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부산 영도에서 내가 깨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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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17일 04: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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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희망버스를 타고 돌아왔을 때 뜬 눈으로 밤을 샌 아내가 나를 반겼다. 트윗이 뭔지도 몰랐던 아내가 하룻밤 새 트윗과 친해졌고, 아프리카를 통해 봉래 교차로의 긴박한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해 들었던 것이다.

    길었던 무박 2일의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나를 반긴 것은 아내뿐만이 아니었다. 급하게 떠나며 어질러진 작업실로 돌아오니 마감을 독촉하는 전화가 반기고 있었다. 책상 위의 물감들이 떠나기 전의 상태로 굳어 쓸 수 없게 되었다. 고작 이틀 사이에 먼 곳을 다녀온 듯 내 일상의 작은 균열이 감지되었다.

    "나 희망버스 탔다"…"팔자 좋네" 

    이 상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조금은 혼란스럽기도 했다. 다시금 밥벌이에 쫓기는 일상에 젖어들었지만 희망버스의 기운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을 때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집값이 지금과 같지 않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전세금에 몇천만 원을 보태어 살 수 있게 된 작은 아파트. 그것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집을 마련하게 된 내게 ‘부동산 재벌’이라며 놀리던 친구였다. 지금은 그 당시의 집값으로 전세도 살기 힘든 시절이 되었다. 고작 5~6년 만의 일이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나 희망버스 탔다.”라는 말이 툭하고 튀어 나왔다. “네가 정말? 와 부럽다.”라는 말을 기대했었나 보다. 하지만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팔자 좋네.”라고. 잠깐의 머뭇거림 속에 친구와 내가 같은 일상에 머물고 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친구와 나는 대학시절 X세대라는 딱지가 붙은 개인주의에 젖어 자기밖에 모르는 세대로 불렸다. 최루탄에 눈물 콧물 쏙 빼 볼 기회도 없었던 시대이려니와 워크맨을 들고 다니며 듣고 싶은 곡만 들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심취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내가 희망버스를 탔으니 뜬금없어 보였을 것이다. 직장에 얽매이지 않은 몸이니 신간 편하게 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쌍둥이 아빠인 친구는 집주인이 전세금을 올려달라는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수도권으로 이사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1억 조금 넘는 전세금에서 어떻게!!! 한 번에!!! 그것도!!! 7천만원이나 올려달라는 것이 대명천지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며 허탈해 했다.

       
      ▲사진=진보정치 / 정택용 기자 

    내가 희망버스를 탄 이유

    이제 막 아이들이 걷기 시작할 때니 들어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한진중공업 조선소의 크레인 위에 누가 올라가 200여일 농성하든, 쌍용자동차의 해고가족들이 죽어 나가든, 너무 먼 이야기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먼 남의 이야기인 것일까?

    나는 어쩌다 희망버스를 타게 되었을까? 그 중심엔 85크레인의 그녀가 있다. 그녀가 찍은 크레인 위에서의 셀프카메라를 보았고, 그녀의 환한 웃음을 보았다. 목숨을 내놓은 그녀의 절박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녀는 새장의 새처럼 불안에 퍼덕이며 일분일초 피를 말리는 싸움을 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우리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내걸고 올라간 절박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의 여유로운 모습이 내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결혼 10년을 넘긴 나는 여전히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한 채 저절로 오르는 각종 생활비에 허덕이고 있었다.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벌겋게 부어오른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만 같았다. 어깨를 토닥여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희망버스에 올랐다. 나만 억울하고, 나만 팍팍하고 고된 삶인가 하는 답답함에 올라탄 희망버스인 것이다.

    그곳에서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거대한 장벽은 우리를 물리적 힘으로 눌렀다.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쏴댔고, 여기저기서 괴로움과 처절함을 토해냈다. 분을 삭이지 못하는 젊은 혈기와 이미 지쳐버린 사람들……. 그렇게 새벽을 맞이했다.

    새벽 봉래교차로에서 내가 깨달은 것

    거리에서 뜬눈으로 밤을 샌 사람들 하나하나를 보았을 때 알았다. 그녀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희망이란 이름으로 꼭꼭 숨어 있었다는 것을. 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모였으니 그 기운이 엄청났다. 두려울 것도, 힘들 것도 없었던 것이다. 왠지 모를 동질감과 벅찬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 배만 부르면 그 뿐이고 내 등만 따시면 그뿐이라고 아등바등하며 살아왔던 그동안의 삶에선 느낄 수 없는 벅찬 기운이었다.

    한진중공업이 경영 흑자를 내며 돈 잔치를 할 때도, 정리해고로 노동자를 벼랑 끝으로 내몬 사실을 애써 외면했었다. 이미, 매스컴을 통해 쌍용자동차처럼 극으로 치닫는 노사 갈등을 수 없이 봐왔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저들의 울부짖음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싶은 참담한 현실이었으니까. 그들의 고통과 절망이 전염될까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희망버스를 타고 전염된 건 그들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희망버스를 탄 각자의 처지와 입장은 다르지만, 그렇게 제각각인 사람들이 뭉쳐 거대한 외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연대란 우산을 함께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이라고 희망버스를 탄 어느 분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희망버스를 탄 그 누구도 여유롭고 한가해서 온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자기 안의 절실한 외침에 답하기 위해, 삶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어렵게 모였다.

    7월을 넘기기 전에 3차 희망버스 날짜가 잡혔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재능교육 농성장에 모였다. 저번엔 보지 못했던 재능교육 농성 1318일째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4년 가까운 시간이다. 텐트는 바퀴가 달린 널빤지 위에 쳐져 있었다. 고단한 투쟁의 흔적이었다. 크레인 위의 그녀도 한겨울에 올라가 한여름이 되었으니 어쩜 희망버스도 긴 싸움의 터널로 들어섰는지 모른다.

    희망버스에 중독된다는 것

    2차 때 갔다 와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렇게 희망버스에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어떤 분이 말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그렇다. 우린 희망버스에 중독된 것이다. 함께 하고픈 강한 기운에. 희망을 주러 가는 것이 아니라 받으러 간다는 것을.

    나 또한 이번엔 아내와 함께 마지막 여름휴가를 영도 섬으로 들어가 산을 넘었다. 산 위에서 전경버스로 둘러싸여 성역이 되어버린 85크레인이 내려다보이는 애잔한 풍경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우리가 훗날 역사적 순간의 현장에 있었노라고 내 아이에게 자랑스럽게 말하게 될 날을 상상하며 85크레인을 향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3차 희망버스는 2차 때의 충돌을 피했고 다음날 한진중공업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본질적인 물음을 던졌다. 우리는 왜 지금 여기서 무엇을 울부짖는가? 라고.

    7월은 특별했다. 나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리고 4차 희망버스는 서울이다.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와도 함께 갈 계획이다. 그동안 친구를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술로 풀며 신세 한탄이 고작이었다. 이젠 더 이상 자기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지 말고 열린 공간으로 나가자. 나가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토해내자. 내 이야기와 네 이야기가 섞이고 엮여서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자. 우리의 이야기가 서로를 위로해주고 보듬어 주고 우리사회의 변화의 물꼬를 트는 가능성으로 확장시켜보자.

    희망버스는 정리해고 철회라는 한진중공업만의 문제를 벗어나 우리의 문제가 되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희망버스가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당연하고 자연스런 우리의 일상이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희생을 징검다리 삼았다는 것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아야겠다.

       
      ▲4차 희망버스 웹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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