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다녀와 뒤늦게 시다돼 현장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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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11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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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모임인 ‘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약칭 70민노회)’ 카페에 들어가 보면 주제에 따라 다양한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운영하는 카페처럼 신속한 소식 나눔과 활발한 댓글들을 통해 왕성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발 빠른 맛은 없지만 두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산행 공지부터 시작하여 운영위원회 안내와 회원들의 대소사 등을 함께 나누는 끈끈한 정과 여유가 있다.

포근한 고향 같은 사람들

기기슬슬이라는 필명으로 기약 없이 몇 년째 70민노회 간사로 카페 운영자로 활동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태희 언니이다. 태희 언니는 70민노회 사람들을 친근하고 포근한 고향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1970년대부터 민주노조 투쟁을 통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염원하며 뼈를 깎는 고통을 감당하면서 살아 온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70민노회 회원들의 봄나들이. 왼쪽에서 네 번째가 이태희. 

태희 언니 역시 콘트롤데이타 노조에서 활동하다가 1981년 해고를 당하고 구속이 되는 질곡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지금까지 좌절하지 않고 늘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이 당당히 살고 있다.

이태희는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인 1973년, 콘트롤데이타에 입사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과자회사에서 경리로 일을 하였는데, 학교 동창들이 “괜찮은 외국인회사에 취업하자”고 하여 덩달아 서류를 접수하였다. 바로 콘트롤데이타였다. 서류 접수 후 몇 가지 면접시험을 보았는데 기분 좋게 합격하였다.

집안 살림은 그런대로 넉넉한 편이어서 맘만 먹으면 대학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오직 함께 만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껏 깔깔거릴 수 있는 친구들이 좋았다. 그러다보니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속담처럼 콘트롤데이타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입사 첫 날 이태희는 당연히 사무실에서 근무할 줄 알았는데 파란색 작업복을 주더니 현미경 앞에서 조립하는 일을 시켰다. 그러나 깊이 고민하지 않는 낙천적인 성격 탓에 별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하였다. 이태희는 컴퓨터 완성단계에서 최종적인 마무리 조립을 하였고, 기능공이 된 후에는 잘못 조립 된 것을 고치는 작업을 하였다.

이태희는 주간작업보다는 야간작업을 즐겼다. 낮에는 모든 공정이 가동이 되어 라인작업에 맞춰 기계처럼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여유도 없었고, 항상 소란스러워서 싫었다. 그러나 야간작업은 라인 작업의 규모가 작았다.

정지된 라인들은 모두 소등을 하여 마치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가로등 아래처럼 현장 분위기는 고즈넉하고 정적이었다. 이런 조용하고 아득한 분위기가 좋았다. 또 노래를 좋아하다보니 엘피(LP) 레코드판을 틀어놓고 좋아하는 노래를 실컷 들을 수 있었다.

이태희는 특히 감미로운 팝송을 좋아했는데 당시 유행하던 사이먼 앤 가펑클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와 닐 세다카의 ‘유민 에브리씽 투미’를 특히 좋아했다. 국내가요들도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진정 난 몰랐네’ 어니언스의 ‘작은새’ ‘편지’ 등 사랑을 주제로 한 발라드풍의 노래들을 좋아했다. 뿐만 아니라 차분히 가라앉은 듯 허스키한 목소리와 풍부한 음량으로 노래 부르기도 즐겨했다.

언젠가 나는 어느 회식자리에서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를 이태희의 노래를 통해 처음 들었는데, 가사가 너무 좋아 한동안 나도 십팔번으로 부를 정도로 좋아하게 되었다.

대의원으로 당선되다

함께 입사한 동창들은 노조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고등학교 동창인 김지영은 노조 사무장이 되고, 입사동기(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인 또 한 친구는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이태희에게도 노조활동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노조활동에는 관심이 없어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 무기명투표를 통해 생각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던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7년 당시 콘트롤데이타노조는 무기력한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기 위해 현장 지지세력 결집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사 측과 밀착되어 있는 박명자 지부장 세력과 현장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한 이영순 세력 간의 힘겨루기가 팽팽해서 서로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양쪽 세력이 대립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원만하게 조정되기를 원하던 이태희는 어찌됐든지 양쪽이 함께 해야 될 것 같은 안타까움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대의원대회에 참석하여 이영순을 알게 되었고, 이영순의 발언 내용과 행동이 옳다는 판단이 들면서 이영순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런 이태희를 지켜보던 박명자 집행부와 이영순 지지파들은 모두 깜짝 놀랬다. 사실 이태희는 박명자 집행부 쪽과 밀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영순 지지파들은 이태희를 조직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태희가 이영순을 지지했으니 박명자 측이나 이영순 측이나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이태희는 부녀부장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소비조합 활동부터 시작을 하였다.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필수품들을 조사하여 도매시장인 동대문시장에서 구매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였다. 이 후 총무부장직을 맡으면서 노동조합의 모든 문서를 총괄하고, 대자보를 작성하였다.

본격적으로 노조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태희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낮에는 시간을 내어 속기학원에 다녔다. 그러나 노조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다 보니 신문기자가 되는 것보다 노조활동이 더욱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자연스럽게 신문기자의 꿈은 활발한 노조활동으로 승화되었다.

현장에는 여러 종류의 그룹들이 있었다. 이태희는 현장 그룹을 총괄하면서 노동자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룹들의 원활한 활동을 지지하기 위해 시간이 나는 대로 탈춤도 추고, 꽃꽂이도 하고, 일본어도 배웠다. 노래를 좋아했던 터라 이영순 지부장으로부터 기타를 배워 본격적으로 노래지도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특별히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노동가요를 현장에 전파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바쁘게 현장 활동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조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간부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노조활동에 관련하여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받은 교육 내용들은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였으며, 마른 땅에 이슬비가 스며들 듯 이태희의 의식 속에 깊이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일방적인 해고 통보, 파업농성으로 맞서다

그러나 1981년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노동계 정화조치로 이영순 지부장이 해고를 당하였다. 이후 1982년 봄 이태희를 포함한 6명의 노사교섭위원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게 되었다.

이태희는 10여 년을 일하면서 20대 꽃다운 청춘을 모두 바쳐 최선을 다해 일했다. 지각, 결근 한 번 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하여 항상 생산량을 초과 달성하여 회사는 계속 번창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까지 받았던 모범노동자였는데 그 결과가 해고라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다른 노사교섭위원들도 마찬가지로 청천하늘의 날벼락 같은 해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체 조합원들은 분노했다. 그래서 “부당해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공문을 만들어 미국 본사에 보낸 후 현장을 장악하고 부당해고 항의 농성을 하게 되었다.

다국적 기업이라 ‘외자기업특례법’과 ‘쟁의행위금지법’에 의해 파업을 할 수 없었지만 조합원들은 총회에서 파업농성을 택했다. 파업농성은 8박9일로 계속되었는데 이태희와 집행부 임원들은 파업농성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하기 위해 현장 풍물패들과 어울려 탈춤도 추고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를 ‘늙은 노동자의 노래’ 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며, 재미있고 지루하지 않도록 농성을 이끌었다.

파업이 시작되자 회사 측은 냉방시설을 총가동하여 농성장은 엄동설한이 되어버렸다. 조합원들은 비인간적이고 파렴치한 회사 측의 대응에 더욱 분노하였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서 먹을 것과 담요를 가지고 오게 하였다.

회사 측과 야합한 경찰들은 방문을 한 가족들에게 “당신 딸이 빨갱이한테 물이 들어가니 빨리 데려 가야 한다”고 흑색선전을 하였으나 농성자들은 투쟁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며, “경찰들이 오히려 흑색선전을 하고 있다”며 가족들을 설득하였다. “파업농성은 조합원자들을 정치적으로 무장할 수 기회”임을 더욱 증명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농성이 장기화 될 기미가 보이자 회사 측은 단전, 단수 조치를 하였다. 모든 것은 더욱 불편해졌다. 조합원들은 지쳐갔다. 하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이 때 지저분해진 화장실과 농성장을 솔선수범하여 청소하는 조합원들이 있었다. 박영선이 주도하고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인 ‘파트리모임’의 회원들이었다.

이들의 헌신과 봉사에 이태희는 큰 감동을 받았다. 평소에도 함께 활동하면서 많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는데 말없이 농성 동료들을 위해 봉사하는 그들을 보며 이태희는 ‘신앙은 곧 실천이다’라는 생각을 더욱 절실히 하게 되었다. 농성이 끝난 후 이태희는 바로 천주교 교리공부를 하여 ‘짓다’라는 영세명을 얻게 되었다.

경찰이 겹겹이 에워 싼 농성장에는 원풍모방, 시그네틱스 등 민주노조들의 방문들 역시 큰 힘이 되었다.

복직 요구하다 구속이 되다

공문을 받은 미국 본사에서 부사장이 급히 입국하였다. 조합원들이 부당해고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자 부사장은 “미국 본사에서는 해고시킬 생각이 없다"며 "한국정부가 해고를 시킨 것이니 한국정부와 합의를 하면 복직시키겠다”고 하였다. 이태희는 조합원들과 노동부장관을 면담하기 위해 찾아갔다. 그러나 노동부장관을 만나기는커녕 모두 남부경찰서에 연행이 되었고 이태희는 박영선, 조성희와 함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다.

10여 년을 근무하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양심으로 최선을 다해 일해 왔는데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하고 구속이 되다니 억울했다. 농성도 아니고 면담을 하기 위해 집단 방문을 하였을 뿐인데 구속이라니 상식적으로도 이해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현실을 받아들였다. 재판을 받고 1년 3개월 징역살이를 하면서 이태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노동자적인 사회구조의 개혁은 올바른 노동운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며, 올바른 노동운동은 많은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합법적인 노동조합과 정치적인 역량의 발전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올바른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을 하였다.

1980년 광주의 민주화 항쟁이 군인들의 살인 폭력으로 진압이 된 후 불화산처럼 타오르던 민주화의 열기가 다시 꽁꽁 얼어붙어 버렸을 때 명동성당에서 신부님들이 모여 마스크를 쓰고 침묵시위를 하는 것을 보며 ‘신앙은 곧 행동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태희는 모든 것이 차단 된 상황 속에서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기 위한 신앙은 곧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속박과 탄압을 뚫고 일어나는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는 기쁨도 누릴 수 있었다.

찢어진 상처의 아픔과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의 눈물겹고 아름다운 삶처럼 감옥은 이태희를 더욱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단련시킨 또 하나의 수련장이 되었다.

시다가 되어 미싱을 배우다

석방이 되어서는 감옥에서 다짐한 것처럼 삶의 목표를 노동현장에 두고 천주교 노동사목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간사로 6년을 일했다. 하지만 조직되지 않은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교육하는 활동들의 한계를 느끼면서 마음에 차지 않았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현장노동자로 살고 싶었다. 이태희는 1989년 구로공단 근처에 자취방을 얻고, 구로공단에 있는 태흥상사에 시다로 취업을 하여 미싱을 배웠다. 일요일도 쉬지 못하면서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일을 했다. 체력이 따라주지 않아서 힘이 들었다. 하지만 20세를 전후로 한 어린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재미로 힘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을 하던 노동자들은 나이가 많은 시다 이태희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미싱사들은 얕잡아 보기도 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신뢰하게 되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심을 먹고 난 후 노동자들은 이태희의 주변으로 모여 들었다.

이태희는 노동조합이라든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하여 의식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현장 친구들의 이야기를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며 말벗이 되어 주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외로움도,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미싱을 밟아야 하는 노동의 고단함도, 함께 나누다보니 이태희는 때로는 언니가 되고, 친구가 되었으며, 때로는 엄마처럼 함께 하였다.

쉬는 날이 없었지만 늦은 밤까지 일을 한 후 함께 퇴근하여 공단의 밤길을 걷는 것도 행복했다. 실제로 많은 현장 친구들이 이태희를 좋아하고 따랐다. 이태희와 현장노동자들의 만남은 마치 하얀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즐거운 만남과 따뜻한 마음을 나눔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경찰의 감시, 현장까지 따라 붙다

그러나 어느 날 이태희는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검사과에 있는 동료가 전해주었는데 “사무실에 남부경찰서 형사가 자주 와서 이태희의 동태를 파악한다는 것”이다. 회사 측은 이태희를 계속 주시하다가 해고시킬 것은 불을 보듯이 명확한 것이었다. 두려웠다.

블랙리스트로 해고당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블랙리스트로 인해 해고가 된 후 이태희를 믿고 따랐던 나이 어린 친구들이 이태희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더 이상 다닐 수가 없었다.

설익은 과일을 섣불리 먹을 수 없듯이 소모임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사업장에서 해고를 당한다는 것은 현장 친구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조용히 사표를 냈다.

그 후 노총 구로지역 상담소에서 상담일을 시작하였다. 상담하러 온 노동자들을 특기 적성에 따라 탈춤반도 만들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소그룹을 만들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지를 하고 도움을 주었다.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이렇게 살다보니 1991년 서른여덟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여 집안 살림 하면서 아이들도 낳고 키우느라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살았다. 덕분에 평생 삶의 나침판이 된 신앙생활은 더욱 깊어졌다. 지금도 성경은 이태희의 삶의 지침서이다.

마태복음 5장의 구절에 나와 있는 산상설교의 말씀처럼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와 슬퍼하는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로써의 삶을 살며, 고통 중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즐거워 할 줄 아는 확신과 여유를 누리며 살아왔다.

   
  ▲이태희.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시간의 여유가 조금씩 생겼다. 다시 주변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에 하려다보니 몇 년 전부터 70민노회의 간사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활동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회의를 통한 결정 사항들이 신속하게 처리되는 것도 아니다. 아날로그시대 사람들이라 카페활동에 적극적이지도 않다. 간사의 역할은 결정된 사항을 실행으로 옮기는 모든 과정을 확인하고, 챙기는 일을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모든 일들은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순리적으로 되어 지지도 않는다.

무슨 일이든지 수많은 노력 끝에 만들어진 피와 눈물의 결과이다. 그래서 이태희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한다.

어쩌다 만나거나 통화라도 하게 되면 “70민노회 카페에 소리 소문 없이 들락거리지만 말고 댓글 하나라도 달아 흔적을 남기라”며 카페 활동을 독려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청춘의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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