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르바초프, 올바름과 치명적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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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19일 10: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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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8월 19일은 1991년 8월 19일에 일어난 소련의 ‘8월 쿠데타’의 2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쿠데타’, 즉 일부 정통 스탈린주의적 관료들의 거의 절망적인 – 그리고 매우 미숙하고 준비 안된 – 소련 붕괴 방지의 시도 이전에도 소련은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쿠데타’에서 친서방, 친시장 세력(자유민주주의자)들이 완승을 거두자 그 완전한 붕괴는 그저 시간의 문제가 됐습니다.

    구소련의 세 가지 커다란 장점

    그 결과? 그나마 서구에 가장 지리적/문화적으로 가까운 구소련 지역들(발틱 공화국들, 몰도바 공화국 등)은 유럽연합을 위한 저임금 노동력의 공급지이자 서구 기업, 은행들의 ‘행복한 놀이터’가 되고, 어느 정도 자원을 보유한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등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국제적인 자원 공급자로 전락하고, 구소련의 중앙아시아의 다수의 국가들(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은 ‘개발 없는 독재’, 즉 민생 문제마저도 해결할 수 없는 최악의 독재 정권 하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구소련은 수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지만, 세 가지 커다란 장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비록 노동자 민주주의가 잘 가동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관료국가는 ‘지배자’의 노릇을 해왔지만, 일단 개별 기업소 차원의 이윤 추구가 불가능한 전국적 계획경제라는 구조상 장기적인 고(高)기술 개발, 과학연구에 합리적인 집중투자를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즉, 지속적 과학발전과 생산력 향상이 가능했던 구조였습니다.

    둘째, 노동시장이 아닌 합리적이고 계획적인 직장 배정 시스템상으로는 완전고용과 각자 전공에 따른 취직은 가능해 행복한 직장 생활은 어느 정도 보장돼 있었습니다.

    셋째, 비록 민주적 장치가 태부족했지만, 집권 공산당이 일단 숙련공 집단을 그 정치적 발판으로 삼았으며 민생, 복지에 대한 상당한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주변부에 재배치돼 있는 구소련의 후계국가에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그저 꿈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소련식의 체제에서는 경제적 모순도 당연히 없지 않았지만(예컨대 냉전적 상황에서는 군수기업들이 지나치게 비대화된 한편, 경공업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저하되는 등 각종 불균형이 심했습니다) 가장 첨예한 모순들은 상부구조의 모순, 즉 사회적 모순이었습니다.

    권력과 자본이 세습되지 못하는 체제

    모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계급 형성의 문제였습니다. ‘현실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일체 생산수단들을 다 소유하는 국가는 사회를 지배한다고 할 수 있었지만, 사회와 유리된 지배계급의 형성은 어느 정도 차단돼 있습니다.

    체제의 관리자, 즉 고위직 관료들은 그 위치를 세습시킬 수 없었으며, 지배체제의 중심축인 공산당에서 ‘출세’를 하자면 일단 일선 기업소에서 일선 노동자로 노동생산성이나 조직능력 등으로 인정 받아 입당하여 맨 밑으로부터 맨 위까지 천천히 ‘사다리’를 밟아가야 했습니다.

    예컨대 그 체제를 무너뜨린 주역 가운데 한 명인 고르바초프만 해도, 농업노동자로서 ‘모범노동자’가 돼 꽤나 일찍 (고등학교 시절에) 입당을 해 그 다음에는 지역 청년공산당(콤소몰) 위원회 하급 간부직부터 중앙공산당 총서기장까지 약 35년 동안 경력을 쌓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는, 그 위치를 예컨대 그 자녀들에게 물려줄 꿈도 꾸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무섭디 무서운 스탈린만 해도 딸(스베틀라나)은 일선 영어번역자, 편집자뿐이었고, 두 아들은 다 1941~1945년에 전쟁터에 직접 나가 몸소 참전해야 했습니다(한 명은 포로가 돼 죽었고, 전투기 조종사이었던 또 한 명은 26차례 출격의 경력을 쌓는 등 꽤 위험한 참전생활을 보내야 했습니다). 지배체제는 있어도 뚜렷한 지배계급은 없었던 것은, 바로 혁명과 스탈린의 반동 이후에 성립된 체제의 주요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체제에서는 일선 노동자, 농민 이상의 대다수 유식자나 간부들의 꿈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대자적 계급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당 간부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부러워한 이유

    수많은 간부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는 자본주의체제를 부러워했으며, 노동자층과 간부층 중간에 있었던 지식인층도 서방 재산가나 고급 지식노동자들의 풍요로운 생활을 선망하는 한편 국제적 냉전이 부과하는 수많은 버거운 제약들(자유로운 출입국의 제약, 해외 취직의 제약)을 혐오하는 나머지 미국과 서방세력에 투항하더라도 냉전을 종식해야 한다는 논리에 동조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러시아에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신흥 기업가층의 약 80%는 고등교육 수혜자들을 부모로 갖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현재 러시아 기업가층과 공산주의 시절의 간부층/지식인층의 직접적 계승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지식인층 같은 경우에는 특히 숙련공층을 정치적 기반으로 했던 공산당의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각종 역차별 정책을 혐오했습니다. 예컨대 고(高)인기 대학에 입학하는 데에 있어서는 ‘노동자들을 위한 예비 과정’을 이수한 노동자, 농민, 전역 군인 출신들이 가산점을 받아 비교적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한편, 막 고교를 졸업한 지식인 자녀들은 서로 치열한 입학경쟁을 뚫어야 했습니다.

    공산당이 그들로 하여금 대입 이전에 적어도 2년 정도 현장 노동 경험을 쌓도록 유도하려 했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들끼리 ‘고깃덩어리’라고 지칭했던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것은 모욕이자 고역이었습니다. 바로 이들 간부층과 지식인층은 결국 소련 망국의 사회, 정치적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올바름과 치명적 오류

    1985년부터 사회에서의 노동생산성 향상의 저조라든가 각종 계층적, 민족적 모순의 첨예화에 착안하여 혁신정책을 선포한 고르바초프 신임 서기장은 처음에는 기본적으로 맞는 노선으로 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 조직의 민주화도, 몇 명의 후보가 한 선거구에서 경합을 벌이는 소비에트 조직의 민주화도, 스탈린 시절의 국가범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희생자들의 명예 복원도, 망국적인 군사비용을 줄이기 위한 미 제국과의 화해모드 조장도 다 소비에트 체제의 내재적 논리상 의미있는 정책이었으며, 이런 노선이 망국의 원인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용서할 수 없는 오류는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1989년경부터 ‘현실사회주의’ 체제 그 자체를 반대하고 노골적으로 친자본주의적, 친서방적 노선을 채택한 분자들의 정치활동까지도 ‘자유민주주의’ 미명하에 허용했는데, 이는 정말 치명적인 오류이었습니다.

    결국 발틱공화국 등지에서 민족분리주의 구호하에서 뭉쳐지고, 중앙에서는 친자본, 친서방적 간부층 출신(엘친 등)과 대표적인 자유주의적 지식인(예컨대 사학자 아파나시에브)들을 중심으로 해서 뭉쳐진 반(反)사회주의 세력들은 ‘소련 해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대표했던 계급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말았습니다.

    구공산당 간부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골간이 되는가 하면(일거에 대학 총장이 된 아파나시에브 등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지식인 계층의 상부는 새로운 체제에 매우 좋은 조건으로 기생하면서 그 이념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준지배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식인 상층과 노동계급

    이들의 지배하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은 무엇보다 노동계급이었습니다. 이미 1994년에 러시아에서 약 4백만 명의 주택 없는 하층민들이 발생됐는데, 절대 다수는 사유화의 과정에서 문 닫은 공장 출신의 직공들이었습니다. 엘친과 아파나시에브의 계급적 입장 공고화의 대가는 바로 이들의 배고픔과 병고, 그리고 때이른 죽음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없지만, 탈(脫)자본주의 과정에서는 이를 절대화하면 안됩니다. 밖에서는 세계 중심부로부터의 각종 파괴 공작과 공격에 노출돼 있고, 안에서는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얼마든지 꿈꿀 수 있는 관리자층, 지식인층의 동요를 막아야 하는 사회주의 혁명 이후의 국가에서는 통상적인 자유민주주의 룰을 적용해 반(反)사회주의적 성격의 정치활동까지 허용해주면 상황에 따라 매우 곤란할 수도 있는 것이죠.

    지금 베네수엘라처럼 절대 다수 빈민들의 혁명적 열정이 높은 상황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 절차를 적용한다 해도 혁명의 진전은 가능하지만, 말기의 구소련 상황은 달랐습니다.

    대중들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보유한 지식인층부터 이미 사회주의적 가치를 많이 이탈한 상황에서는, 반(反)사회주의적 선전선동의 자유까지 허용해주는 것은 사실상 반공주의적 광란을 허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반공주의적 광란

    적어도 계획경제의 기본과 근로대중을 위한 복지 등 체제의 골간을 지키자면, 자유주의적 룰의 적용을 다소 유보해 차후 단계적으로 하든지 했어야 했고, 친자본주의적 고위층, 지식인층에 대해 훨씬 더 강경해야 했습니다.

    시장만능주의를 외치는 자유보다는, 노숙자가 되지 않을 자유나, 노동자 출신임에도 무상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자유는 백배 더 중요합니다. 이미 서방의 자유민주주의적 통념에 사로잡힌 고르바초프는 –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열망했던 다수의 간부들이 바람대로 – 이를 외면해 ‘자유민주주의’ 구호를 외치면서 다수의 민(民)이 살인적 상호 경쟁과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지옥적 사회로의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기억해야 하고, 다음에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기회가 생긴다면 그 어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지배계급을 형성하려는 자들에게 그렇게 할 ‘자유’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결국 다수의 진정한 자유의 유일한 보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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