과 회계감사 등을 역임하며 노조의 활동을 두루두루 익혔다. 5년 동안 선반공으로 일을 하다가 1965년에는 조장으로 현장관리자가 된 후에도 노조 활동은 변함없이 더욱 열심히 하였다.

    황영환은 한국베아링에 입사를 한 후 1961년도부터 도시산업선교회의 전신인 산업전도회의 창립멤버가 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산업전도회는 우리나라에서 산업화가 급속히 추진됨에 따라 현장선교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교회단체였다.

    산업전도회 활동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성미가 곧고 결백한 황영환의 성품과 적성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때부터 황영환은 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해 노동자로서 어떻게 살 것인지 작정을 하고 현장에서 실천하게 되었다.

    산업전도회에서는 여러 형태의 모임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모임은 인천기독교 사회문제 연구소 주최로 토요일 밤에 시작하여 일요일까지 1박2일 동안 모여 공부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강의도 듣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토론이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미국인 목사 조지 오글과의 만남은 즐거웠다. 피부가 하얀 서양 사람이 한국말을 매우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이 참으로 신통해 보였다. 그래서 한 번은 현장에 가서 동료들에게 “양키 목사가 있는데 우리나라 말을 참 잘한다”고 자랑을 했더니 동료들이 “거짓말 마! 양키가 어떻게 우리나라 말을 해” 하며 믿지를 않았다.

    그가 “진짜”라고 하자, 동료들은 긴가민가해 하면서 “그럼 한 번 데리고 와보라”고 하였다. 황영환이 오글 목사를 만나 “내가 다니는 공장 동료들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 나와 함께 공장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냐”라고 물어보니 오글 목사는 쾌히 승낙을 하였다.

    그래서 공장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정말 한국말로 또박또박 설교를 잘해서 모두 신기해 하였다. 황영환은 그 후 몇 번 조지 오글 목사를 현장으로 초청해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또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느헤미야모임에서는 현장관리자의 자세에 대하여 서로의 경험을 주고받았다. 모임은 목수가 집을 짓듯이 체계를 갖추면서 꾸준히 발전하였다. 1970년 평신도들의 요구에 의해 산업전도회는 도시산업선교회로 명칭을 바꾸게 되었다.

    전태일의 조의금을 모금하다

    황영환은 1970년 평화시장에서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한 후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 있는 인권위원회부터 전태일을 위한 조의금 모금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노동조합에서는 현장 조합원들에게 전태일의 죽음에 알린 후 모금을 하였다. 그 때는 지금처럼 직접 모금함을 돌리지 않고 줄이 쳐진 편지지로 현장에 회람을 돌렸다. 현장 동료들은 각자 20원내지 30원의 조의금을 내겠다고 약정을 하며 이름과 금액을 적었고, 총무과에서는 월급 계산을 하면서 조의금을 공제했다. 이렇게 모은 조의금이 4만원이 되었다. 당시의 황영환이 한 달 월급이 48000원이었으니 꽤나 많이 모은 것이다.

    그 후 어느 날 청계피복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태일의 친구 최종인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한국베아링 조의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황영환이 노조의 사무국장에게 확인을 보니 “지부장을 통해 금속노조에 접수가 되어 전달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지부장에게 확인해보니 ”전달했다“고 하였다. 그 당시에는 통신수단인 전화가 없어서 직접 금속노조를 방문하여 확인해보니 조의금이 접수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다시 청계피복의 최종인을 찾아가 조의금을 받지 못하였다는 확인서를 받았다.

    지부장에게 재차 확인해 보니 전달을 하였다고 끝까지 우기는 것이었다. 깐깐하고 명확한 황영환은 그냥 넘어 가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회계감사를 하여 지부장이 조의금을 횡령한 것을 밝혀냈다. 이 일이 있은 후 황영환은 노조지부장과 회사 측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히게 되었다.

    모범 노동자, 졸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하다.

    당시 한국베아링은 호황기를 맞아 24시간을 풀가동을 하여 12시간씩 맞교대를 하였다. 황영환은 1960년 입사 이 후 1970년도까지 10년 동안 주야간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70년 회사 창립 기념일 날 회사측으로부터 ‘모범종업원상’까지 받았다.

    요즈음에는 밤샘작업을 하게 되면 근무시간 중에 시간을 정해놓고 한두 시간 휴식시간을 주어 쉬게 하기 때문에 1970년대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작업시간 중에는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꼼짝없이 기계 앞에서 로봇처럼 일해야만 했다.

    그러니 아무리 낮에 잠을 많이 자도 순간순간 졸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생리현상이기도 하였다. 12월 어느 날 황영환도 야간작업을 하다 잠깐 졸았다. 회사 측은 이것을 빌미 삼아 사직서를 쓰라고 종용하였다. 사직서를 쓸 정도로 잘못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거부하였더니 아무런 절차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고를 시켰다. 노동조합 지부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집회의도 거치지 않고 대의원대회에서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였다.

    만약 회사나 노동조합 지부장에게 미운털이 박히지 않았으면 그냥 넘어가거나 경고 정도의 징계의 대상도 되지 않는 가벼운 실책이었음에도 회사는 해고를 시키고 노동조합 지부장은 조합원 자격을 박탈한 것이었다.

    부당한 해고와 구속에 맞서 법정투쟁

    황영환은 회사와 노동조합을 상대로 복직투쟁을 시작하였다. 회사 측의 부당해고에 대해서는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고, 노동조합 대해서는 부당한 조합원 자격정지를 철회할 것과 회사를 상대로 부당한 해고를 철회 하도록 한 후 복직투쟁에 함께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과 노동청은 회사 측에게 ‘해고는 부당한 징계조치임으로 철회하고 복직시키라’는 판정을 하였다. 그러나 복직은 되지 않았다. 그 당시 사용자들에게 노동법은 어둠속 그림자처럼 있으나마나 하였다. 노동조합 지부장 역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눈 가리고 아웅 하듯 회사 측과 적당히 협상과 야합을 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하기 보다는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들을 희석 시켜주는 회사 측의 인사노무 담당 관리자처럼 행세하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운영에 대한 문제점들을 모아 지부장을 검찰청에 고발을 하였다. 지부장은 황영환을 무고 및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하여 보복하였다. 경찰서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황영환을 구속하였다. 분노한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에 임시총회와 황영환의 조합원제명취소를 요구한 후 지부장의 부정사실을 다시 고발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고발 된 지부장에 대하여는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회사와 노동조합, 그리고 경찰은 삼박자를 맞춰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한통속이 되어있었다.

    인천지역에서 최초로 해고 노동자가 된 황영환은 현장 동료들의 지원을 받으며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과 해고예고 예외인정 신청을 하면서 합법적인 복직운동을 시작하였다. 처음 있는 일이라 자문을 받을 곳도 없었다. 혼자서 노동법을 공부하며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황영환은 아무도 오른 적이 없는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아무나 갈 수 없는 힘겨운 길을 선택한 것이다.

    1971년 결혼을 하여 행복한 신혼생활을 즐겨야 하는데 해고로 인해 월급이 끊어져버려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갓 태어나기 시작한 예쁜 딸들의 모습을 대견해 할 겨를도 없었다. 가족들의 생계는 불빛하나 없는 밤길을 걷는 것처럼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이 막연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다행히 아내가 선박회사에 다니면서 생계를 해결하고 아이들을 키웠다. 1972년도부터 시작한 황영환의 법정투쟁은 내가 동일방직에서 똥물사건으로 해고당한 후인 1979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그림자처럼 항상 함께 한 사람

    산업선교회에서 그룹활동을 열심히 하였던 내가 황영환을 만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조화순 목사는 황영환을 “놀라우리만큼 철저하고 지독한 완벽주의자이다. 이런 사람은 처음 봤다” 며 소개를 하셨다. 이날 이후 나는 황영환으로부터 생생한 현장 투쟁이야기와 노동법 강의를 듣기도 하면서 노동자로서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도 하였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복직을 위해 다양한 복직운동을 시도하였고, 우리들 옆에는 항상 황영환이 그림자처럼 함께 하였다. 그 당시의 경찰은 누구보다 노동자들에게는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함부로 대했다. 특히 남성이면서 해고노동자였던 황영환은 남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서도 더욱 모진 고통을 당했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 한 마디 없이 침묵으로 모진 고통을 감내 하였다.

    1978년 9월 22일 기독교 회관에서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라는 제목의 연극을 마치고 모두 가두시위를 하던 중 누군가가 “박정희가 빨갱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해고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되었다. 황영환도 연행되었다.

    경찰은 황영환에게 “박정희가 빨갱이다라고 외친 사람이 누구인지 대라“고 다그쳤다. 모른다고 했다. 경찰은 황영환이 다니는 광야교회의 교인인 강남규를 지목하면서 강남규가 외쳤다는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하였다.

    황영환이 아니라고 하자 경찰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강남규가 했다고 하는데 왜 너만 아니라고 하냐, 너 간첩이지”라고 들이댔다. 황영환은 “난 간첩이 뭔지 모른다”며 “강남규는 본래 연극배우인데 연극 연습하러 가기 위해 종로3가에서 내렸고 동일방직 연극과는 상관이 없다"고 거짓 없이 사실대로 이야기를 했다.

    이 때 경찰은 시키는 대로 진술을 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황영환에게 "너와 같은 놈은 드럼통에 넣고 땜질해서 돌멩이 하나 매달아서, 바닷가에 떠나보내면 그만“이라며 협박을 하며 쇠파이프와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마구잡이로 온 몸을 난타하였다.

    온 몸에는 피멍이 들었다. 한참을 두들겨 패고 난 후 그들은 내용을 불러주며 유서를 쓰도록 강요하였다. 황영환은 불러주는 대로 유서를 받아 적고 맨 아래에 "위와 같은 유서의 내용은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쓰여짐"이라고 단서를 붙였다. 그러면 경찰은 욕을 하며 다시 폭력을 휘둘렀다.

    즉결재판에서 구류 29일을 받았는데 구류를 사는 동안 내내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서 죽도록 고문을 당하고 저녁에는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잠을 잤다.

    사실 황영환은 구호를 외친 사람이 김주호라는 청년임을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함구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구호를 외친 김주호란 사람이라는 것도 밝혀지고 그는 구속이 되었다.

    노동운동은 우리의 운명이다

    인생에 있어서나 현장투쟁 경험에 있어서나 모든 것의 모범인 노동운동의 선배 황영환이 동일방직 해고자들과 함께 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는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투쟁할 원동력이 되었고, 비빌 언덕이 되기도 하였다.

    동일방직 복직투쟁은 회사를 상대로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을 하는 합법적인 투쟁과 노동자의 아픈 현실에 대해 알리기 위해 사회여론을 형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실시하였다.

    그러나 복직은커녕 전국에 뿌려진 블랙리스트에 의해 취업조차 저지되었다.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권리인 생존권과 노동권마저도 빼앗겨 버린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담당형사가 따라붙어 24시간 밀착감시를 하였다.

    우리 집은 동일방직 옆 담을 끼고 있었는데 통반장까지 동원이 되어 수시로 집을 들락거리며 나의 모든 것을 감시하였다. 이 때문에 가족들까지도 사생활 보장이 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경찰의 감시로 인해 대성목재에 다니고 있던 여동생도 더 이상 공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일들은 산 넘어 산이었다. 그 때 나는 살아서 숨 쉰다는 것이 죽음보다 더 심한 또 하나의 고통으로 느껴졌다.

    누가 무슨 말로 우리를 위로 할 수 있었을까? 성경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의 삶? 아니면 노동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먹고 자라며 쓰여진다는 노동의 역사? 그 무슨 논리와 이론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거나 힘이 될 수 없었다. 답답함으로 만난 우리들은 종종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퍼마시고 서로 부둥켜안고 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구였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아마 해고된 동료들인 최연봉, 안순애, 석정남, 나, 이렇게 몇 명이 황영환과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인천 송도에서 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이날도 우리는 무엇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까 결론도 없는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었다. 답이 없었다.

    그 때 황영환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는 노동자이다. 노동운동을 우리의 운명으로 생각하자” “노동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팔자로 생각하자” “피해갈 수 없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즐기면서 가자” 며 비장하고 숙연하게 이야기하였다. 나는 황영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니 좌절과 슬픔 중에도 싸울 용기도 갖게 되고 마음도 편안해지고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노동문제 전문가가 되다

    복직투쟁과 산업선교회에서 노동자 실무자로 약 10년을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던 황영환은 1980년 한국기독교 노동문제 연구원의 부설기관인 노동문제 상담소에서 노동자를 상담, 교육, 조직화하는 일을 하였다. 수없이 많은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 때 몇 권의 책을 만들었는데 지금 기억하는 책은 ‘노동조합 업무서식’과 ‘사장님 저희는 다시 돌아와 일할 겁니다’ 라는 사례집이다.

    그 후 다시 한국기독교 사회사업 개발원에서 노동문제 상담을 하였다. 초보 노동자들을 상담하다 보니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간편하게 볼 수 있는 자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게 수첩 만 한 크기로 “알기쉬운 노동조합서식”, “부당해고와 산업재해” 등의 안내소책자를 발행하여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필요할 때 참고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30년 세월을 쉬지 않고 교회단체에서 일하다가 65세가 되던 2000년도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그만 두었다. 노동운동이 활성화 되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맘 편히 왔다 갔다 하면서 쉬고 있는데 그동안 알고 지냈던 후배들이 황영환을 위한 후원회를 조직하여 성수동에 사무실을 얻어 주었다. 다시 무료로 노동자 상담을 시작하였다. 단체에 억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월급도 받지 않고 상담을 하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그러나 평생을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한 탓인지 2005년도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때 황영환의 나이 69세였다.

    “성실하라” “서로 책임지라”

    평생을 노동자의 벗이요 안내자로서 살아오신 황영환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은 1975년도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나는 특히 노동자출신이면서 당당하고 거침없이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 온 황영환 선생이 어느 누구보다 더 자랑스럽다. 그리고 존경한다.

    그래서 황선생은 1987년 나의 결혼식에 주례도 부탁드렸다. 황 선생님은 주례 말씀으로 우리 부부에게 “성실하라” “서로 책임지라” "어른을 공경하라“ ”믿음으로 하나되라“고 덕담을 해주셨다.

       
      ▲황 선생님의 고희연 사진. 

    2006년도에는 선생님이 다니시던 부평광야교회 교인들과 인천 반도상사 해고자들 그리고 동일방직 해고자들이 선생님의 고희연을 해드렸다. 고희연이라고 말씀을 드리면 손사래를 치시며 거절하실 것 같아 만나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모시고 나왔다, 황 선생님은 조촐하고 소박하게 차린 생신잔치에 쑥스러워 하시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우리들이 마음을 모아 처음으로 해드린 생신잔치가 평생을 가난한 해고노동자로 살면서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빛과 희망을 제시하며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이나 존경함의 표시라고 할 수 없겠지만 우리들의 작은 사랑과 정성이 기쁘신지 함께 하는 동안 내내 선생님은 사모님과 즐거워 하셨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이 많이 회복 되셨다. 모든 활동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 평일에는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짓고,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의 가장 오래 된 선배로 민주화운동의 어른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 내고 계신다.

    청년이었던 우리들이 중년의 나이를 넘기고 우리가 낳은 자녀들이 다시 청년으로 자라고 있는 지금도 나는 황 선생님을 생각하면 항상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주는 큰 산처럼 의지가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고 강직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서있는 큰 바위를 보는 것처럼 자랑스럽고 마음이 든든해진다.

    큰 산/ 황영환선생님 고희를 축하드리며

       
      ▲축시를 낭송하는 필자. 

    거대하게 우뚝 선
    큰 산을 바라다보면
    격정의 세월
    변함없이 함께 해 온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우거지고
    울긋불긋함으로 피어오르다
    하얀 눈꽃으로 온 몸이 뒤덮여도
    지치지 않고 의연하게
    때로는 도도하게
    우뚝 선 큰산을 바라다보면

    혹독한 노동과 좌절과 상처투성이의
    스무살 처녀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법
    당당하게 사는 법을
    몸소 행함으로 보여준 사람
    바로 당신을 보는 듯 합니다.

    한평생을
    오로지 한 길에서
    가난으로 소외된 자
    외로움으로 슬퍼하는 자의 손을 잡고
    길잡이 되어 그림자처럼 함께 한 사람

    모두가 비켜가는
    칙칙한 어둠과 그늘만 사랑한 사람
    당신이 계시기에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마음의 큰 산이 되어버린 당신을 생각하면
    가을햇살 받으며 빛나는 누런 벼이삭을 바라보듯
    마음이 여유로워집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농익은 사랑의 깊이를 느낍니다

    고희를 맞은 당신의
    변함없는 큰 사랑이 자랑스럽습니다
    하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6년 11월 4일

    * 이 시는 황영환 선생의 고희 축하하는 시로, 이 글의 필자가 써서 당시 고희연 자리에서 직접 낭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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