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세욱 당원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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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26일 10: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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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김수민이라는 사람입니다. 구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편지를 써놓고 며칠을 망설였습니다. 매체를 통해 공개가 가능할까, 대표님이 읽으실 수 있을까, 내가 몇 사람이나 설득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말해봐야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패배주의가 다시 저를 엄습해 왔습니다. 한편으론 먹고 사느라 바빠서 신경 쓰기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분당의 상처 제 생각보다 너무 깊어

    저는 지금 무소속이지만 예전에 민주노동당 당원이었습니다. 대표님과 같은 기간에 당원이었던 적은 없는 듯합니다. 2008년 1월에 나갔습니다. 이른바 선도탈당파였습니다. 지금은 ‘녹색사회당’ 노선을 그려보면서 호시탐탐 정당활동 복귀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따로 창당했으면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혁신적 통합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녹색사회당으로 뭉치자”는 겁니다. 참 순진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해야 합니다. 정치는 해야 하는 건 하는 거잖아요?

    전 끝내 당적을 잃을 정도로, 또 제 역량에 비해서도, 지나치게 완고한 사람이었지만, 정치는 본디 외연확장의 욕망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통합해서 커질 덩치나 지지세를 어찌 쉽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분당 이후 지역이나 노동현장의 상처는 제 생각보다 심각해서,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 없었습니다.

    이정희 대표님께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단지 대표님이라서가 아닙니다. 저는 비수도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당적이 없는 탓인지 정보가 좀 늦습니다. 얼마 전 녹색정치포럼과 청년유니온 모임에 참석하러 서울에 들렀다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소속된 분들한테 물었습니다. “진짜 민주노동당 당권파는 국민참여당이랑 통합하려고 하느냐? 진보신당과 통합에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할 건가?” 그들이 “맞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대학 초년생 시절에 대선 후보 노무현을 지지했었습니다. 제가 민주노동당 당원일 때 그런 전력을 약점으로 잡는 당원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 당의 분위기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계승 의지는 민주당 못지 않습니다.

    단순히 노대통령의 죽음이나 분당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정희 대표님은 의정활동에서도 유능하신 분이지만, 정치력 자체가 뛰어나신 분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한을 띄웁니다.

    제가 이 편지를 보내는 이유

    앞서 녹색사회당 노선을 언급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좌파’ 선언을 하시던데, 이건 그다지 새로운 길은 아닙니다. 불안정노동자들이 당당한 노동계급의 주역이 되고, 핵과 토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보다 붉고, 더욱 푸르게’는 이 시대 진보정당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걸 첫걸음 떼기도 어려운 길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탈핵 시나리오를 써야 할 진보주의자가 북한의 핵모험을 미국의 제국주의와 함께 놓고 비판하는 건 당연하고 초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많으시죠? 이런 부분도 합의가 안 됩니다.

    패권주의는 이에 비하면 부차적입니다. ‘패권주의가 제일 나쁘다’는 말은 ‘이명박 정권이나 재벌보다 폭력경찰이 더 나쁘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는 당권 경쟁에서 패배할 경우에 발생하는 스트레스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지향하는 최소한의 정당노선과 이념, 정책이 충족되면, 누가 대표가 되고 대선 후보가 되든 상관이 없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들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통합의 디딤돌과 걸림돌도 당권이 아니라 당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통합은 ‘더디더라도 굵게’ 논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니까 도리어 여기저기서 가뭄의 논바닥처럼 쩍쩍 분열이 벌어집니다. 여러 현장의 상처는 흉터로 남을 것만 같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국민참여당과의 통합론이 불거지면서 혼란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더디더라고 굵게 논의해야

    저는 지역에서 국민참여당 당원 분들을 곧잘 뵙습니다. 아주 반가운 분들입니다. 보편적 복지나 주민참여제도를 함께 고민하시고, 요즘에는 노동 문제에도 관심을 많이 쏟으십니다. ‘희망버스’에 앞장서시기도 했습니다. 과거보다 가까워질 수 있고, 앞으로 더 가까워질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섣부른 통합으로 인해 멀어질까봐 저는 두렵기만 합니다. 양당제를 유도하는 정치체제 하에서도 독자적 정당을 꾸렸고, 자신과 처지 비슷한 다른 군소정당과도 뾰족한 비판을 주고받아 왔던 이 고집스러운 3개 정당이 뭉쳤다가 극심한 내홍에 휘말리지는 않을지.

    민주당을 뺀 ‘중통합’을 하면 민주당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일각에 있더군요. 하지만 뭉친 만큼의 성과가 있을까요.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 이미 20퍼센트에 가까운 여론조사 지지율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했던 열린우리당도 해산하고 민주당 질서로 회귀했습니다. 민주당 내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인물들은 계속 ‘대통합’을 주장할 것입니다. 대표님도 민주당 입장에서는 ‘분열주의자’로 비쳐지곤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민주당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기간 동안 내부에서 계속 확인되는 차이와 갈등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다시 분당으로 치닫습니다.

    국민참여당과 함께 활동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그 초창기 내용이 ‘통합’이어야만 합니까? 지금 급한 건 그게 아닙니다. 참여당 유시민 대표는 “한미FTA에 반대”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의심이나 경계를 하지 않습니다. 정태인 선생이 노무현 정권을 이탈해 반대 투쟁에 앞장선 것만큼 좋은 일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그 이상의 효력이 있습니다. 환영해 마땅합니다. 자꾸 간을 보려는 듯한 진보신당의 태도도 못 마땅합니다.

    함께 하는 게 꼭 통합이어야 하나?

    진보정치세력과 국민참여당은 한미FTA 반대운동부터 공동으로 조직해야 합니다. 왜 이런 기회를 각 당 지도부가 날려버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여당 유시민 대표를 향한 호불호를 떠나, ‘용기 있는 전향’을 과감히 수용하고, 즉각 행동에 돌입해야 됩니다.

       
      ▲필자.

    작년 지방선거 이후 나타난 혁신적 정책들도 미국이나 유럽과의 FTA로 인해 풍전등화가 된다는 건 많은 분들이 아시지 않겠습니까? 한미FTA부터 폐기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연대의 조건들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참여당과의 통합 논의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전 현실에서 벌어지는 선거연합이나 후보단일화 대부분에 대해 부정적이었습니다. 덕양갑의 진보신당-민주당 단일화 시도와 울산북구의 진보신당-민주노동당 연합을 반대했었습니다.

    그런 저 같은 이도 민주당이나 참여당에서 제시하는 정책들을 보며 다소 마음이 열립니다. 조금씩 열고 차근히 손잡으면 안 될까요? 잘못 통합해버리면, 그 다음에는 끊임없이 다투고 갈라서는 외길을 걸을지 모릅니다.

    이정희 대표님. 마지막으로 당부 드립니다. 허세욱 열사는 민주노동당의 당원입니다.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 같은 사람은 그분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던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한미FTA 폐기를 되새겨 주십시오.

    "망국적 한미FTA 폐지하자. 굴욕 졸속 반민주적 협상을 중지하라. ……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일은 싫다.
    나는 내 자신을 버린 적이 없다. 저 멀리 가서도 묵묵히 꾸준히 민주노총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허세욱 열사 유서 중에서)

    새 친구를 맞이할 채비보다, 오랜 동지와의 약속을 지키는 게 먼저입니다. 우리는 절대 그를 버려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 자신을 버리면 안 됩니다.

    이정희 대표님, 언제나 건강하십시오.

    * 이글의 필자는 민주노총 경북지역일반노조 조합원이며 현재 구미시 의원이다. 자신을 "아주 이따금씩, 알량하게, 내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시민"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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