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갠지스 강변 리모델링한다면 순례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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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8월 08일 01: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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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본격적으로 4대강 공사가 시작되면서 강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환경운동가들이 아니다.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이다. 저마다 내면의 부름에 따라 각처로 카메라를 들고 떠났다. 떠난 시기는 모두 다르다. 도시로 돌아온 날도 다르다. 어느 순간 영상 일꾼들이 모일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4대강 삽질 반대 영상 프로젝트 <江, 원래>다.

    정부의 언론 통제로 영상 기록물 제작이 어려운 현실에서 <강, 원래>는 게릴라식 생산과 소통 방식을 통해 4대강 사업의 허위와 기만을 고발하고, 때론 살육의 슬픈 풍경을 말없이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었다.

    <江, 원래>엔 4대강 공사 현장 노동자의 삶이 있고, 사라지는 생명들의 이야기가 있고, 팔당 두물머리, 영주댐 금강마을 등 고통받고 투쟁하는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가 있다. 두 편의 ‘색깔 있는’ 애니메이션도 있다. 영상 작가들은 뷰파인더 속에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을 담아 왔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12편의 단편 영화가 묶인 4대강 옴니버스 영화 <江, 원래>다. 이 연재는 열 두 편의 강 이야기를 4명의 작가들과 함께 만나는 릴레이 리뷰다. 시인, 르포작가, 방송작가, 평론가 4명이 글짐을 떠맡았다.

    <강, 원래>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편집자 주>

       
      ▲’강길’의 한 장면. 

    아주 오래 전 가스레인지 불을 스스로 켤 권한이 없던 나이에 인스턴트 라면의 포장지를 보며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포장지에 그려진 라면 한 그릇에는 색색깔의 야채와 화사한 여러 종류의 고명이 얹혀 있었는데, 어떻게 저 많은 고명들이 저토록 조그만 한 봉지의 라면 안에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궁금했던 것이다.

    4대강 살리기, 실제보다 더 그럴듯한 가상

    하지만 나중에 라면 한 봉지에는 기름에 튀겨진 면과 화학덩어리로 뭉쳐진 가루 스프밖에 들어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고, 라면이 저런 구절판에 필적하는 화사한 고명이 얹혀 있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가상의 이미지와 실제가 다르다는 것을, 과장과 포장의 이미지가 소비사회에서 당연히 통용되는 법칙이라는 것을 그 때 처음 실망의 감정을 통해 배웠다. 한편으로는 라면의 소비자들이 실상을 다 알면서도 왜 저런 라면 포장지의 화려한 이미지를 허용하는가에 의문을 가지기도 하면서 말이다.

    인스턴트 라면의 포장지처럼 우리는 실제보다 더 그럴 듯한 가상에 유혹당한다. ‘한반도 대운하’라는 공약에 갸웃하다가도 그 변종인 ‘4대강 살리기’ 사업이 제시하는 이미지에 “이 정도 반대했으면 됐다”고 생각하며 속아주고 만다. “이것에만 관심 갖고 살 수만은 없는” 바쁜 현대인들은 작정하고 속이는 자들을 이기기 힘들다. ‘그럴 듯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면 내부의 착잡한 마음과 적절히 합의하면서 각자 개인의 삶 속으로 복귀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속아주며 공모한 미래의 ‘청사진’이 지금 현재의 국토를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로 만들고 있다. 4대강 사업을 홍보하는 홈페이지에 포토샵으로 그려놓은 가상의 세계는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에메랄드 시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은 ‘저탄소 녹색성장’이 가능할지 모른다며, 우리의 관념에 에메랄드빛 색안경을 씌워준다. 그러나 잠시만 색안경을 벗고 속내를 들여다보면 시멘트와 준설토를 강바닥에 들이부어 황야로 만드는 토목 사업만이 펼쳐질 뿐이다.

    대다수가 에메랄드빛 색안경이 나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고 기대할 때, 이러한 허상의 판타지가 실상 어떤 빛깔인지 조명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과 미디어 활동가들의 움직임들은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이들 덕분에 우리는 아직 개발 판타지에 수몰되지 않으며 작디작은 생명과도 눈짓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들은 4대강 사업으로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한 사회적 재현에 힘쓰며, 사라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보존하여 뜨거운 이미지로 방부처리해주고 있다. 강을 원래대로 흐르게 하라는 구호를 그 이름에 반영한 ‘강, 원래 프로젝트’……. 그중에서 강과 사람에 대해 치열히 기록한 다큐 영상의 인상적이었던 일부를 소개한다.

    스토리의 수몰과 스펙의 건설

    ‘강, 원래 프로젝트’의 옴니버스 영상 중 하나인 <자전거의 이름으로>라는 다큐멘터리는 바로 ‘청사진’의 허상과 우리가 보존해야 할 것들의 실상을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섬진강 시멘트 도로의 ‘비포 앤 애프터’를 비교한 사진에서부터 이 다큐가 시작된다.

       
      ▲사진=섬진강 시멘트자전거도로 반대 모임(http://cafe.daum.net/nocement ) 김세리

    자전거 도로의 건설 전후의 사진들이 트위터를 통해 확산되고, 자전거 생활자들은 구례로 내려가 섬진강변이 시멘트로 무지막지하게 덧발라져 있는 실상을 직접 목격하며 안타까워 한다.

    이것저것 안 해본 일 없다는 MB가 스스로 ‘자전거 라이더’가 되어 서울-부산 거리의 4배나 되는 무려 1728km의 거리를 자전거 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나서면서, 생명이 드나들던 섬진강의 아름다운 강변이 시멘트로 밀봉되었다. 이 모두가 4대강 사업의 예산을 빌려 ‘자전거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그러한 정책에 찬성한 섬진강변 주민들은 환경친화적인 자전거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강 주변의 꽃과 나무와 인간이 생태적으로 어울리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광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공사가 진행되면서 강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집이 흔들리고 망가지는 피해를 보게 되었고, 부드러운 흙길과 풍광 좋던 잔디길은 그저 삭막하기만한 시멘트 덩어리로 대체되었다.

    강 주변의 시멘트 바위가 턱이 되어 물이 고이면서 은어도 죽어가게 되었고, 수중보로 인해 물이 회전하며 모래를 휩쓸고 나가서 그 아름답던 섬진강의 금모래 밭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자전거를 즐기는 이들조차 좁은 길을 따라 자전거를 모는 생생한 맛을 잃어버렸다고 불평한다.

       
      ▲사진=섬진강 시멘트자전거도로 반대 모임 (http://cafe.daum.net/nocement ) 김세리.

    건설사의 자본적 이득 외에는 모두가 원하는 것을 완벽히 잃어버린 것이다. 다큐 영상에서 인터뷰한 자전거 생활자의 말대로 “어떤 길이든지 잠시 빌려서 갈 수 있다는 게 자전거의 장점”인데, 아름다운 풍광을 거대한 시멘트로 덮어서 자전거 도로를 일방적으로 건설하는 것은 “자전거에 대한 명예훼손”에 다름 아니다.

    결국 주민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전라남도는 원래대로 흙과 잔디길을 되돌리겠다는 입장을 보내왔지만 "시멘트가 이미 깔린 길은 철거를 할 수 없다"는 변명과 함께였다.

    제정일치 사회의 ‘장로 정권’을 대표하는 MB를 신의 아들이 아니라 ‘삽의 아들’로 칭한 또 다른 다큐 영상도 흥미롭다. <삽의 아들 MB>라는 영상에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하는 MB의 삽화가 성서를 패러디한 구절과 교차되며 웃음을 유발한다.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일 뿐이요, 헛것일 뿐이다.”(이사야 41:29)라는 성서 구절을 비웃듯이, 22조의 예산을 토목사업에 부어 스스로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 MB의 노력들이 영상의 전반에 희극적인 내레이션과 애니메이션으로 교차되어 한편의 신화적 서사로 펼쳐진다.

       
      ▲’삽의 아들 MB’ 장면들.  

    모든 법보다 우선인 ‘친수구역특별법’을 선포하여, 신의 경지를 넘보고, 전 국토를 난개발함으로써 누구나 투기꾼이 되어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유신시대풍 ‘복고적 판타지’는 결국 영상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우리가 치러야 할 3개의 시험 문제 속에서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달콤한 신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험에 들지 말아야 하건만, 결국 우리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삶의 시험을 보면서 현재의 실상을 깨우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강을 지은 자도 아니고, 삽 같은 도구로 강을 재창조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영상 속 자전거를 타는 어떤 인터뷰이의 말처럼 인간은 그저 길을 “빌려 갈” 뿐이며 자연이 만든 길을 따라 순례하고 있을 뿐이다. 자연의 일부와 동화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인간은 잠시 철학과 사상과 미학의 원리를 엿보며 감사할 자격을 갖는다.

    모든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인간은 자연을 빌려 섭리에 근접할 수 있으며, 그 자연을 비유할 디테일이 많을수록 인간의 삶은 깊이 있고 풍성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의 디테일은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국토를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강길’의 한 장면. 

    영주댐 예정지 내성천에 순례객들이 몰리는 이유는 그러한 자연의 세부를 하나라도 더 체험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옴니버스 다큐 영상 중 하나인 <강길>에는 자연을 빌려 쓰면서도 온전히 누리고 있는 겸허한 순례객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강 주변에는 코스모스와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맨발로 모래사장을 달리는 아이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제안한다.

    “간지러워요, 달려 봐요.”
    물속에서 헤엄치며 노는 아이들의 오감의 추억, 햇살에 빛나는 물비늘과 그 속에서 굽이 따라 헤엄치는 물뱀의 파동, 이 모든 것들이 영주댐 완공과 함께 한꺼번에 물에 잠기게 된다. 실효성이 없는 댐 건설에 200년 넘은 장씨 집성촌은 흔적도 없이 잠길 것이며 이곳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자본의 논리가 자연의 디테일한 추억을 갈아엎는 것을 당연한 순리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연의 세부를 통해 감각한 추억과 스토리는 상실되고 오직 대기업의 스펙만 건설되고 있다. 그 와중에 세계 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외침과 반대의 목소리가 없었다면 어쩌면 하회마을까지 수몰 예정지가 되었을 것이다.

       
      ▲’강길’의 한 장면. 

    ‘Let it be’와 ‘Let eat bee’ 사이에서

    십여 년 전 섬진강을 따라 처음 걸을 때, 사람과 마을이 모래밭과 어우러져 굽이치는 것을 보고 가슴 뛰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섬진강은 나에게 강보다 강변으로 기억되는 공간이었다. 강은 결코 단독적인 존재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모래톱의 친구였기에 아름다운 강이다. 은어가 물결 치고 야생화가 흐드러진 그 강은 함께 어우러지는 평화라는 것의 실체를 오감으로 느끼게 하였다.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면은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드리겠(황동규, 「기도」)”다고 노래한 시편을 기억하며, 나는 그처럼 강과 주변 자연의 상호적인 기운이 사랑의 섭리일 것이라고 주억거리기도 했다.

    그 이후로 강을 따라 길을 걷는다는 것은 ‘떠남’보다는 함께 어울리기 위해 돌아오는 길로 이해되었다. 강과 강변은 조화로운 곳이며 마음의 평화를 주는 곳이자 명상이 가능한 곳, 그리하여 상상과 대화의 스토리를 무궁무진하게 안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강들을 순례하며 강의 흐름과 멀어진 각박한 나 자신을 발견할 때면, 그 강의 생긴 모습 자체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래서 언젠가는 인도의 갠지스강으로 떠나 진정한 자신을 돌아볼 날을 열망한 적도 있었다.

    왜 인간에게 갠지스강은 순례하고 싶은 강인가. 다소 험악한 일이지만, 인도의 위정자 하나가 개발과 토목공사에 혈안이 되어 지금의 갠지스강을 리모델링한다고 상상해 보자.

    성대한 바라나시를 꿈꾸며 갠지스강에 요트 경기장을 만든다면, 꽃불을 띄워 소원을 비는 뿌자의식을 쾌적한 수상 택시 위에서 한다면, 바라나시의 그 복잡해서 몽환적인 미로형 골목을 릭샤(자전거)가 편히 다닐 수 있도록 직선화하고 시멘트 도로로 발라놓는다면, 갠지스강 목욕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며 힘들게 찾아온 순례객들을 스파가 있는 커다란 대중탕 사우나로 밀어넣는다면, 허름하게 입은 채 길가에서 명상하는 사두(sadhu)들을 혐오스런 노숙인이라고 강가에서 쫓아낸다면…….

    화려한 리모델링이 그 갠지스강을 살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기도 싫은 문화적 비극이 되는 것인가? “귀를 막고 눈을 가린” “벌거벗은 임금님”(<자전거의 이름으로 삽입곡> 중에서)은 오늘도 순례객들이 ‘강길’을 걷는 이유를, ‘강변’에 살고 싶어하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존 레논이 작사한 그 유명한 노래에서처럼 이미 여기 현명한 대답이 있을 것이다(There will be an answer). 그대로 두어라, 내버려 두어라, 순리에 맡겨라(Let it be)라는 목소리가 얼마나 귀가 닳도록 반복되고 있는가. 하기야 강을 원래대로 내버려두라는 사람들의 외침과 ‘강, 원래 프로젝트’의 아우성을 MB는 “Let eat bee” 정도로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강, 원래’ 옴니버스 영상 포스터.

    <江, 원래> 공동체 상영 신청하세요!

    4대강 옴니버스 영화 ‘강, 원래‘를 관람하고 싶나요?
    ‘강 원래’는 4대강의 실체를 알고 싶은 어른은 물론, 학생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강 원래’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 관객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까페(http://cafe.daum.net/free4river)의 ‘공동체 상영신청란’에 연락처와 함께 글을 남겨 주세요. 상영료는 받지 않지만, 적극적인 후원은 환영합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209701-04-308799 이하연(강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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