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원들을 속시원히 싸우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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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15일 1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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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진보신당 당원이자 민주노동당에도 당비를 끊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진보신당 통합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어 글을 기고합니다.

    1.

    얼마 전 서울대에서는 법인화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인화 문제가 가장 큰 이슈가 되도록 만들었던 학생들의 본부 점거가, 총학생회가 본부측과 밀실에서 협상 함으로써 해제되었고 이로 인해 법인화 문제는 갈길을 잃었다는 사실은 대다수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듯합니다.

    총학은 본부 점거 해제를 결정하는 전학대회 이전에 이미, 본부와 몇시까지 빼겠다는 합의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생기는 모든 일들에 대해 어쩔 수 없었음을 강변하는 총학생회를 보면서 학생들이 뽑아 놓은 최고권위의 지도부가 이 지경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지금 운동을 고민한다는 학생들의 진정성과 정직함의 수준이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가 하는 통탄스러움, 한줌도 남지 않은 이 학생운동 사회에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게 곪아 있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2.

    부산역에서 한진중공업 관련 플래카드를 땡볕에 들고 서 있던 철도공사 해고자 한 분은, 단협 과정에서 조합원의 찬반을 묻지 않고 합의해버린 노조 지도부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권위를 위임받은 지도부가 때아닌 절차를 과하게 내세우거나 반대로 무시하려 할 때는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내부 의견 충돌의 껄끄러움을 덮고 가려 할 때 입니다. 이 충돌의 과정에서, 현재 권위를 등에 업을수 없는, 무의식적으로 악을 써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디로 가야하나,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3.

    몇해 전 호암교수회관 노동자들이 고용승계 문제로 파업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 노조 위원장님은 동네아저씨 같은, 데모의 ‘ㄷ’ 자도 모르실 것 같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파업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이 투쟁을 위임받은 서비스연맹 상급단체가 이 노조 위원장을 빼고 다른 집행부와 합의하여 이 명분으로 본부측과 협상을 마무리지어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 싸움을 이끌어왔던 노조 위원장은 화병으로 병원에 입원했고, 얼마 전 들었던 소식에 의하면 지금까지 그간 걸려 있던 소송 때문에 재판정에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4.

    저는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에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파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실력에 대한 자신감과, 소수정당의 입지를 커버할 수 있는 장치에 대한 지혜로운 합의만 있다면 왠만한 합당에는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즉, 큰 적 앞에서 감정의 경계가 허락되고 나의 입지를 보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전술이 있는 한 진보정당은 커지면 커질수록 좋다는, 소위 조직관에 있어서는 NL론적 대동단결론자입니다.

    그러하기에 민노당과의 분당 과정이 정말 쓰라렸고, 분 당위기의 정점에서 ‘왜 NL 계열이 다수이던 민주노동당에서, 비대위 대표가 진보신당 계열로 인선되었으면서도 NL동지들이 받을 수 없는 안을 제시할까!’ 하는 답답함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때 저의 답답함은 민노당이냐 진보신당이냐 하는 선택의 고민이라기 보다, 함께 있을 때의 민주노동당이 좀 더 큰 정당이 되었으면 하는 안타까움과, 일을 풀어나가는 지도력들의 진심과 ‘품’ 에 대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이후 성추행 사건이나 당기위의 결정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것도 여기서 오는 답답함 때문이었습니다.

    5.

    보통 조직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헌신적이면 헌신적일수록 딱딱해 보이고 대화하기가 어려운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활동에 대한 확신과 경험이 그 사람을 재미없고 경직되게 만든다고 할까요? 그런면에서 진보신당의 매력과 차별성은 집체화되거나 경직될 수 있는 진보라는 신념 속에서도 존재했던, 조금은 유치했지만 소소한 자유로움으로도 표현할 수 있었던, 그런 모습들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진보신당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통합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통합의 과정, 즉 통합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또한 부드럽지 않습니다.

    진보신당이 민주노동당이나 국민참여당 등과 통합 논의가 일어나는 것은 진보신당만으로는 안 된다는 현실 인식 때문입니다. 더 까놓고 말하면 ‘우리는 실력이 안된다’는, 진보신당이 걸어가려 했던 독자노선에 대한 패배의 선언이요, 현실에 대한 쓰라린 인정입니다.

    그런데 통합을 주도하는 분들에게서 이런 쓰라림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평가에 대해서 아파하지 않으면서 앞으로만 나아가려 하는 사람은 앞으로 불어올 조그마한 미풍에도 크게 흔들릴수 밖에 없습니다. 그랬을때 우리의 큰 장점이었던 소소한 자유로움과 여유는 사라지며 우리는 더욱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6.

    87년이든 92년이든 아니면 요즘과 같은 때이든 간에 단결을 요구하는 정세는 언제든지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금만 진보의 파이가 커진다면 이해관계에 의해 독자노선을 가야하는 상황도 필연적으로 생길 것입니다. 역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열이냐 통합이냐의 상황은 언제나 존재하며 그 선택 또한 가변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통합과 독자노선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 그것은 조직이 ‘얼마만큼 후회없는 선택을 하도록 구성원들을 도와주느냐’로 정리됩니다.

    민주노동당과의 분당이 아픔과 서러움으로 기억되기보다 오히려 속시원한 선택으로 기억되는 것은 미련없이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또한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사측이나 노조지도부가 이랬건 저랬건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기에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담담하게 투쟁할 수 있습니다.

    이런 후회없는 싸움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싸움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판이 깔려야 합니다. 기륭전자 파업 노동자들이 주주총회를 못 들어간다든지, 대의원총회에서 발언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든지 하는 상황에서는, 즉 대립하는 상대와의 힘의 관계가 너무도 극명한 상황에서는 후회없는 싸움을 제대로 벌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계란으로 바위를 깬 그 후과는 그 계란에게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진보신당은 당내 권력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후회없이 주장하고 싸울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주는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당을 떠나게 되더라도 미련없이 떠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하며 남아있는 사람들 또한 그 무게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도록 치열하게 싸우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정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점잖 빼는 성명서와 숫자놀음이 아니라 ‘제대로된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링’입니다. 싸움 자체는 나쁜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싸움을 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져야만 조직은 건강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 마음은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진심으로 아파하면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7.

    서울대 총학생회는 전학대회를 통해 본부점거를 접는 짜여진 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본부점거를 해제하는 결정이 나자마자 본부를 빨리 빼줘야 한다며 울고 있는 몇몇 학우들을 뒤로한 채 붙어있던 자보를 뜯었습니다.

    한진노사는 희망버스 며칠 전부터 언론과 방송에서 불법크레인 점거 김진숙을 한목소리로 비난했습니다. 호암노조 상급단체였던 서비스연맹은 데모의 ‘ㄷ’자도 모르던 하지만 누구보다 순수하고 열심이었던 위원장에게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진보신당이 이런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도부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모든 통합에 관련된 외부 논의를 접었으면 합니다. 통합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으면서 행해지는 어떤 대화와 토론의 제스쳐도 진정성 있게 비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담스럽다면 무기한 연기라도 선언했으면 좋겠습니다.

    통합하려는 당들 중 가장 적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는 진보신당에서 논의를 하다하다 의견이 맞지않아 소리지르고 나가거나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속시원히 싸웠다는 마음 하나는 남을 수 있는 과정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이일을 진정한 통합의 가장 우선 순위로 두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만이 당내 의견의 차이를 넘어서 지도부가 신뢰받을수 있습니다. 시대의 엄중한 정세는 권력을 가진 주체가 사람인 이상 언제든지 찾아옵니다. 이명박 정권 5년이 아닌 훨씬 더 힘들고 엄혹한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당장의 시대의 부름과 사명을 이유로, 아니 어떠한 이유로라도 사람들에게 한을 남겨서는 안됩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언제든지 분열합니다. 뒷일을 도모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패배했다고 느껴야지 무기력했다라고 느껴서는 안됩니다.

    만약 이런 것을 모르고 앞만 보고 가고 있다면 그것은 실력없는 소수자의 조급함일 뿐입니다. 지도부의 용기있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저는 통합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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