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기업 노동자 → 다문화가정 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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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19일 01: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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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너니 나니 하며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를 뜻하는 ‘너나들이 공동체’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방문과 상담을 통하여 어려움을 파악하고 통합적인 서비스 활동을 통해 해결하도록 도움을 주는  비영리 민간단체다.

너나들이 공동체에서는 다문화가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부 문제, 자녀교육 문제뿐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과 문화가 다르고 피부색깔이 다르고, 언어가 다름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사회 부적응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돕기 위해 2009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문을 열었다.

너나들이 공동체는 모든 다문화가정이 우리의 친근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희망한다. 맘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이웃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이곳에서 나의 30년 지기 박노희가 일하고 있다. 너나들이 공동체는 박노희의 일터이며, 쉼터이며, 주거 공간이기도 하다.

박노희는 콘트롤데이타에서 노조 활동을 하다 1982년에 해고를 당하였다. 내가 1978년에 해고를 당하였으니 비슷한 시기에 해고자로 만난 노희와 나는 이심전심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그 후 30년 세월이 흘렀고 노희는 지금까지 자신의 노력과 봉사가 필요한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하고 있다. 바람처럼 흐르는 30년 세월을 어디든지 날아가 자리 잡고 싹을 틔우는 민들레홀씨처럼 쉬지 않고 일하고 있는 노희의 끈기와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박노희는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의 소개로 콘트롤테이타에 입사를 하였다. 입사시험을 보러가던 날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핑크색 작업복을 입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며 ‘아, 공장이구나’ 하며 실망했으나, 입사시험과 면접을 거치면서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도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입사를 하자마자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동조합 조합원이 된 박노희는 틈틈이 책을 보거나 공부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부류의 친구들과 어울렸다. 친구들은 노동조합 활동에 열정적이어서 모두 노동조합의 대의원 이었다.

박노희도 두말할 여지없이 적극적으로 노조 활동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대의원 출마 권유도 받고 간부교육 권유도 받았지만 응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대학공부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어서 콘트롤데이타에서 일을 하면서도 은연중에 ‘여기는 내가 다닐 곳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해고자모임을 꾸리다

그러던 중 1982년 3월 콘트롤데이타는 노사교섭위원들이 회사로부터 해고를 당하였다. 전체 조합원이 8박9일 항의농성을 벌인 이후 노동부에 복직 면담 요청을 갔다가 이태희, 박영선, 조성희 언니들이 구속이 되고, 이들과 함께 행동을 하였던 박노희는 즉결 재판을 받고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이 와중에 콘트롤데이타 경영진은 짐을 싸서 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구류를 살고 나온 박노희는 구속된 사람들이 석방이 될 때가지 투쟁을 하기로 마음먹고 대학 공부를 접었다. 대학 공부를 하는 것보다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면서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해놓고 동일방직이나 원풍모방처럼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하여 ‘고등 병신'(당시 콘트롤데이타는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지만 박노희는 김말룡 선생이 운영하던 노동상담소,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사무실을 전전하며 해고자 모임을 하면서 동료들을 규합하였다.

함께 해고된 동료들 김경태, 정채진(전 성남시의원), 이정화들과 “금수강산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말인가”라는 제목으로 연극을 만들어 전국을 다니면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퇴직금을 받지 않고 투쟁을 하였더니 회사에서 공탁을 걸었다. 끝까지 퇴직금을 타지 않으면 국고로 넘어간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퇴직금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활동을 하면서 다 써버렸다.

꾸러기동산을 운영하다

   
  ▲박노희.

1983년 간호보조학원에 다녔다.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딴 후 사당의원에서 근무를 하다 그만 두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열망을 접어 버릴 수 없었기 때문 이었다.

1986년도에는 천주교 노동사목에서 비조직노동자를 상담하여 교육, 조직하는 활동을 하였다. 1987년도에는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면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지속적인 활동과 쉬지 않고 도약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몇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어 사회과학 공부를 하였다. 이 모임에서는 한국사회와 구조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노동운동의 과거 역사와 현황과 과제에 대해 생각해 보며 각자 자신들의 위치를 점검해보면서 어떤 식으로 운동에 기여할 것인지 고민하는 자리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회비를 모았는데 그 액수가 몇 년이 지나다 보니 자그마치 580만원이 되었다. 이 금액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의견을 나누었다.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공장이 밀집되어 있는 구로공단지역인 구로3동에 전세를 얻어 여성노동자들의 아이들을 위한 비영리 민간 탁아소 ‘꾸러기동산’을 설립하여 운영하기로 결정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맞벌이 노동자 부부들의 자녀양육 문제는 큰 관심거리였다. 맞벌이 부부가 아이들 낳게 되면 아이가 자랄 때까지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엄마는 공장에 다니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영유아들의 보육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지역에서 무엇보다 시급하게 서둘러서 추진해야 할 일로 여겨졌다. 이런 지역 활동은 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활동만큼이나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박노희는 살고 있던 전세방의 보증금을 모두 털어 꾸러기동산을 설립하는데 투자했다. 그리고 본인은 꾸러기동산에 조그마한 다락방을 들여 그 곳에서 생활하였다. 꾸러기동산에서의 활동은 힘이 드는 일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로 신나는 일들이 더욱 많았다.

지역의 노동자들에게 건강증진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지역의 비영리 민간탁아소들의 연합체인 지역탁아소연합에 소속이 되어 영유아보육법 제정운동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한살림 유기농 식단으로 아이들의 건강을 챙겼고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못쓰게 된 식용유를 재생하여 비누를 만들어 판매하여 탁아소 운영기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상담 활동을 시작하다

1996년에는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해 필리핀 어학연수를 떠났다. 어학연수 권유를 받고 처음에는 자신이 다국적 기업의 피해자이고 “양키 고 홈”을 외쳤던 사람인데 어떻게 영어 연수를 위해 외국으로 나갈 수 있느냐며 갈등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내에서만 활동하는 것보다는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고 또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 쉴 겨를도 없이 1999년도 천주교 수원교구 이주노동자상담소에서, 2002년부터는 의정부 이주노동자 상담소에서 상담일을 하게 되었다. 노동운동을 통해 알게 된 노동법에 관한 지식과 한노협에서의 노동자 상담, 교육 경험과 필리핀 어학연수 중 이방인으로 살았던 과거의 경험들은 삼박자가 되어 외국인 노동자 상담에 풍부한 영양소가 되었다. 아무리 작은 문제라도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함께 결정하며 실행을 하다 보니 국경을  초월하여 신뢰감과 연대감이 형성 되었다.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은 산업연수생이라는 이름으로 입국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전공기능을 살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거의가 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힘들다고 기피하는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마치 잘 살아보겠다고 1970년대에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단순노동으로 돈을 벌었던 우리나라 이민자들처럼 그들도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신분과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로 있는 경우가 많다. 박노희는 상담활동을 통해 이들이 이민자로서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부당한 일들을 함께 힘을 모아 해결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건강과 비싼 의료비였다. 의료보험 카드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감기라도 걸리게 되어도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병을 키우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박노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엠마우스 의료카드를 만들어 시행을 하였다.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한 달에 5,000원씩 회비를 받아 몸이 아프면 언제든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 50%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지역에서 뜻이 있는 의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8년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살기 위해 네팔과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여행을 떠났다. 네팔 트레킹 후 짐바브웨에서는 일자리도 없이 하루 밥 한 끼 그것도 옥수수가루를 끊여서 만든 죽으로 연명하며 살아가는 고아, 에이즈 환자들을 재활하도록 돕는 고아원, 학교, 장애인시설에서 함께 살았다. 말이 여행이지 실제로는 혹독한 자기훈련을 한 것이다. 덕분에 몸에 붙었던 군살들이 모두 빠졌다.

   
  ▲한국어 교실에서 한글을 배우는 엄마들과 함께. 맨 오른쪽이 박노희.

너나들이 공동체를 운영하다

2009년 귀국하자마자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경기도 양주에 집을 얻어 너나들이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우리나라는 2004년부터 국제결혼 붐이 일어났다. 혼인 시기를 놓친 농촌총각들이 동남아지역이 여성들과 결혼을 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국제결혼상담소를 통해 결혼했으나 삶의 방식과 문화의 차이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박노희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다문화가정의 문제도 누군가가 나서서 함께 해결해야 할 우리 시대의 문제로 보았다.

현재까지도 베트남에 라이따이한(월남전에 참가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현지에서 낳고 돌보지 않는 자녀)이 있고 필리핀에는 필코(우리나라 남자들이 필리핀 현지에서 낳고 돌보지 않는 자녀)가 있으며 경기도 양주에는 200여가구의 다문화가정이 흩어져서 어렵게 살고 있다.

현재 15명의 아이들이 너나들이배움터에서 방과 후 학습을 하고 있다. 엄마들은 한국어 교실에서 읽기와 쓰기 공부를 하고 있다. 선생님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로 구성이 되어 있고 교육비는 무료이다. 교육비를 조금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사는 형편이 너무 딱해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운영비 마련을 위해 공정무역을 통해 수입한 동티모르 커피와 곶감들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마음과 정성으로 함께 하는 후원자들도 있다. 후원 받는 물품들을 모아 두었다가 자체적으로 작은 바자회를 열어 싸게 판매하기도 한다. 후원 받은 미싱으로 틈이 나는 대로 테이블보, 발닦이 수건들을 손수 만들어 판매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어떻게 먹고 사느냐?”는 나의 질문에 박노희는 “굶지는 않는다.”며 씩 웃는다. 너나들이 공동체(cafe.daum.net/nonaduri)를 들여다보면 각자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희망의 씨앗이 싹 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수강산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 말이냐”라고 외쳤던 씁쓸한 구호처럼 다국적기업의 민주노조 해고 노동자로 시작하여 30년 세월을 변함없이 국경을 초월하여 가난하고 소외당한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 박노희의 삶 속에서 나는 강도 만난 자를 구해 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본다. 모진 세월 풍상을 통해 강철처럼 단련 된 깊고 넓은 경험으로 세상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엄마와 같은 숭고한 사랑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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